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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전 문명게임-44화 (44/296)

<-- 공포의 권능 -->

쿠구구구구!

다시 한 번 묵직한 위압감이 광장에 내려앉았다. 마틴이 손을 들어 올려 신호를 보내자 곳곳에 흩어져있던 마피아들이 강단 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광장의 분위기가 일순간 험악해졌다. 관중들의 놀란 소리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그대의 연설은 잘 들었네, 허나."

마틴이 로드를 향해 걸어오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본인의 앞에서는 입을 조심하지 그랬나?"

'큭!'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파도처럼 로드를 덮쳤다. 지금은 구속구 때문에 두 팔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마틴의 걸음이 가까워 질 때마다 마치 수명이 뚝뚝 떨어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마틴의 소매에서 단검이 척 나타났다.

"이번엔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후웅! 순식간에 지면을 딛고 거리를 좁힌 마틴의 단검이 로드의 이마를 향해 찔러 들어왔다. 로드가 다급히 몸을 기울였으나 그의 역량으로 마틴의 속도를 뿌리치는 건 무리였다.

'잘 가라.'

마틴 또한 로드의 죽음을 확정 짓고 미소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로드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몇 배나 빨라지며 잔상을 일으켰다. 마틴의 단검은 그가 있던 허공을 갈랐다.

'피했다고?'

마틴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예리한 칼날에 잘린 은빛 머리카락 몇 자락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공격을 피한 건 로드가 아닌, 찰랑이는 은발 머리의 베아트리체였다. 청자색 눈동자가 차분히 마틴을 응시했다.

'어떻게 밴시의 힘을?'

마틴의 얼굴이 구겨졌다. 분명 특별한 수갑에 속박되어 능력의 사용은 불가능했을 터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그녀가 포박당해 있었던 자리에 로드가 대신 나타나 있었다. 주위에 있던 마피아들은 진작에 베아트리체에 의해 쓰러진 뒤였다.

"모르겠습니까? 숙부. 그녀의 능력을 쓰지 못하도록 구속했던 수갑."

로드가 허리를 숙여 방금 전까지만 해도 베아트리체를 속박하고 있었던 빈 수갑을 들어 올렸다.

"사실은 그냥 평범한 철제 수갑이었습니다."

"……뭐라?"

그녀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자는 유니벨이었다. 그 이후 베아트리체는 갑자기 영체화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듯 보였으며, 결국 유니벨에게 패했다.

그 활약으로 마틴은 유니벨을 신뢰하게 되었고, 별다른 의심 없이 베아트리체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사실 유니벨은 이중 스파이였고, 수갑 또한 평범한 철제였다. 로드와 베아트리체는 계획을 위해서 참고 있었던 것뿐,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감옥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로드가 말한 두 번째 안전장치였다.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둔 덕분에 로드는 마틴과 대면해서도 대등하게 설전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유니벨과 베아 두 사람이 치열하게 싸웠던 것도, 우리들이 유니벨에게 속아 붙잡힌 것처럼 보였던 것도, 사실은 전부 계획된 연기였습니다. 당신과 마피아들 모두……."

로드가 비틀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단 말입니다."

"…이 빌어먹을 놈이!"

마틴이 격분하여 로드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당신의 상대는 접니다."

등 뒤에 있던 베아트리체가 영체화로 구속구에서 빠져 나와 달려들었다. 마틴은 어쩔 수 없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의 공격을 방어했다.

"보스를 지켜라!"

"놈들을 잡아!"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자 강단에서 관중을 통제하던 마피아들이 로드와 베아트리체를 잡으려 등을 돌렸다.

푹! 푸욱!

그러나 등을 돌린 대가는 컸다. 어느새 날카로운 쇠붙이들이 그들의 몸을 관통해 있었다.

"커, 커헉!"

몇몇 관중들이 돌연 강단 위로 뛰어 들어와 그들의 등에 무기를 박아 넣은 것이다. 마피아들이 피를 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반역자 마틴을 몰아내자!"

"가자!"

그와 동시에 관중으로 위장하여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이 무기를 꺼내 들고 우르르 강단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조폭들을 비롯하여 각각의 클랜장들이 매복시켜놓은 병사들이었다.

"이 놈들이 감히!"

"막아라!"

마피아들과 클랜의 병사들이 뒤섞이며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다.

평범한 관중들은 아우성을 지르며 정신없이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광장은 눈 깜짝할 새에 아비규환의 상황에 빠졌다.

"리체!"

유니벨이 달려드는 마피아를 발로 걷어차며 외쳤다.

"받아!"

두 개의 단검이 원을 그리며 허공을 날아와 베아트리체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때린 건 이걸로 퉁치는 거다?"

"……."

베아트리체는 고급스러운 외형의 단검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한 대는 깎아줄게."

"쪼잔해!"

*

강단 위를 지키는 마피아들과 관중석에서 몰려든 클랜 병사들과의 전투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 무기가 부딪치고, 피가 튀고,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기 있다! 왕을 죽여라!"

마피아들이 로드를 보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윽, 큰일이다.'

로드가 재빨리 주위에 쓰러져 있는 마피아의 품을 뒤져 단검을 찾아냈다. 그때 강단 위로 올라온 붉은 망치 단원들이 로드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에게 맡기쇼!"

"폐하를 지켜라!"

그들은 무려 완벽 무장 상태였다. 번쩍거리는 빨간 갑옷과 망토를 걸쳤으며 커다란 망치를 손에 들고 있었다.

"고, 고마워!"

"별 말씀을! 쳐라!"

저번 전쟁의 활약으로 호전적인 성향의 붉은 망치단에게 눈도장을 찍어놓아 다행이었다. 그들은 달려드는 마피아들을 가뿐하게 망치로 두들겨 팼다. 과연 소수 정예의 클랜답게 전투력은 뛰어났다.

어느 정도 안전이 확보되자 로드는 전황을 살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클랜 연합의 병사들이 강단으로 올라와 마피아들을 둘러싸는 형국이었고, 머릿수도 이쪽이 더 많았다.

'좋아. 이렇게 되면 마틴의 선택은…….'

콰앙!

마틴에게 일격을 허용한 베아트리체가 비틀거리며 물러나 한쪽 무릎을 꿇었다.

'베아!'

로드가 화들짝 놀랐다. 그동안 지하에 쭉 갇혀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컨디션이 별로 좋지 못한 듯 했다.

마틴은 그녀를 쫓아가는 대신, 마피아들의 무리에 섞여 성큼성큼 걸어갔다.

'광장을 빠져 나와 거리로 향할 속셈이군.'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거리를 통과해 언더하임을 빠져나와 드러그팜으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로드는 생각했다.

마피아를 제외한 23개 클랜 전체가 마틴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 말은 국민 대다수가 가입해 있는 광부 연합 또한 마틴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 사실상 이 도시에 있는 전부를 적으로 돌리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더하임은 이제 적지이다. 적지에서 후퇴하는 것은 마틴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로드의 입장에서는 마틴이 이곳을 빠져 나가버린다면 곤란했다. 마틴이 카사르를 등에 업고 드러그팜에 주둔하게 되면 여러모로 상황이 까다로워진다. 마틴은 포기하지 않고 호시탐탐 언더하임을 노릴 것이며, 카사르와 글레이시온의 전쟁이 일단락되는 순간 로드는 마틴과 카사르를 동시에 상대해야만 하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마틴을 여기서 잡아야 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아.'

로드가 확성 구슬을 작동시키고는 소리쳤다.

"반역자 마틴이 빠져나가려 하고 있다! 그가 언더하임을 빠져나가면 끝장이다! 쫓아라!"

로드의 외침에 그제서야 병사들이 마틴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마피아들 또한 그에 대응하여 로드나 클랜 간부들의 제거는 포기하고 마틴의 탈출을 최우선으로 움직였다.

병사들과 마피아들 모두 앞쪽으로 쏠리자, 로드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베아트리체에게로 달려갔다.

"베아야!"

로드가 다가와 그녀의 상체를 일으켰다. 다행히 몸을 움직이는 데는 이상 없어 보였지만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넌 이번 싸움에서 빠져. 일단 체력을 좀 회복하자."

"…아, 안돼요."

그녀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뭐가 안 된다는 건데!"

"여기서 마틴이 빠져나가면… 주인님이 힘들어지잖아요."

'……!"

세상에! 로드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정녕 그녀는 천사임에 틀림이 없었다.

'다 컸구나, 베아야! 이 아빠는 죽어도 여한이 없단다!'

로드가 감격에 빠져있건 말건 베아트리체는 몸을 일으켰다.

"……저는, 가겠어요."

로드는 입맛이 썼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고, 사실은 무리해서라도 그녀가 가줘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항상 인재가 없어서 그녀를 혹사시켜야만 하는 현실에 가슴이 아팠다.

그때 몇 발짝 걸음을 때던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로드가 다급히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로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마틴을 잡고 싶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역시 안 되겠어! 넌 빠져야……."

"이 상황에 제일 중요한 둘이 자빠져서 뭐 하는 거야?"

언제 왔는지 유니벨이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니. 우리 베아가 너무 무리하는 거 같아서……."

"무리하는 것 같다고?"

유니벨은 베아트리체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졌다. 그리곤 한 입 크기의 작은 빵을 꺼내 그녀의 입에 물렸다.

터업.

입에 뭔가가 물리자 베아트리체는 일단 본능에 따라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빵은 순식간에 소멸되었다.

"더."

"응?"

"더 줘."

"아, 응."

유니벨은 몇 개를 더 꺼내 그녀에게 먹여주었다. 이내 모든 빵을 해치운 그녀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냥 배고픈 거였냐!'

*

마틴은 마피아들을 이끌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은 순식간에 떡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마틴이 광장을 빠져 나오자 소집된 마피아의 모든 병력들이 그와 합류했다. 그 수는 약 500명. 마틴을 위시한 하나의 군대가 움직이자 거리 곳곳에서 나타나는 클랜원들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는가?"

그들이 향하는 길목을 또 다른 한 무리의 군세가 가로 막았다.

"……의외로군."

마틴이 정면을 응시하며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언더하임 경비대와, 경비대장인 한스였다. 백발의 노장임에도 장비를 갖춰 입고 병력들의 앞에 서있으니 특유의 중후한 카리스마가 흘렀다.

"어째서 중립 세력인 그대가 본인의 앞을 막는가?"

"……."

한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나는 이번 사태를 지켜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네."

그의 입가에 세월이 묻어나는 미소가 걸렸다.

"내가 만약 클랜장이었다면 자네에게 한 표를 던졌겠지. 이 도시를 지킬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있으니……. 하지만 결과는 자네의 완패였지. 그때 느꼈다네. 더 이상 이 나라는 우리 같은 늙은 것들이 필요 없어. 새로운 시대를 열 젊은이들에게 이 나라를 넘겨주어야 한다는 말일세."

마틴이 쯧하고 혀를 찼다.

"그런 소리를 하는걸 보니 그대도 많이 늙었군. 허나, 어째서 그대가 본인의 앞을 막는지는 이해 되지 않는다. 경비대는 언더하임의 보호가 최우선 임무가 였을 터. 우리는 이곳에서 빠져나갈 생각이다. 도시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오히려 우리를 도와야 하는 게 맞지 않는가?"

"틀린 말은 아니군."

스릉! 한스의 검이 예리한 빛을 내뿜으며 뽑혔다.

"하지만 자네는 장차 언더하임에 피바람을 불어 일으킬 자. 자네를 여기서 보내면 이 도시에 더 큰 화가 닥칠 터."

그의 검이 마틴을 향해 겨누어졌다.

"언더하임을 위해, 여기서 죽어줘야겠네."

"푸흐흐! 결론은 명료해서 좋군."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던 두 남자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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