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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늦은 밤.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 사이로, 한 무리의 기마대가 숲을 가로질러 전진하고 있었다.
이 군대에 '보병'은 없었다. 하나같이 말을 타고 있는 기마병들이었다. 말 안장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있는 기수들의 모습은 마치 바닥에 드러누운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아예 눈을 감고 졸고 있는 자들도 있었는데, 본능적으로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갈색 바탕의 말머리의 문양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이들이 바로 기마의나라 '에브게니아'의 군대였다.
일반 보병으로 며칠은 걸릴 거리를 그들은 단 하루 만에 주파했다. 그들은 완벽하게 적의 허를 찔렀음을 자신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달려왔기에, 그들은 숲의 좁은 오솔길에서 속도를 늦추며 천천히 진군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 숲을 벗어나면 그들은 다시 전속력으로 달려서 적진을 타격할 계획이었다.
"적적한 밤이군."
기마대의 가장 선두에 선, 새까만 흑마를 탄 장군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광신도 놈들에게는 마지막 밤이 될 겁니다."
옆에 나란히 말을 타고 가고 있는 부관이 말을 받았다.
"당연히 그래야…. 워어! 워! 나 원, 녀석! 오늘따라 왜 이래?"
흑마가 흥분한 듯 좌우로 고갯짓을 하며 푸르륵 콧김을 내뿜었다. 남자가 자세를 낮춰 흑마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부관이 감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저 성질 나쁜 흑마를 길들여 보려다가 나가떨어진 사람들이 한 수레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아마 저 흑마를 다룰 수 있는 건 에브게니아에서도 한 사람 밖에 없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예민한 녀석을 잘도 다루시네요.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 걸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녀석."
남자가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겁먹었어."
"예? 그게 무슨……."
푸욱!
부관을 말을 채 잊지 못했다. 난데없이 그의 미간에 화살이 날아와 꽃힌 것이다. 그의 몸이 피를 뿌리며 말에서 떨어졌다. 그것을 신호로, 어둠에 잠긴 숲에서 화살들이 빗발쳐오기 시작했다.
"매, 매복이다!"
"제길! 놈들이 여길 어떻게?"
기수들이 속절없이 화살에 노출당하며 말에서 떨어졌다. 주인을 잃은 말들이 좁은 길목에서 흥분해 날뛰었다.
"여신이시여! 그대의 미천한 종이 이단을 정화할 사명을 받드옵니다. 부디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저벅, 저벅. 발에서 투구까지 빈틈없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남자가 심취한 듯 중얼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눈을 감고 경건하게 성호를 그린 그가 눈을 뜨며 외쳤다.
"프리스트들은 축복을 시전하라!"
우우우우웅!
눈부신 빛들이 사방에서 번쩍이며 병사들이 모습이 일제히 나타났다. 그들의 몸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오며 어두웠던 숲이 환하게 밝아졌다.
"블레스(Bless)!"
"프로텍트(protect)!"
"홀리 웨폰(Holly weapon)!"
새하얀 의복을 갖춰 입은 성직자들이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각종 축복 마법들이 병사들에게 쏟아졌다. 검날이 새하얀 빛으로 코팅되었고 연초록빛을 띤 신성력이 갑주를 휘감았으며 말 밑에는 푸른원이 나타났다. 다양한 색상의 버프마법들로 무장한 가이아의 부대는 도시의 야경처럼 서로 다른 빛으로 황홀하게 번쩍거렸다.
채앵!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남자가 검을 뽑아 들고 소리쳤다.
"가자! 이단을 제거하자!"
"여신께 영광을!"
"와아아아아아아!"
축복을 받은 병사들이 일제히 언덕으로 치고 내려왔다.
"제길!"
흑마를 탄 남자가 검으로 화살을 쳐내며 소리쳤다.
"싸우지 말고 달려라! 전속력을 다해 빠져나가라!"
*
다음날.
가이아의 수도 '마사비엘'.
"승전을 감축 드리옵니다! 성하(聖下)!"
"탁월한 선견지명이셨습니다! 성하!"
"이것은 대륙 구원의 길에 크나큰 한걸음! 여신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신성국가 가이아의 플레이어이자 교황인 '요한'은 가신들의 쏟아지는 극찬을 받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집무실로 들어온 그는 기분이 좋은 듯 싱글벙글 웃으며 지휘관 창을 켰다.
- '요한 라티나'님이 '로드 폴렌티아'님께 1:1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곧 대화를 승낙했다는 알림과 함께 새로운 스크린 창이 떠올랐다. 금발 머리에 눈 아래 다크서클이 짙은 남자가 화면에서 나타났다.
"승전 축하드립니다. 요한님."
로드가 말했다. 요한이 놀란 듯 감탄성을 내뱉었다.
"오우, Mr. 로드! 벌써 알고 있었군요. 역시 어비스! 덕분에 큰 Victory를 거뒀습니다!"
요한이 완벽한 혀 굴리는 발음을 내며 말했다.
"하하.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그냥 정보를 제공해드렸을 뿐이죠."
"겸손하시군요, Mr. 로드! 그대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정말 큰 Damage를 입을 뻔 했습니다! 아아, 무서운 에브게니아! 설마 그 거리를 하루 만에 주파할 줄은!"
요한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는 듯 몸을 떨었다.
"Anyway, 덕분에 살았습니다! 처음에 괜히 로드님의 정보를 의심한 것 같아 미안하군요! 사과의 의미로! 약속한 분량의 식량보다 더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Wow!"
"하하하! 이렇게 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뭐, 주신다니 사양 않고 받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요한님."
"왜 그러나요? Mr. 로드?"
"……한국인 프로 게이머 아니셨어요? 혹시 유학파?"
로드의 물음에 요한이 목소리를 깔고 대답했다.
"부산 토박인데요."
"…아."
그냥 설정이었나.
"아무튼! Next time에도 우리 가이아! 잘 부탁드리지요!"
"저희야 말로."
그렇게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종료했다. 지휘관 창을 끈 로드는 기지개를 쭉 피며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폐하."
서류 작업을 하던 이브가 로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 앉은 자리에서 쏠쏠한 이득을 봤으니까……. 음?"
갑자기 뜬 알림창에 로드의 눈이 커졌다.
- '스콧 줄리아'님이 '로드 폴렌티아'님께 1:1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아, 이런."
로드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스콧한테서 연락이 왔어."
"스콧이라면 그…… 에브게니아의 왕 아닌가요?"
"흐흐, 맞아. 내가 가이아에 정보를 넘긴 걸 눈치 챘나 보군."
로드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대화를 승낙했다. 곧이어 스콧의 얼굴이 허공의 스크린 화면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스콧 줄리아는 '스콧'이라는 이름과 달리 여성이었다. 깔끔하게 목까지 떨어지는 자주색 단발머리와 차분한 느낌의 갈색 눈이 인상적이었다. 냉철하고 딱딱할 것 같은 느낌이 이브의 첫인상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로드가 영업용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러고 보니 저희는 초면인 것 같네요. 그렇죠?"
"가이아 영지 두 곳의 수비 병력 현황과 본군의 위치 정보가 필요합니다."
스콧이 딱 잘라서 말했다.
"……으음."
로드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하하, 그게……."
"어비스가 개입했다는 사실은 오늘 패전 소식을 듣고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멍청한 가이아에서 우리의 급습 타이밍을 알아 챌 수 없었을 테니까요."
스콧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저도 당신의 힘을 쓰고 싶습니다."
'용건만 간단히 딱 어필하는 타입이군.'
로드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가이아 영지 두 곳의 수비 병력 현황과 본군의 위치 정보라면…… 패전 이후 바로 병력을 보내 공격할 셈이군요?"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승리 분위기에 취해있는 그들은 우리가 참패를 당하자마자 바로 다시 병력을 파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겠죠."
'흠, 확실히…….'
요한은 에브게니아의 공격 사실을 듣고 수도의 주력군을 보냈다. 거기서 그냥 이긴 게 아니라, 적들을 완전히 박살내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니 미련 없이 병력을 복귀시켰으리라.
그런데 스콧이 좀 무리해서 다시 하루 만에 그만한 규모의 병력을 또 보낸다면? 가이아의 저머 영지 중 하나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매복으로 받은 피해를 어느 정도 복구하는 게 가능하다.
'잘하네, 에브게니아.'
영리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드가 기억하기로 그녀는 설유라처럼 게이머 출신이 아닌 걸로 알고 있었다. 뭔가 특출한 재능이 있을 터였다.
"가이아에서는 얼마를 지불했습니까?"
그녀는 거두절미하고 바로 돈 문제로 넘어갔다. 로드는 태연한 표정을 꾸며내며 입을 열었다.
"식량 자원으로……."
그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정도."
로드는 원래 분량에서 손가락을 하나 더 내밀었다. 웬만한 군대라도 몇 달 넘게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이었다.
꽤나 많은 양이라 당황했는지 스콧의 미간이 좁아졌다.
"…골드로는 안 됩니까?"
"사실 제가 돈은 좀 많아서요."
로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건 사실이었다. 스콧은 잠시 고민하는 듯 이마를 짚더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저희 에브게니아는 20% 더 붙여드리도록 하죠."
로드는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도록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스콧이 덧붙였다.
"대신 가이아에게는 이 정보의 유출을 금하는 조건입니다."
"물론이죠. 저는 고객님의 개인 정보는 팔지 않는답니다. 스콧님."
로드가 다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에브게니아와의 거래가 성사되고, 로드는 대화 창을 닫았다.
'와하하! 이게 왠 떡이야?'
로드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6개국을 상대로 한 외교는 기본적으로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로드에겐 아직 시간이 필요했고, 어비스 또한 후반으로 갈수록 강력해지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가 계속 유지되는 편이 유리했다.
그러나 어비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이 치고 박고 싸우면 싸워줄수록, 어비스는 부유해지고 대륙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높아진다. 방금 같이 동부에 있는 두 국가, 가이아와 에브게니아의 전쟁이 로드에게 이윤을 안겨준 것처럼 말이다.
가이아에서 먼저 로드에게 말을 걸어 에브게니아에 대한 정보를 요청해왔다. 로드는 에브게니아 쪽에 스파이를 파견해 두었다가 출진 정보를 가이아에게 알려주었고, 그것으로 가이아는 상당한 재미를 보게 되었다.
회심의 기습이 막혀버린 에브게니아도 가만있지 않고 로드에게 정보를 사갔다. 가이아든 에브게니아든 그들에게 있어 어비스의 정보력은 돈을 내고 지불하는 일종의 공공재였다. 어비스의 정보를 쓰지 않는 쪽이 불리한 것은 당연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경쟁하듯 로드에게 정보를 요구할 것이고, 로드는 앉은자리에서 계속해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특히, 한참 치열한 전쟁 중인 이 두 국가는 로드의 정보에 점점 더 의존성이 커질 것이다. 만약에 로드가 원한다면, 두 국가 중 한 곳에게만 거짓 정보를 흘려 완전히 판을 뒤집어 버릴 수도 있다.
'아까 스콧은 다시 가이아를 치겠다고 밝혔지.'
이 사실을 로드가 바로 가이아에게 밝히면, 가이아는 다시 매복을 할 것이며 운이 좋으면 에브게니아의 그 병력들마저 몰살 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에브게니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멸국의 위기까지 올 수도 있다.
앉은 자리에서 한 나라를 지도에서 지운다. 로드는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이런 게 바로 어비스의 방식이랄까.'
하지만 로드는 그 방법을 실제로 계획에 옮길 생각은 없었다. 요한도 처음에는 로드를 의심해서 자원을 반씩 보내겠다고 했다. 아직 어비스의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소리였다. 지금은 대륙의 모든 국가들에게 신뢰를 쌓아두는 게 우선이었다.
이렇게 어비스는 농업이 힘든 척박한 땅에 위치해 있었지만, 타국에 정보를 팔고 식량을 사들여 버틸 수 있었다.
'정보가 곧 힘인 법이지.'
로드는 다시 지휘관 창을 켜 대륙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둘 다 아직 무사하네.'
과학의나라 알란드와 음악의나라 베틀린은 초반 최약소국에 속해있기 때문에 틈틈이 로드에게 주위 나라의 상황을 물어보곤 했다.
'게노세르크에 낌새는 없나요?'
'카사르는 아직도 글레이시온과 싸우는 중인가요?'
로드는 이 두 나라에게는 저렴한 가격으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다. 가장 약한 이 둘이 무너져 버린다면 강대국들의 다음 타겟은 어비스가 될 수도 있었다. 로드의 입장에서는 이 두 국가가 오래 버텨주어서 시선을 분산시켜주는 편이 좋았다.
아직은 미약한 영향력이긴 하지만, 로드는 이런 식으로 조금씩 대륙의 상황을 조율해가고 있었다.
"……주인님."
그때 베아트리체가 집무실 벽을 뚫고 등장했다.
"아, 깜짝이야!"
"학교가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대요."
"아, 그래. 보러 갈게."
로드가 기지개를 쭉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