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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나라 백제.
백제는 동방 대륙의 후예들이 건국했다고 알려진 나라이다. 국민들 모두 흔치 않은 검은 머리의 황인종이며 체구도 조금 작은 편이다. 그들의 조상들이 어떤 이유로,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 대륙으로 넘어 왔는지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다.
백제의 국민들은 자신의 뿌리가 동방의 대륙에 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동방 특유의 기술들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왔다. 특히 기원 시대부터 바로 훈련할 수 있는 특화 병종인 '싸울아비'들은 무거운 철갑옷을 포기하고 가벼운 복장에 검을 다루며, '내공'이라는 특별한 기술을 사용한다.
기원 시대의 특화 병종들은 대체로 후반에는 잘 쓰이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 싸울아비들은 극 후반까지 백제의 최고 주력으로 사용된다. 카오스 월드에 흔치 않은 '성장형 특화 병종'인 것이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싸울아비 관련 연구들과 무공들도 늘어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원하는 방향으로 싸울아비들을 끊임없이 성장시킬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나라들과 전쟁을 거듭할수록 그들의 전투 스타일은 변화하고 진화하여 새로운 싸울아비들에게 계승된다.
물론 화차(火車)나 승병(僧兵)등 다른 특화 병종들도 강력하지만, 백제는 특히 싸울아비들의 성장이 나라의 명운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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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광은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숨을 크게 한 번 내쉰 다음 입을 열었다.
"비밀 동맹에 아로게쓰의 멸망이라, 갑작스럽기도 하고 또 아직은 제안이 너무 추상적이라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대체 어떻게 할 계획이신지 한번 들어봅시다."
"네. 사실은 지금 아로게쓰의 병력들이 저희 수도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병력은 2500명. 지휘관은 바얀입니다."
"……바얀이라면 분명 아로게쓰의 B급 무력형 영웅이 아닙니까? 자무카 님이 큰마음을 먹었군요."
그렇게 말하던 선광이 갑자기 김이 빠졌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아로게쓰가 로드님의 나라로 쳐들어오고 있으니, 제가 병력을 보내 아로게쓰의 영토를 치라는 말씀이시군요."
바얀의 말투에는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었다. 결국 동맹이나 아로게쓰의 멸망이란 화제는 미끼일 뿐, 자신을 도와달라는 어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땡? 틀렸습니다."
로드가 손가락을 그으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 수비 병력을 제외한 백제의 현 가용 병력은 2천명 정도, 아로게쓰의 수도 '풋힐랜치'의 병력만 해도 1천명 가까이 됩니다. 바얀의 주력군이 돌아오기 전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기엔 2천은 애매한 수죠."
"…그걸 어떻게……."
선광의 동공이 커졌다. 그의 입이 의문을 제기하려다가 다시 멈췄다. 당연한 것이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플레이 하고 있는 국가는 어비스다. 그는 방금 떠오른 우문을 입안으로 삼키고 새로운 의문을 제시했다.
"……저더러 아로게쓰의 영토를 치라고 할 셈이 아니라면, 뭐죠?"
로드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담담하고 또렷하게 이야기를 꺼내갔다.
"아로게쓰는 정확히 3일 후에 저희 수도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싸움이 일어나는 바로 당일, 아로게쓰의 병력을 퇴각시키도록 만들 겁니다. 변수가 생겨 시간이 조금 더 걸릴지도 모르지만, 아로게쓰가 물러나게 되는 상황을 만드는 건 자신 있습니다."
선광이 눈썹을 찌푸리며 이마를 툭툭 두들겼다.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일단 계속 말씀해 보시죠."
"감사합니다. 선광님께서 해주셨으면 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삼일 안에 병력들을 은밀히 보내셔서, 제가 말씀 드릴 매복 포인트에 배치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렸다가 되돌아오는 아로게쓰의 패전병들을 박살내는 겁니다."
"……흠."
선광이 생각하기에 로드의 말은 의문투성이였다. 동맹을 구한다고 해놓고는 대뜸 같이 아로게쓰를 무너뜨리자고 하질 않나. 병력을 파견해서 매복 포인트에 대기시켜 두라고 하질 않나. 그리고 가장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로게쓰의 병력을 전쟁 하루 만에 물리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아직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2500이라는 병력수에 에이스급 영웅인 바얀까지 파견했다면 아로게쓰 측도 간단한 마음가짐으로 침공을 해오는 게 아닐 터였다.
사실 저 로드라는 남자가 매복을 하라는 것도 핑계일 뿐, 그냥 병력을 보내 도와달라는 말을 빙 둘러서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저는 동맹의 '선물'로서 아로게쓰를 선광님께 드릴 생각입니다."
선광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로드가 먼저 치고 나왔다.
"도와달라거나 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병력을 숲에 매복시키고, 힘이 다 떨어진 패전병들을 처리해 주십시오. 단지 그 뿐입니다."
"……흐으음."
로드는 말을 끝내고 선광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기며 고민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신중한 성향의 플레이어인 듯 했다.
'그렇다면 미끼를 내걸어 선택을 도와주지.'
로드가 입을 열었다.
"선광님은 제가 어비스를 플레이하면서 정보를 드리는 첫 번째 고객이십니다. 행여나 제 정보로 선광님의 병력이 피해를 보는 일이 있다면……."
로드는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채팅창에 전부 불어버리셔도 상관없습니다. 어비스의 정보를 믿고 움직였더니 괜히 일방적인 손해만 봤다. 라고요."
선광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 놈 봐라?'
정보를 팔아 먹고 사는 나라인 만큼 어비스에게 '신뢰'는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다. 로드는 그것을 내건 것이다.
여전히 의구심은 풀리지 않았지만, 선광은 묘한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비스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라는 말이 있다. 이번 어비스는 아직 신뢰할만한 대상인지 아닌지 검증되지 않았지만, 혹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선광이 그렇게 손해 보는 건 없었다. 로드의 말대로 병력들을 매복시켜 뒀다가, 아로게쓰의 병력이 오지 않으면 그대로 뒤로 물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자 선광의 머릿속에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애초부터 어비스와 아로게쓰가 짜고 치는 함정일 가능성은? 하지만 둘의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선광도 채팅창에서의 올인 전략 폭로 사건으로 알고 있었다. 상황은 대충 맞아떨어진다. 무엇보다, 타국의 병력을 좀 줄인답시고 대륙에서의 신뢰를 다 날려버릴 정도로 저 로드라는 자가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다.
선광은 고심 끝에 말했다.
"로드님께서 말씀하신 그 동맹건은 이번 일과 별개인가요?"
'예쓰!'
거의 다 넘어왔다는 생각에 로드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이죠. 저도 선광님께 제 쓸모를 보여드려야 하니까요. 만약 제 정보로 이득을 보시면 동맹을 한번 생각해 주십사. 하는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선광이 잠시 화면에서 벗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가는 작은 말소리가 들리는 걸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신관과 논의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어라. 물어라.'
로드가 간절하게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마침내 선광이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말했다.
"로드님이 말한 매복 포인트의 위치와, 아로게쓰에게 들키지 않고 그곳으로 갈 수 있는 루트를 알려주십시오. 우리 백제는 병력 2천5백과 '비월'을 파견하겠습니다."
로드의 눈이 반짝였다. 비월이라면 베아트리체나 바얀과 같은 B급 무력형 영웅, 백제 최고의 무장이었다.
"무난한 인물로 보내셔도 되는데, 화끈하시네요."
"저도 아로게쓰를 잡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니까요."
"남부 더비인가요?"
선광은 대답 없이 씨익 웃어 보이기만 했다.
카오스 월드는 성향이나 지리적 위치 등의 문제로 묘하게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는 국가들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최상의 위치 조건을 갖추고 있는, 해양국가 다이달로스와 섬나라의 아르곤.
서로가 적대할 수 밖에 없는 성향을 가진, 신성국가 가이아와 암흑국가 하데스.
그리고 남부 지방의 큰 축이자, 두 쪽 다 강력한 초반 특화 병종을 보유하고 있는 아로게쓰와 백제가 그랬다. 이 두 나라는 세 차례의 테스트에서 모두 치열하게 맞붙었으며, 게이머들 사이에선 '남부 더비'라고 불리기도 했다.
에덴 주신전으로 넘어와서 나라의 위치들이 크게 조절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백제와 아로게쓰는 여전히 영토가 붙어있었다. 선광은 아로게쓰를 신경 쓰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로드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선광은 약속대로 백제의 최정예 병력을 숲 속의 매복 포인트에 병력을 배치시켰다.
그리고 모든 것은 로드의 말처럼 진행되었다. 언더하임에서 물러난 바얀군이 숲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병력은 1700으로 줄어들어 있었으며 진군, 전쟁, 퇴군까지 거의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강행군을 펼치는 중이라 전원이 지쳐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 병력의 사기가 크게 내려가 있는 상황이었다. 언더하임의 후방에서 싸웠던 부족원들에게 그 전투는 악몽과도 같았다.
그렇게 지쳐있는 그들이 숲으로 들어왔고, 매복한 채 기다리고 있던 2천의 쌩쌩한 백제군이 일시에 그들을 덮쳤다.
같은 매복이었으나 상황은 가이아와 에브게니아 때의 싸움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전투가 일어난 즉시 전황은 완전히 기울어졌다. 대륙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아로게쓰의 전사들이 너무나 간단히 픽픽 쓰러졌던 것이다.
그런데 로드도, 선광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다.
바로 바얀의 마음가짐이었다.
아로게쓰 측의 총사령관인 바얀은 로드의 고유능력의 효과가 끝나고, 자신의 결정에 대해 크게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 로드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나라 일에 무척이나 개인적인, 자신의 여동생 문제를 끼어놓고 생각했다는 점이 죄책감으로 변하여 그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다. 수천 명의 목숨을 이끄는 지휘자로서 이번 결정에 사심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바얀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조의 영혼을 건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했고, 바얀은 퇴군 동안에도 다른 족장들의 뜻을 꺾기 위해 세 차례나 전사의 결투를 벌여야만 했다.
그렇게 바얀은 마음에 크나큰 짐이 있는 상태에서 백제군의 매복을 받게 된 것이다. 만약 바얀이 빠르게 후퇴하는 하는 작전으로 갔다면 최소한의 병력은 살아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얀은 후퇴 대신 결사 항전을 택했다. 이미 모양 빠지게 도망쳐온 군대다. 이 싸움에서 또 도망친다면 전사의 명예가 훼손됨은 물론이고, 바얀은 평생 자신이 내렸던 이 결정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하다가 죽어갈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매복군을 만난 순간 살아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것은 다른 전사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압도적으로 불리한 지형과 상황 속에서 계속 싸웠다.
그 격렬한 전투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 백제군 2500중 800명 사망.
- 아로게쓰군 1700중 1600명 사망, 100명 도주. 지휘관 '바얀' 전사.
이 전투에서 아로게쓰의 플레이어 자무카는 바얀이라는 최강의 카드를 잃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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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님의 정보 덕분에, 우리 백제는 아로게쓰에게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습니다."
선광의 말에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적장인 바얀까지 잡으셨다고……."
솔직히, 로드는 조금 얼떨떨했다. 참새를 잡으려고 함정을 설치했다가 꿩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와 버린 심정이었다.
선광은 신이 난 얼굴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죽기 직전까지 피 칠갑을 하고 귀신처럼 무기를 휘둘렀답니다.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우리 쪽 정예병 수백을 무덤 길동무로 삼았다고 하니…… 놈을 포획하지 못한 건 아쉽긴 하지만, 그것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죠. 하하하!"
"제가 좀 부족해서 병력 차가 그리 많이 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대승을 거두시다니… 역시 대단하네요."
"제 생각엔 대단한 건 로드님이십니다."
선광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처음 로드와 대면했을 때와는 대우가 완전히 딴판이었다.
"어느 나라라도 로드님의 계획대로 했다면, 제 병사들이 했던 것과 비슷한 성과를 뽑아냈겠죠."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제가 어비스와 동맹을 결심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선광이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저는 본격적으로 아로게쓰 침공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아로게쓰를 무너뜨리고, 어비스와 영토를 나란히 하면 우리의 관계도 더욱 굳건해 질 수 있겠죠. 제가 병력을 움직일 테니 로드님은 정보의 힘으로 저희를 계속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우리가 동맹이라 해도 저희 쪽만 이득을 볼 수는 없으니…… 조건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잘 통하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외교관을 보내 교류하는 정식 외교가 아니다. 말이 좋아서 비밀 동맹이지 사실은 그냥 평범한 구두 동맹이나 다름없었다. 이 불안전한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양국 모두 윈-윈을 거두어야 했다.
'선광은 자기가 병력을 움직일 테니 나는 정보로만 지원해 달라고 했다. 즉, 아로게쓰의 멸망 보너스는 자기가 가져가겠다는 거겠지.'
멸망 보너스는 해당 국가의 플레이어를 죽인 나라에 돌아가게 되는 것으로, 그 나라의 특화 연구가 적용되거나, 특화 병종을 훈련할 수 있는 등 다양한 혜택이 있었다. 만약 로드가 자무카를 죽여 멸망 보너스를 획득하게 된다면, 어비스에서 '엑스 워리어'를 훈련할 수 있게 되는 식이다.
'시대 발전'이 기존 지휘관 창의 업그레이드라면 '멸망 보너스'는 새로운 기능의 추가라고 볼 수 있었다.
"제 요구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로드가 손가락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