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51화 (51/296)

<-- 전사들의 나라 -->

로드가 손가락을 펼쳐 들었다.

"첫째, 아로게쓰가 멸망할 경우 어비스와 백제는 비밀 동맹을 맺으며, 상호국 중 어느 쪽이라도 정식 동맹으로 전환하자고 제의할 시 그 제의를 받아들일 것."

"당연한 이야기네요."

선광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선광님도 아시다시피 아로게쓰의 거점 영토는 세 곳이 있습니다. 산악 수도인 '풋힐랜치', 대표적인 농업지인 '플랫랜치', 마지막으로 대장장이들의 성지인 '스미스타운'. 정보 제공의 대가로 이 세 곳의 영토 중에 한 곳은 반드시 어비스에게 넘겨줄 것."

선광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다 말했다.

"드릴 영토는 저희 쪽에서 고를 수 있나요?"

"물론이죠. 저흰 어느 땅이든 상관없습니다."

"좋습니다."

선광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지막 셋째, 어비스는 병력을 500명까지 동원할 수 있으며 아로게쓰의 영토를 돌아다니며 여러 이득을 취할 것이다. 그에 대해 동의해줄 것."

"……예? 그게 무슨?"

선광이 처음으로 강한 의문을 표시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마지막 조건은 상당히 찜찜했다. 알아서 전부 싸워주겠다는데 굳이 병력 500명을 동원하겠다고? 이건 또 무슨 꿍꿍이속이란 말인가?

"사실은 제가 아로게쓰의 영토에 눈독들이고 있는 인재가 있어서요."

로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친구를 데려오기 위한 수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음, 인재를 빼갈 생각인가? 하긴 그 정도의 이득이 없으면 수지 타산이 안 맞겠지.'

가장 눈독들이던 바얀이 죽은 이상 영웅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선광의 목표는 아로게쓰의 멸망 보너스였다. 하지만…….

선광의 시선이 로드의 오묘한 색의 눈동자로 향했다.

찜찜했다. 대체 뭐란 말인가? 이 찜찜한 느낌은. 지금 해소하지 않으면 앞으로 아로게쓰와 싸우면서도 두고두고 신경이 쓰일 것만 같았다.

"그럼 저희도 조건을 딱 하나만 걸겠습니다."

"네, 뭐죠?"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던 선광의 표정이 싹 바뀌더니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로게쓰의 왕, 자무카를 죽이는 건 우리 백제입니다."

"……."

이것은 상당히 노골적인 제안이었다. ‘멸망 보너스’는 플레이어를 죽인 국가가 획득한다. 즉, 멸망 보너스는 우리가 가져갈 테니 너희는 눈독조차 들이지 말라. 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재밌군.'

로드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

오히려 선광 쪽에서 놀랐다. 이 노골적인 제안은 로드의 의중을 한 번 떠보는데 목적이 있었다. 만약 로드가 바로 예외 조항을 내놓는 다거나, 거절을 한다면 로드도 멸망 보너스에 관심이 있다. 라고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조금 무례한 제의였던 것은 사실이었고, 로드가 불쾌감을 표시했다면 선광은 사죄하고 이 조건을 취소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로드는 크게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동의했다. 굳이 받아들여 주겠다는데 물릴 필요는 없었다. 선광을 고개까지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뭘요. 직접 싸워 주시겠다는 건 백제인데 저희가 뭘 더 바라겠습니까? 제 목표는 따로 있으니까요. 아무튼, 이걸로 협상은 마무리 된 거죠?"

"그러네요, 만족스러운 대화였습니다."

선광이 다시 미소 짓는 얼굴로 말했다. 로드도 덩달아 웃는 얼굴을 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 말로."

두 사람이 스크린 너머의 서로를 바라보며 각자 다른 의미의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어비스와 백제는 동맹을 맺게 되었다.

*

아로게쓰의 수도, 풋힐랜치.

"후우우우우……."

밤새들의 울음소리가 적적하게 울려 퍼지는 늦은 밤, 자무카는 눈을 떴다.

그의 주위는 바닥에 쓰러진 나체의 여자들로 가득했다. 모두들 잠이 든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눈을 뜬 것은 오로지 자무카 한 사람밖에 없었다.

힘을 한번 쭉 빼고 눈을 붙이려 했건만, 짜증이 치밀어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그 일들이 생각이 났다.

어비스로 보낸 2500명의 병력. 회심의 공격이었다고 생각했다. 아크 또한 분명 적의 정규 병력은 500명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데, 바얀은 어비스에서 아무런 소득 없이 병력만 잃어버린 채 후퇴했다고 한다. 패배도 아니고 후퇴다. 그 보고를 듣고서부터 자무카는 열이 뻗쳤다.

그러나 이어서 더 기가 막힌 일이 터져버렸다. 퇴각로에 백제의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뜬금없이 백제는 또 뭐란 말인가? 대체 어떻게 들키지 않고 이쪽 영토에 병력을 숨겼으며, 또 어떻게 병력들이 그 시간에 그 위치로 퇴각할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가.'

자무카는 의미 없는 물음임을 알면서도 생각에 잠겼다. 어비스를 치기 위해 무리하게 병력을 보냈을 때부터? 아니면 그보다 더 이전에, 올인 전략을 준비하고 있는 도중 어비스가 눈치를 채고 채팅창에 폭로했을 때부터? 그래, 그때부터 꼬인 것 같았다.

자무카는 조금 더 깊게 들어가보았다. 사실은, 이 주신전을 시작할 때부터 이 기분 나쁜 삐걱거림의 징조들이 있었다.

자무카는 세계 최대의 RPG장르 가상현실 게임, '메모리즈'의 랭킹 1위 유저였다. 압도적인 무위로 지난 6년 동안 단 한 번도 최강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는 살아있는 전설. 그는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들의 유희에 휘말려, 주신전이라는 것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를 불러들인 자는 전쟁의 신 아레스. 자무카의 무위를 보고 그를 대리 플레이어로 선택한 것이었다.

자무카가 생각하기에, 아레스는 멍청하긴 해도 제법 사람 볼 줄은 아는 신이었다. 그저 가상 현실에서만 뛰어난 실력이고, 현실에서는 말라깽이인 폐인들과 자신은 격을 달리했다. 그는 오프라인에서도 혹독한 트레이닝과 단련을 멈추지 않았고, 실제 격투계에도 몸을 담근 적이 있었다. 전투 능력과 게이머의 감을 동시에 갖춘 자신이야 말로 카오스월드에 가장 적합한 인재라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특히 전쟁의 신마저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그의 자신감은 최고조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좋아 보였다. 픽도 괜찮았다. '야만국가 아로게쓰'. 딱 그에게 어울리는 나라였다. 아로게쓰의 플레이어들은 항상 탁월한 싸움꾼들이었다. 무를 숭상하고 힘이 전부인 나라. 플레이어가 아로게쓰에서 가장 강한 전사라면, 초반 내정의 난이도가 확 낮아지는 건 당연했다. 그들은 자신보다 강한 자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신전이 시작되고, 본인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한 순간, 자무카는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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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자무카

소속 : 아로게쓰

직위 : 대추장

종족 : 인간

무력등급 : (B)*

통솔등급 : (D)

지략등급 : (E)

정치등급 : (F)

B급 무력형 클래스 입니다.

고유능력 : 신궁

자무카는 모든 무기에 능통하지만 특히 '신궁'이라 칭송받을 정도로, 활에 천재성을 보였습니다. 압도적인 근력과 놀라운 시력, 뛰어난 감을 가진 그는 산꼭대기에서 거대 장궁을 쏴 다른 산꼭대기의 깃발을 맞춘 일화로 유명합니다. 이 사건은 아로게쓰 내에서 전설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활을 사용할 시 숙련도가 늘어납니다. 또한 화살에 마력을 부여할 시 추가 효과가 발생하며 활에 대한 명중률 보너스가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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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처음 스테이터스를 확인한 바로 이 상황부터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자무카는 도무지 이 결과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당연히 B+급 무력 등급 판정을 받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냥 흔한 'B급'이라니! 신들에게 항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신들은 그들을 에덴에 내려 보낸 이후 아무런 접촉도 하지 않고 관망하고만 있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 몸의 원래 주인, 자무카였던 자의 고유 능력은 활에 관한 것이었다. '아발론의 신창'이라 불리며 창 하나로 수많은 거대 길드들을 자신의 깃발 아래에 복종시킨 그가 다름아닌 활이라니! 그의 길드원들이 이 소식을 들었다면 분명 요란한 비웃음들을 터뜨렸으리라.

자무카는 시험 삼아 활을 두어 번 써보고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고유 능력의 보정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활이란 무기는 영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B급의 무력등급과 본래 갈고 닦은 창술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는지, 자무카의 몸으로 창을 사용해도 그럭저럭 쓸만한 위력을 냈다. 하지만 고유 능력 하나를 버리는 꼴이 되었으니 타격은 컸다.

그가 처음 에덴에 왔을 때, 아로게쓰의 상황은 대추장인 자무카와, 그의 맞수이자 가장 강력한 토착 세력인 바얀이 서로를 견제하는 형국이었다. 만약 자무카가 B+ 등급이었다면 당장이라도 바얀을 찾아가 전사의 결투로 그를 굴복시키고 가신으로 삼았겠지만, 두 사람은 같은 B급이었다. 심지어 바얀은 자연 재생이라는 고유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자무카는 덜컥 겁이 났다. 만약 여기서 바얀에게 져버린다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을 것이다. 대추장 자리를 비롯한 모든 권력이 바얀에게로 넘어갈 것이며 자기 나라의 영웅 하나 컨트롤 하지 못한다며 타국 플레이어들의 비웃음을 살 게 뻔했다.

결국 자무카는 다른 계책을 떠올려냈다. 아로게쓰의 1차 테스터가 썼었던 방법. 바로 바얀이 아끼는 여동생인 아리야를 납치하는 것이었다.

자무카는 아리야를 인질로 삼아 바얀에게 명령했다.

'나와 정정당당한 전사의 결투를 했고, 그 싸움에서 자네가 졌다고 모두의 앞에서 공표하라.'

바얀은 그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자무카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것으로 아로게쓰는 다시 대통합을 이루었다. 그리고 자무카는 바얀의 신뢰를 얻기 위해 아리야와 혼인을 하기로 했다.

바얀은 정말 여동생밖에 모르는 자였다. 여동생이 왕비가 된다는 소식에 자무카에 대한 묵은 감정을 풀고 그에게 적극 협조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자무카는 이상하게 일이 꼬여버린 상황에서도 능수능란하게 아로게쓰를 운영해왔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자신에게 망신을 준 어비스에게 복수한답시고 병력을 보낸 게 실수였다. 그 이후 다시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모든 게 엉망이 됐다.

주력군 2500명이 말 그대로 증발했으며, 가장 강력한 카드였던 바얀마저 죽었다. 나라는 한 순간에 미망인이 된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가득 울려 퍼지게 되었다.

"……하."

자무카가 눈을 감았다. 과거를 떠올리니 또 짜증이 밀려왔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감에 가득 찬 채로 주신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꾸만 일이 꼬여갔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를 방해하듯,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런 점이 더 화가 났다. 자신은 분명 끝까지 살아남을 실력이 있었고 그럴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손으로는 통제하지도 못하는 변수들만이 일어났다.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리고 있다. 대체 누구에게 화내야 한단 말인가? 누굴 원망해야 한단 말인가?

하필이면 왜 무력 등급이 B급인가.

하필이면 왜 근처에 어비스가 있어서 자신의 초반 올인 전략을 폭로해 버린 것인가.

하필이면 왜 백제가 퇴로에 숨어있었던 것인가.

하필이면 왜.

하필이면, 하필이면, 하필이면??.

이러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두들기기 시작하며 자무카는 점점 비관의 늪에 깊숙이 빠져들어 갔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밖에 누구 있는가?"

상념에 빠져 있으려니 기분만 뒤숭숭해지고 머리만 아파왔다. 자무카가 상체를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아, 예. 대추장!"

문이 벌컥 열리며 40대의 중년 남자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자무카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이 자의 이름은 루그릭. 아로게쓰의 신관으로 B급 통솔형 영웅이다. 자무카는 왠지 이 남자를 보면 자신의 상황이 거울처럼 비춰지는 것만 같아 괜히 짜증이 났다.

"아리야를 내 방으로 데려와라."

자무카의 지시에 루그릭이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아리야님은 지금 깊은 슬픔에 빠져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계십니다. 조금 진정이 되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루그릭."

자무카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녀를 데려와라. 오지 않겠다고 하면 두들겨 패서라도 내 앞으로 끌고 와!"

"아, 알겠습니다."

루그릭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물러났다.

자무카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와의 정사를 생각하고 있으려니 잠시 좋지 않은 소식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동안은 바얀의 눈치가 보여 부인 대접을 해줬지만, 오늘밤부터는 다를 것이다.

패전에 대한 책임은, 그 여동생이 몸으로 받아내야만 할 것이다.

========== 작품 후기 ==========

자무카 : 나는 운이 없어.

로드 : (거품을 물며) 이 X발 X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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