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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전 문명게임-53화 (53/296)

<-- 전사들의 나라 -->

로드가 폐기를 재고해 보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자 성문은 바로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듯 연이어 정보들을 어필했다.

"이브님, 어제 의류점에 정복 사러 다녀 오셨죠?"

그녀가 다시 흠칫했다. 아까보다 더 큰 놀람이었다.

"……그걸 문 씨가 어떻게?"

"그것도 정복 하의만 한 벌 주문하셨죠. 이 상황을 한번 추리해 보자면 출근할 때마다 바지가 엉덩이에 끼는 바람에 그랬을 겁니다. 그러니 야근할 때 적당히 드셨어야죠."

이브의 눈썹이 꿈틀했다.

얼핏 보면 본래의 냉정한 표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로드는 잘 알고 있었다. 화났다. 무척 화났다.

"폐하."

이브가 사나운 시선은 성문에 고정시킨 채 덤덤히 말했다.

"응, 왜?"

"그만 웃으시죠."

로드가 다급히 표정 관리를 했다. 어찌됐건 저 야근을 하게 만든 장본인은 로드 본인이었으니 나름 참으려고 했는데 티가 난 모양이었다. 그래도 웃긴 건 웃긴 거였다. 이럴때 아니면 언제 이브를 놀려보겠는가!

"아, 그리고 폐하."

성문이 말했다.

"어제 저녁에 업무 땡땡이치고, 정보부 요원들이랑 주점에 놀러 가셨죠?"

이브가 온 몸에서 불길을 내뿜으며 로드를 돌아보았다. 그가 공포로 몸을 떨었다.

"어머, 폐하. 왕들끼리 지휘관 창에서 논할게 있으니 먼저 간다고 말씀하셨었잖아요?"

"오, 오해야!"

로드가 땀을 뚝뚝 흘리며 말을 이었다.

"외교는 침실에 들어가서 했어! 그리고 땡땡이가 아니라 부하들의 사기 진작 차원에서……."

"이 이야기는 나중에 집무실에 들어가셔서 계속 하도록 하죠."

그녀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로드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는 홧김에 성문을 째려보았다.

"젠장, 프라이버시를 침해 받는 느낌이라 기분 나빠! 역시 저 문은 폐기해야 해!"

"저도 동감이네요."

"아, 안돼요! 처분 반대! 문권 탄압 반대! 왕실은 성문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

있지도 않은 문권과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성문의 항의를 들으며 로드는 새로이 의문이 하나 생겼다.

"그러고 보니 너, 도시 안의 그런 사소한 일정들까지 어떻게 알 수 있었던 거야?"

그저 성문에 있을 뿐이라면 이브가 의류점에 갔다는 것과 로드가 땡땡이 친 그런 사소한 도시 내부 일정들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성문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보여드리죠!"

한 순간, 성문에 나 있던 이목구비가 갑자기 깨끗하게 사라져버렸다.

"……사라졌어?"

"여기요! 여기!"

뒤를 돌아본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성문이 아닌, 상업 지구 한 건물의 정문에서 그 낙서 같은 이목구비가 나타난 것이다.

"어, 어떻게 한 거야?"

"후후! 이게 바로 에고 웨폰 시절 저의 힘입니다!"

본래 언더하임의 성문이기 전에 잘나가던 시절, 그는 7개의 검이 한 세트인 에고 웨폰이었다. 하나의 인격이지만 7개의 검에 자유자재로 옮겨 다니는 특별한 이기어검의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쩌다 보니 언더하임의 문이 되었고, 망자 연구회에서 사용한 주술이 이상 반응을 일으켜 그 능력이 변이해 버린 듯 했다. 전처럼 검에서 검으로 옮겨 다니지는 못하는 대신 본체와 같은 문으로 옮겨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이라면 어디든지 다 이동할 수 있는 거야?"

로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성문이 재빨리 설명을 시작했다.

"아뇨, 제가 몇 번 해봤는데 이 도시 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어요. 그리고 일반 가정집에서 쓰는 사이즈가 작은 문은 안 되고, 또 문의 재질이 제 본체인 성문과 너무 다른 형태는 이동할 수 없더라구요."

"그렇구나. 뭔가 또 조건이 있나 보군."

로드는 좀 더 실험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잘만 하면 괜찮은 활용 방안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로드가 그런 고민을 하던 도중, 이목구비는 다시 성문으로 되돌아가 여자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문의 규모가 커야 한다면, 화장실 문으로는 못 오는 것 같아 다행이군요."

이브가 말했다.

"그러게.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그럼 문 씨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로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일단은 내버려 둬보자. 재수없긴 하지만, 나중에 잡다한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니."

"오오! 살려주시는 거군요! 감사합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로드가 성문을 돌아보며 말했다.

"물론 조건이 있어. 네가 도시 내에서 보고 듣는 정보들은 다른 민간인들에게 함부로 떠벌리지 말 것. 그리고 왕실 정보부에 협력하고, 그들의 통제를 따라줄 것."

"좋습니다! 이래봬도 저, 입이 무거운 문이라구요!"

저 촐싹거리는 모습이 그다지 입이 무겁지는 않아 보였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이제 이름을 지어줘야겠는데, 언제까지 문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아, 그러네요. 뭐가 좋을까요?"

"오오! 제게 이름을 하사하시는 겁니까!"

성문이 흥분하며 눈동자를 움직였다.

"너 예전에 에고 웨펀일 때 이름은 뭐였어?"

"명왕성을 가르는 거문성의 백색 칠검이요."

"그럼 그냥 '문짝이'로 하자."

"아니, 저기요!"

성문이 빼액 소리질렀다.

"제 예전 이름이랑 조금도 관련이 없는데요! 너무 대충 지으신 거 아닙니까?!"

그렇게 로드는 '문짝이'라는 이름의 에고 게이트를 얻게 되었다. 언더하임이 점점 이상한 동네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도 이상한 동네였지만.

*

마침 성문 밖으로 상단들의 행렬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짝이는 괜히 사람들을 놀래 킬 여지가 있었기에, 로드가 다른 곳으로 보내 놓았다.

"…평상시보다 양이 많네요?"

이브가 청구 품목이 적힌 양피지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응, 이것저것 구매한 게 많거든."

"……저건 뭔가요?"

그녀가 건축 자재들이 가득 실린 수레를 가리키며 말했다.

"분수대네."

"……분수대요?"

"응, 언더하임의 중앙 공터에 설치할 거야. 물이 부족하니까 정말로 분수는 못하고, 인테리어 느낌으로 꽃이나 좀 심어둘 용도로."

이브가 눈을 깜박였다.

"어머,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부셔서……?"

"상업 지구를 빼면 너무 휑한 도시잖아! 저런 거라도 좀 설치해두면 도시 조경 측면에서 좀 나아지겠지."

"…그러면 저것들은 또 뭐죠?"

그녀가 또 다른 수레를 가리켰다. 덮여있는 회색 천 아래로 식물의 뿌리 같은 것들이 보였다.

"검은깨 나무네."

로드가 설명했다.

"가뭄에 잘 견디고 소량의 물만 있어도 살아남는 놈들이야. 오히려 물을 주면 죽어버린 다더군. 저 나무들을 광장에 심어두면 도시 분위기도 좀 살아나지 않을까? 열매를 말리면 향신료도 얻을 수 있다니까 일석이조지!"

"일부로 상업 지구까지 나와 본다고 하시길래 뭔가 했더니…… 엄청나게 사들이셨군요."

황무지에 자리를 잡고 세워진 언더하임은 로드의 말마따나 모래밖에 없는 황량한 도시였다. 그나마 상업 지구 쪽은 건물도 많고 바닥도 포장되어 있어 도시 느낌이 났지만, 나머지 곳들은 텅 빈 허허벌판에 불과했다.

그래서 로드는 자금에 여유가 생기자 도시의 조경 변혁을 꾀한 것이다. 장차 세월이 흘러 이 언더하임은 이름 높은 휴양지로 그 명성을 대륙에 떨칠 것을 기대하면서. 물론 90%이상 주요한 이유는 '문화력' 때문이었다.

"…유니벨이 알면 화낼 거예요."

이브의 말에 로드가 멈칫했다.

"…그래서 지금 왕궁에서 도망 나온 거잖아. 슬슬 구매 내역을 알고 날 찾으러 올 듯한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야! 팬더???! 너 거기 딱 있어!"

두두두두!

유니벨이 살기를 휘날리며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정말로 날 죽일 기세인데?"

로드는 잠시 베아트리체를 데려 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아직도 이 도시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그럼 저는 상인들을 상대하러 가볼 테니, 건투를 빌게요."

"이, 이브!"

그녀는 양피지를 들고 관계자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고 있는 상인에게 다가갔다.

"일단 나도 도망쳐야겠군."

그때 유니벨이 달려오면서 고유 능력으로 만든 탄환을 던졌다. 후우우우우웅! 대기를 가르며 날아간 붉은 탄환이 로드를 지나쳐 저 멀리 성벽에 부딪쳤다.

'멈추지 않으면 죽이겠단 거냐!'

로드가 식은땀을 흘렸다.

"잡았다!"

결국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속도로 달려와 로드의 옷자락을 붙잡은 그녀가 거칠게 숨을 헐떡거렸다.

"아, 안녕? 유니벨."

로드가 애써 웃는 표정을 꾸며내며 말했다. 거친 숨이 조금씩 진정되더니, 이내 살벌한 빛을 담은 진홍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내며 로드를 응시했다.

"야. 너 진짜 재정신이야? 대체 저런 쓸모없는 장식품들에 얼마를 쓴 거야!"

"윽!"

그녀가 로드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로드의 몸이 종이인형처럼 휘청거렸다. 꼬맹이가 엄청난 힘이었다.

"누구는 지금 마틴이 나라 이름으로 적자 낸 거 메운다고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날 화병으로 서서히 죽일 생각이지? 나한테 국가 재정을 맡긴 것도 이런 속셈이었냐? 어?"

유니벨이 팔을 뻗어 동상이 든 수레를 가리켰다.

"그래, 나무들이야 열매로 쓸 수 있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쳐. 근데 저 동상은 뭔데? 동상은!"

"저것들 엄청 싸게 산거야! 딱 돌 값만 받고 구매했……!"

"저 돌 값보다 돌을 옮기는데 드는 운송비가 수십 배는 더 비싸다는 건 생각 못 하셨나봐? 어?"

"자, 잠깐만 진정해!"

로드가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그냥 단순히 장식 용도로 산 게 아니라, 다 이유가 있었다고!"

"그래, 유언이라면 들어줄게. 이유가 뭔데?"

도시의 조경과 환경들은 문화력 성장에 영향력을 미친다. 저 평범해 보이는 동상들도 지휘관 창에서는 문화력 상승 보너스 옵션이 붙어있었다. 즉 빠른 시대 발전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지출이었던 것이다!

'…라고 말해봐야 유니벨은 납득하지 못하겠지.'

그녀가 보기엔 그냥 사치품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 재정관인 그녀의 입장에서는 막대한 비용을 들인 학교 건축을 별말 없이 넘어 간 것으로도 본인의 인내심을 최고로 발휘한 것이리라. 로드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서도 괜히 뒤를 힐끔거렸다.

"자, 네가 생각해도 별로 변명 거리가 없지? 그 잘난 입이 웬일로 멈춰 있으실까?"

유니벨이 웃는 얼굴로 살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돈이 많아 졌다고 막 써도 된다는 건 아니거든? 우리는 항상 식량을 수입해야 하는 입장이야. 어떤 나라랑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고, 또 언제 갑자기 식량 거래가 끊길지 모르니 아껴 써야 하는데… 동상이나 분수대를 사는 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

"자, 잠깐만!"

그녀가 으르렁거리며 다가왔다.

"관리하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냐? 네가 쌀이든 밀이든 벌어 오던가!"

로드가 뒷걸음질 치고 있는 그때.

"오! 어비스의 국왕 폐하 되시옵니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유니벨이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로드가 돌아보니 사제 복장을 한 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아아, 어비스의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여신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저는 교황 성하께서 보내신 사절이옵니다."

노인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로드는 미소 지었고 유니벨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했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무슨 일이시온지……."

두 팔을 들어 올린 자세에서 굳은 유니벨의 모습을 보며 노인이 물었다. 그녀가 재빨리 뒷짐을 지며 얼굴을 붉혔다.

"아무것도 아녜요."

"……? 아무튼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성하께서 이번에 큰 도움을 받으셨다며 보내신 성의이옵니다."

유니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이아에서 온 수레들에 식량들이 잔뜩 실려 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이브가 타이밍 좋게 다가왔다. 로드와 이브는 눈을 마주치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가 말했다.

"그냥 물건만 보내셨어도 됐을 텐데, 이렇게 직접 와주시다니 감사하네요. 먼 길 수고하셨습니다. 잠시 왕궁에 들려서 회포를 푸시고, 저녁 만찬 자리 때 다시 만나도록 하죠."

"환대에 감사드리옵니다. 폐하! 여신께서 굽어 살피시기를!"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이브가 노인을 왕궁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곧이어 새로운 상단 행렬이 나타났는데 그들 무리의 깃발에는 말머리가 휘날리고 있었다. 에브게니아에서 보낸 식량이 도착한 것이다. 그 양은 아까 가이아에서 보낸 식량들 보다 두 배 이상은 많아 보였다.

'상회를 보내면 식량 전달도 간단하구나, 흐음.'

로드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자아."

로드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이제 내가 돈을 쓰기만 한다는 그런 오해는 조금 풀렸으려나?"

"……�."

유니벨은 얼굴을 붉힌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표정에 드러난 감정은 민망함 반 분함 반이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이정도 양의 식량을 보고 화를 낼 수는 없겠지.

"어, 어떻게 구한 거야?"

"외교적 수완이지, 뭐."

유니벨이 고개를 홱 돌리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마 '잘했네.' 정도일 것이다.

'어떻게 할까?'

로드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주도권은 넘어왔다. 이제 그녀를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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