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55화 (55/296)

<-- 전사들의 나라 -->

다음날 새벽이 밝았다.

"…뭐라고?"

새벽부터 병사의 긴급 보고를 들은 자무카는 얼굴이 굳어지다 못해 사색이 되었다.

자고 일어난 그 하루 사이에 많은 일들이 벌어져 있었다. 결코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사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있었다.

자무카가 회의실을 박차고 나간 이후, 현 추장인 아미르가 신세력의 대표인 아란에게 '전사의 결투'를 신청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사사건건 반대해온 아란을 계속 못미더워 했는데 이번 일을 꼬투리 삼은 것이다.

그러나 아란은 콧방귀를 뀌며 '지금은 전시이며 어차피 모든 결정은 대추장이 내리는 것이니, 우리들의 결투는 의미가 없습니다.' 라는 이유로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때 아미르는 물러나려는 그를 도발했다.

'겁먹었나? 꼬마.'

아란 또한 새로운 문화에 눈을 뜬 신세력이기 이전에, 아로게쓰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 사람의 전사였다. 아로게쓰 출신으로서 그런 모욕을 듣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의 대결은 성사되었고 그 결과, 승자는 아미르였다.

아미르가 승리로 구세력은 기세 등등해졌다.

'역시 입만 산 놈들!'

'약하니까 입이라도 털어야지, 뭐.'

'전사를 칭할 자격조차 없다!'

아란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신세력에 별 감정이 없었던 일반인들도 아란과 신세력을 싸잡아 욕하기 시작했다. 아란이 수도로 올라와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왔던 지지 기반이 '입만 산 전사들'이라는 이미지가 씌워지는 순간, 덧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결국 아란은 자신의 부족원들, 그리고 그와 뜻을 함께한 부족들과 함께 한밤중에 풋힐랜치를 떠났다. 현재 풋힐랜치의 정규 수비 병력은 1천명. 그러나 아란이 그 중에서 400명의 병력과 신세력 부족에 속한 남자들을 모조리 데리고 산을 내려간 것이다. 그들은 아로게쓰의 또 다른 거점 영토인 '플랫랜치'로 향했다.

'돌아버리겠군.'

보고를 들은 자무카는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방관했던 두 파벌의 대립이 결국 이런 식으로 치명적으로 작용해버린 것이다. 구세력은 겁쟁이들이 사라졌다며 좋아했지만 그들 또한 표정이 썩 밝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약한 전력이 더 약해져 버린 까닭이었다.

이제는 백제를 먼저 공격하는 전략은 꿈도 못 꾸게 되었다. 자무카는 풋힐랜치에 틀어박혀 병력이 쌓일 때까지 수비로 일관하기로 했다.

'빌어먹을!'

집무실로 돌아온 자무카는 속이 풀릴 때까지 물건을 때려 부쉈다. 도저히 열불이 나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별 것 아닌 마물이었던 마운틴 고블린들이 산을 장악해 버렸다.

아로게쓰 같은 무식한 나라에서 파벌 싸움이 일어났다.

그동안 카오스월드의 아로게쓰에선 이딴 변수들은 없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왕이 되니까 이런 재수없는 일들이 벌어진단 말인가!

누구라도 좋으니 속 시원한 해답을 내줬으면 좋겠다고 자무카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물음에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번 부정적인 생각을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자무카는 점점 더 깊은 비관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 후.

언더하임에서는 출정 준비가 한창이었다.

"폐하께서 오십니다."

"전원, 경례!"

군기가 바짝 든 오백 명의 도열한 병사들 앞으로 로드가 걸어 나왔다. 그는 평상시의 차림과는 다른 경량형 갑주를 입고 있었다.

'드디어 출전이구나!'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드디어 에덴에 와서 첫 해외 출정이었다.

"폐하."

기다리고 있던 이브가 공손히 검은 망토를 내밀었다.

펄럭!

로드는 멋들어지게 망토를 펼쳐 갑주 위로 둘러맸다.

"자, 그럼 출발해 볼……"

"잠시 만요. 망토 다 헝클어졌잖아요."

이브가 다가와 로드의 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망토만 잠깐 손본다는 것이 결국 로드의 머리부터 시작해서 바지까지 손을 보기 시작했다.

"……네가 우리 엄마니?"

"정말이지, 손 가는 곳이 많다니까요."

마지막으로 바지에 뭍은 실밥을 털어낸 그녀가 한 발짝 물러나며 웃었다.

"몸 조심히 다녀오세요."

"응, 내가 없는 동안 왕궁을 잘 부탁해."

그렇게 말하던 로드가 이브의 굳은 얼굴을 보고는 어깨를 툭툭 쳤다.

"걱정할 거 없다니까 그러네. 백제가 싸우는 거지. 우리 쪽엔 큰 전투는 없을 거야."

"……알겠어요. 무리하시진 말아주세요."

"흠, 흠."

그 옆에 있던 유니벨이 헛기침을 하며 다가왔다. 그녀 또한 이번 아로게쓰 원정에 참가하고 싶어 했지만, 지금처럼 어수선한 분위기의 어비스에 재정관인 그녀마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로드는 500명의 병력만 이끌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정하는 것이었다. B급 영웅이 두 명까지 나설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니벨이 곁눈질로 로드를 보며 말했다.

"…자, 자, 잘 다녀오던가!"

로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 유니벨이 유난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다녀오겠다고 말하며 걸어가던 로드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유니벨. 저번에 내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됐어?"

"아, 다른 나라 상회를 시켜서 아로게쓰에 물건을 전달한 거 말이야? 시키니까 하기야 했는데, 그런 뻘짓은 왜 하란거야?"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한 대비책."

로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흥, 또 나왔다! 둘러서 말하는 나쁜 버릇."

유니벨이 툴툴거렸다.

로드는 그렇게 두 사람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우웃차!"

단번에 멋지게 올라타려 했지만, 그만 안장을 붙잡은 손이 미끄러져서 실패했다.

'마무리가 뻘쭘해!'

그녀들과 병사들이 보고 있는데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로드는 두 차례의 시도 끝에 말에 올라타는 것을 성공했다. 승마 따위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미리 연습 좀 해 둘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가자!"

로드가 발로 말의 배를 툭 차며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말이 요란하게 몸을 뒤틀며 안장 위의 로드를 떨어뜨리려 날뛰었다.

"우, 우아아악! 얘 갑자기 왜이래?"

"폐하!"

병사들이 달려와 말을 진정시켰다. 로드는 낙마하기 전에 간신히 말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폐하. 괜찮으세요?"

이브가 다가와 물었다.

"……응, 괜찮아. 내 너덜너덜해진 자존심만 빼면."

로드가 쪼그려 앉은 채로 대답했다. 옆으로 다가온 유니벨은 대놓고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푸하하하! 너 뭐하니? 설마 말 타본 적 없어? 우와, 촌놈!"

"……있어!"

물론 가상현실에서 말이다. 게임에서 타 본 말들은 주인의 마음을 척척 알아듣고 알아서 움직여 주는 유능한 아이들이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게임에선 말과의 교감 같은 시스템 따윈 없었다.

결국 로드는 베아트리체의 말에 함께 타고 가기로 했다.

"출발하겠습니다!"

기수의 외침과 함께 병사들의 행렬이 움직였다. 왕실 식구들이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배웅해 주었다.

'하아, 출전 전부터 이 무슨 망신이냐.'

로드는 이번 일이 끝나고 언더하임에 돌아오자마자 1순위로 말을 한 필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싸고, 말 잘 듣고, 잘 뛰는 녀석으로.

"……저, 저어. 주인님."

앞에 타고 있는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돌렸다.

"응? 왜?"

그녀는 뺨을 붉은 빛으로 물들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너무 가까워요."

로드는 그녀에게 바짝 밀착한 상태로 두 팔은 허리를 감은 상태였다. 그녀의 몸에서 기분 좋게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가까운 건 싫어?"

로드가 물었다.

"…시, 싫은 건 아니지만!"

"그럼 됐네."

로드가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베아트리체의 '힉!' 하는 귀여운 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마치 꽃밭 한복판에 드러누워 있는 것처럼, 봄꽃의 향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가, 간지러워요오."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개진 그녀가 작게 소곤거렸다. 로드는 그 자세에서 팔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고삐를 잡은 채 움찔 움찔 놀라는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려 애쓰기만 하는가! 행복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있었다.

'말을 못 탄 건 이걸 위한 신의 한 수였구나!'

로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병사들의 시샘 가득한 눈초리가 보이는 듯 했다. 그래, 영원히 고통 받아라. 병사들이여! 나는 이대로 꽃향기에 취해 가련다.

*

스미스타운에서 재정비를 마친 백제군은 본토에서 온 지원 병력을 합쳐 다시 2500의 병력을 복구했다. 그리고 아로게스의 수도인 풋힐랜치로 향했다.

이때 자무카는 풋힐랜치 내 병력을 긁어모아 아슬아슬하게 1천명을 다시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수의 차이가 심했기 때문에 산을 타고 올라오는 백제군을 요격하지는 못했다. 백제군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산을 타고 올라와 풋힐랜치의 요새 앞에 진을 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진영이 서로 대치했다.

풋힐랜치는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였다. 삼면이 산의 가파른 낭떠러지였고 입구는 딱 전면밖에 없었다. 침입자는 공격 루트가 한정되어있고, 수비자는 전력을 온전히 한곳에만 집중시킬 수 있어 능히 몇 배차의 병력도 막아낼 수 있는 철옹성이었다.

아무리 수가 많고 사기가 오른 백제군이라도 섣불리 이 요새에 덤벼들지 못했다.

그렇게 대치 상황만 이어지다가 밤이 찾아왔다.

"놈들도 머리가 달려있는 이상, 훤히 드러난 낯에 덤비는 건 부담스럽겠지. 분명히 밤에 야습을 해올 것이다. 전군 대비하라!"

자무카는 야간에도 전 병력을 비상 대기시켰다.

그리고 자무카가 예상한 그대로, 백제군이 야습을 감행해왔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본래 야습이란 것은 기습의 성격을 띠고 있어야 하는데 백제 진형에서는 징과 꽹과리 등 놋쇠로 만든 타악기들을 요란하게 두들기며 공격해 들어온 것이다.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이건 마치 지금부터 공격할 것이라고 스스로 광고하는 꼴이 아닌가?'

자무카는 의아함이 들었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금방 뒤로 묻어버렸다.

아로게쓰의 병사들은 자무카의 지시로 야습을 완벽히 대비하고 있었다. 수비측의 거센 반격에 백제군의 공격은 채 삼십분을 넘지 못했으며 끝내 퇴각했다. 아로게쓰의 전사들이 무기를 드높이며 승리의 함성을 질러댔다. 그들은 뒤이은 두 차례의 야습 또한 가뿐하게 막아냈다.

백제군의 야습이 전부 실패로 끝나고 날이 밝았다. 백제군은 오히려 야간보다 더 적은 빈도로 공격해왔다.

딱 두 차례의 공격. 그것도 치는 둥 마는 둥 잠깐 달려들었다가 퇴각하는 게 전부였다. 그 모습을 본 자무카는 어이가 없었다.

'이건 또 뭐 하는 짓거리냐, 선광.'

그저 공격과 퇴각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병력은 소모될 터였다. 자무카는 저들의 전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밤이 찾아왔고 백제의 야습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그들은 징과 꽹과리를 치며 달려들었다. 이번엔 무려 여섯 차례나 야습이 이루어 졌는데 그 중 세 차례는 악기만 두들길 뿐, 실제로 쳐들어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로게쓰의 병사들은 공격의 상징인 징 소리만 들어도 벌떡 벌떡 일어나 긴장해야만 했다. 그렇게 그들은 거의 이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반면 백제 진형에서는 이미 야습을 할 병력과, 휴식을 취할 병력을 나누어서 운용하고 있었다. 날이 밝자 야습을 했던 병력은 휴식을 취하고, 팔팔한 병사들이 공성을 걸어왔다. 잠을 못 자서 눈이 퀭하게 들어간 아로게쓰의 병사들은 피곤에 절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맞서 싸워야만 했다.

그렇게 또 낯의 형식적인 전투가 끝나고, 어김없이 밤이 되었다. 아로게쓰 병사들의 체력과 사기는 모두 바닥이었다. 이제야 선광의 노림수를 깨달은 자무카가 분노했다.

"빌어먹을! 이번에도 놈들은 징을 두들기기만 하며 속임수 공격을 걸어올 것이다. 모든 공격에 반응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라. 놈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그때 움직여도 늦지 않다!"

자무카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야밤중에 징과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기 소리가 울려 퍼진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백제군은 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로게쓰의 병사들은 또 속임수겠지 하며 무시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자무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이번에는 속임수도 아니고 게릴라도 아닌, 백제의 '전군'이 밀려들어왔다.

백제군이 바로 앞까지 몰려왔음에도 불구하고, 화살은 전과 같은 기세로 날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한 몇몇 병사들이 아예 성벽 밖으로 내려가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도 체력이 한계였다.

빈틈을 파고든 백제 병사들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그들이 성벽 바로 근처까지 다가올 올쯤에야 아로게쓰의 족장들은 눈치 챘다.

이번엔 '진짜'라는 것을.

"놈들이 왔다!"

========== 작품 후기 ==========

htrdvu / 다들 내정적인 문제점은 몇개씩 안고있습니다.

좀비두더지 / 제대로 파악하셨네요. '초반 전투력과 강자지존에 의한 높은 충성심' 이래서 아로게쓰가 초반국가인거죠

쿠죠죠타로 / 삼국지 만능설! ㅋㅋㅋㅋㅋ

Digimon0002 / 확실히 현실보정으로 난이도가 더 올라갔죠!

Ayahi / 주력 다 주금 ㅠㅠㅠ

카이프 / 넵. 섬나라에서 중앙대륙으로 큰 변화를...

바바상 / 역시 절대권력체계는 지도자의 능력이 가장 중요한듯해요

Lgb / ㅠㅠ 취준생은 웁니다.

lineata / 베스트는 역시 농업지역이겠죠?

sdaas / 죄, 죄송합니다... 지금 컨디션상 연참은 무리... 훌쩍

Mr윤 / 오늘도 코맨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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