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사들의 나라 -->
"전부 몰려가서 막아!"
뒤늦게 잠들어 있던 병사들이 허겁지겁 성벽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들이 성벽에 도착할 즈음엔 이미 선두의 백제 병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있었다. 곧이어 성벽 위는 올라오려는 자들과 막으려는 자들 간의 치열한 백병전이 펼쳐졌다.
이 전쟁에서는 처음으로, 백제의 특화 병종 '싸울아비'들이 나섰다. 그들 전원이 검정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동양풍 제복을 입고 있었다.
일반 병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것과 달리 싸울아비들은 성벽에 줄을 건 다음, 발로 벽을 딛고 올라갔다. 그 속도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그 모습을 본 족장들이 소리쳤다.
"백제의 싸울아비 놈들이다!"
"저 줄을 먼저 끊어라! 놈들이 올라오면 귀찮아진다!"
아로게쓰 병사들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성벽에 달라붙어 나이프로 줄을 자르기 시작했다. 그때 싸울아비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전원, 경공을 시전하라!"
"……!"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성벽의 중간 조금 넘게 올라온 싸울아비들이 일제히 성벽을 딛고 하늘로 도약해 그대로 성벽 위까지 올라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싸울아비들의 특수기인 '경공'. 단숨에 수십의 싸울아비들이 백병전에 합류했다.
"동방의 검에 영광을!"
싸울아비들이 일제히 발검하여 달려들었다.
바람처럼 움직이며 생전 처음 보는 독특한 검술을 구사하는 싸울아비들의 활약에 아로게쓰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싸울아비들이 분투하며 틈을 만들자 사다리를 타는 백제 병사들이 더욱 빠르게 성벽 위로 올라왔다.
'가, 강하다.'
그들의 검술은 화려한 검무를 보는 듯 아름다웠다. 검의 움직임에 현혹된 자들은 여지없이 목이 날아갔다. 상대하는 병사들은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어린놈들은 저리 비켜라!"
그때 거칠게 없어 보였던 싸울아비들의 앞을 새로운 무리의 병사들이 가로 막았다.
"저 꼴을 보라지! 사내자식들이 뭐 이리 곱게 생겼냐?"
"으흐흐, 붙어보자고! 샌님들!"
아로게쓰에도 특화 병종이 있었다. '액스워리어'들이었다.
후우웅! 액스워리어 한 명이 달려들어 도끼를 휘두르자 싸울아비는 검을 들어 올리는 방어 자세를 취했다.
푸확!
"……!"
완벽한 가드 자세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손으로 휘두른 도끼가 싸울아비의 검을 밀어내며 가슴에 상처를 냈다.
"크윽!"
그가 당황하며 주춤거리는 순간, 반대쪽 손에 쥔 도끼가 다가와 퍼억! 소리와 함께 머리통을 박살냈다.
"하하하하! 저 펄럭거리는 놈들도 별거 아니구만!"
그가 얼굴에 튄 피를 핥으며 말했다.
"가자! 놈들이 올라오는 족족 죽여라!"
"물러서지 말고 대열을 유지하라!"
싸울아비들과 액스워리어들이 맞붙었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무력 집단간의 싸움은 확실히 일반 병사들과는 그 급을 달리했다. 처음엔 무지막지한 힘을 자랑하는 워리어들이 우세였지만, 이내 그들의 움직임이 익숙해진 싸울아비들이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고 판단을 내리고 회피 위주로 전투를 풀어나가자 조금씩 전황이 비등비등해졌다.
그렇게 수 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뒤섞인 난전이었다. 백제의 장군들은 적의 허를 완벽히 찌른 전략으로 이번에야 말로 요새를 점령하고 승리를 거둘 것이라 생각했으나, 아로게쓰는 역시나 아로게쓰였다. 전사들은 잠을 자지 못해 지치고 피로가 쌓인 와중에도 기적과 같은 힘을 발휘했다. 또한 성벽 위에서의 전투는 백제가 머릿수의 이점을 살리는 게 불가능했다.
결국 백제의 수뇌부에서 퇴각을 명했다.
"전원, 경공을 시전하라!"
마지막까지 검을 휘두르며 병사들이 탈출할 시간을 벌어준 싸울아비들이 등을 돌려 성벽을 타고 내려갔다. 그러다 중간 지점에서 경공을 시전해 안전하게 지상으로 착지했다. 그 모습을 본 아로게쓰의 전사들이 혀를 내둘렀다.
"인정하긴 싫지만 저 새끼들만은 강하군."
"크흐흐! 또 붙어볼 날이 기대되는군요."
그들은 도망가는 싸울아비들에게 화살을 쏘지 않았다. 비록 적이지만 같은 전사로서 훌륭한 싸움을 선사해준 것에 대한 예우였다.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서도 전사로서 명예를 지킨다. 이것이 아로게쓰의 방식이었다.
*
한편 로드는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병사들에게 휴식을 명했다. 그리고 베아트리체에겐 화장실을 갔다 온다 말해놓고는 홀로 한적한 숲에 들어왔다. 물론 진짜 용무는 선광과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1:1 대화창으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된 겁니다."
상황을 모두 들은 로드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호전적인 성향의 아로게쓰를 상대로 타악기를 활용한 페이크. 확실히 그렇게 되면 악기를 두들기는 것만으로도 적에겐 고통이 되겠죠. 그렇게 계속 괴롭히다가 저들이 가장 방심한 타이밍의 기습. 괜찮은 전략이네요."
"…하하, 그런가요?"
선광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로드가 이어서 말했다.
"으음,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부족한 게 있다면 가감 없이 말씀해 주세요."
선광이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깍지를 끼며 말했다.
"만약에 저였다면 타악기를 쓴 며칠 만에 총공세를 걸지 않았을 겁니다. 적어도 진득하게 1, 2주는 괴롭혔겠죠."
"…그,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로드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로게쓰를 힘으로 눌러 무너뜨리려면 그런 수법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선광님도 잘 알다시피, 그들은 우매하고 멍청하지만 힘과 의지에 있어서는 가공할만하죠. 동등한 상황에서의 전투라면 대륙의 어디에 내놔도 지지 않을 괴물 같은 놈들입니다."
로드는 잠시 설명을 멈추고 선광이 설명해준 상황을 머릿속에서 이미지로 그려보았다.
"페이크 이후 들어간 총공세에서는, 모든 면에서 백제의 완벽한 우세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로게쓰는 무너지지 않았을까요? 그냥 깊게 생각할 필요 없이, 아로게쓰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건 웬만해선 힘들어요."
"……힘으로 무너뜨릴 수 없다니, 그렇다면 아로게쓰는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 겁니까?"
로드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전투가 아닌, 문화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들이 가진 전사의 문화는 장점이자 단점. 그 단점에 주목하는 거죠."
선광은 아로게쓰를 전략적 방안에서 공략했다. 풋힐랜치의 요새가 튼튼했기에 야습에 집중했고, 아로게쓰 병사들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방심하도록 유도하여 기습. 전략가다운 무난한 플레이였다.
하지만 로드는 전략가보다는 모략가쪽에 가까웠다. 병사들을 활용하는 전략적인 움직임 보다는, 적을 분석하여 그들의 생각을 읽어내고, 행동 패턴을 역으로 이용하고, 사실을 왜곡하여 위험에 빠트리는 등의 중상모략이 특기였다.
"……문화적인 측면이라, 감이 잘 안 오는군요."
선광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플레이어라도 두 사람의 스타일은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잠시 고민해보던 선광은 답을 찾지 못했는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들이 극단적으로 호전적인 성향이고, 전투를 신성하게 여긴다는 점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놈들을 약 올린다거나 유인한다고 해서 스스로 성문을 열어젖히고 나오지는 않을 겁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죠?"
"현재 아로게쓰를 쥐고 있는 자가 야만인 출신이 아닌, 플레이어인 자무카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짚었다. 로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바로 그겁니다! 그러니까 자무카만 축출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의외로 간단하게 풀릴 겁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선광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지금 아로게쓰에서 가장 강한 전사는 자무카입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고, 휘하 영웅들은 절대 그의 말을 거스를 수 없어요."
로드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그럼 그 불가능하다는 걸, 제가 해내 보이도록 하지요."
*
아로게쓰의 전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 백제는 다시 징과 꽹과리를 두들기는, 철저하게 적을 괴롭히는 작전만을 고집했다.
한 번의 화끈한 전투 이후 피가 끓어올라 있었던 아로게쓰 전사들이었지만, 기대했던 2차 전면전은 없었다. 백제군의 지속된 견제에 피로가 쌓이고 스트레스는 커져 갔다. 그들에게 있어 성에 틀어박혀 버티는 장기전 양상의 수성전은 참을 수 없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식량문제도 새로이 대두되었다. 본래 마운틴 트롤들 때문에 도시의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군사들만 먹이는 게 아닌 도시 안의 일반인들도 먹여야 했기 때문에 식량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면 백제는 이번에 합류한 병사들로부터 식량을 보급받은 데다가, 스미스타운의 창고를 털어서 식량 걱정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아로게쓰의 성 앞에서 보란 듯이 밥을 짓고, 고기를 구워 먹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 향기에 그렇지 않아도 민감해져 있는 아로게쓰 전사들은 더더욱 분통을 터뜨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지만 백제는 후퇴할 움직임도, 제대로 된 전면전을 펼치지도 없었다. 그저 철저하게 징과 꽹과리로 괴롭히며 야습을 감행하는 전략만 썼다. 아로게쓰 병사들의 짜증과 피로는 한계에 다다랐고, 족장 회의 내에서도 그냥 출성을 해서 끝장을 보자는 의견들이 점점 커졌다.
물론 자무카는 당연히 그 의견을 기각하고 수성만을 고집했다. 출성하는 건 자살 행위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미르를 비롯한 족장들은 그러한 그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가장 강한 전사인 자무카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그때.
"소녀의 이름은 비월이라 하옵니다."
새로운 변수가 일어난다.
피와 시체가 가득한 전장 속에서, 한 떨기 꽃과 같은 여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싸울아비들의 유니폼과 같은 검정과 빨강이 어우러진 도복을 입었으며, 밤하늘을 발라놓은 듯한 흑발과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가 눈에 띄었다. 등 뒤로는 삿갓을 줄에 연결해 목에 걸었으며 허리춤에는 화려한 장식의 장검이 한 자루 보였다.
단아한 외모와 기품이 느껴지는 걸음걸이, 그녀가 바로 싸울아비들 중에서 톱이자 백제 최고의 무장인 '비월'이었다. 그녀는 확성 구슬을 키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후, 낭랑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피차간의 전쟁으로, 재능을 꽃피워보지도 못한 아까운 목숨들만 사라지고 있으니 통탄을 금할 길이 없사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펴지자 아로게쓰의 전사들이 우르르 성벽으로 몰려와 구경이라도 난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비록 미약한 실력이오나 소녀는 백제를 대표하는 최고 무인으로서 이 자리에 섰사옵니다. 소녀는 아로게쓰의 최고 무인인 자무카에게 1:1 일기토를 제안하옵니다."
"……뭐?"
충격적인 제안에 전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황하는 건 잠시뿐, 곧 요란한 비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 정말로 계집년이 백제 최고의 전사란 것이더냐? 근래 들어본 농담 중에서 최고로 웃기구나! 놈들의 수준이 이렇게나 낮을 줄이야!"
"분수를 알고 물러나라. 풋내 나는 계집! 위대하신 대추장께서는 너 같은 애송이를 상대할 여유가 없으시다! 잠자리 상대라면 또 모르지만! 하하하하!"
"얼굴은 꽤 예쁘장하군! 내 손에 붙잡히면 친히 그 깜찍한 아랫도리를 꿰뚫어 주리라!"
"헐렁해 질 때까지 몇 번이고 박아주마!"
정숙한 여인에게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끔찍한 폭언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고운 미간을 조금 찌푸렸을 뿐, 큰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야만인들답게 수준 이하의 언변이군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소녀는 여인이 아닌,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이 자리에 선 것이옵니다. 혹여나 소녀에게 겁먹어 나올 생각이 없는 건 아니신지요?"
"뭐라…?"
"천한 계집 따위가 건방지게!"
다시 성벽에서 참담한 폭언들이 쏟아졌다.
그녀는 눈을 치켜뜨며 자신이 전달할 말을 또박또박 말했다.
"소녀의 요구는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무인들간의 정당한 일기토. 그것뿐이옵니다. 만약 일기토에서 소녀가 패할 경우, 백제의 군대는 지체 없이 물러나 본래의 영토로 되돌아갈 것을, 우리 '선조의 영혼'을 걸고 맹세하옵니다."
웅성 웅성
이번 발언은 파격적이었다. 그녀의 말을 헛소리라고 치부하던 전사들까지 눈을 크게 뜨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전사를 자처하는 당신들이 승부를 마다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오나, 만약 거부하신다면, 우리 군은 계속해서 포위 전략만을 쓸 수밖에 없음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 작품 후기 ==========
로드의 노림수를 눈치 채셨나요?
(싸울아비 강해요.. 워리어 강해요.. 스파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