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사들의 나라 -->
'일기토에서 패배하면 병력을 물리겠다.'
솔깃한 이야기였다. 전사들은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해 몸 상태나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그저 오기로 버티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자무카가 나서서 저 허약한 계집만 쓰러트리면 이 모든 고통을, 그리고 이 전쟁 같지도 않은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비월은 '선조의 영혼'을 거는 것으로 맹세했다. 아로게쓰의 전사들에게 선조의 영혼을 건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맹약과 같았다. 그 말이 들어간 것만으로도 약속의 무게감이 달라졌다.
물론 백제에서는 '선조의 영혼'을 건다는 개념이 없었다. 이 발언은 모두, 로드가 선광에게 말해주고 선광이 비월에게 지시한 정해진 각본이었으나 그 파급력은 대단했다.
족장들은 날듯이 달려가 이 기쁜 소식을 자무카에게 전했다.
"이런 기회는 단연코 없을 겁니다! 백제 최고의 전사라 한들 계집이 아닙니까? 우리들 중 최강인 대추장께서 패배할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맞는 말이올시다! 대추장의 실력은 여기 있는 모두가 보증하는 바이니!"
"이건 명백한 놈들의 실책이오. 승산도 없는 싸움에 선조의 영혼을 걸다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소!"
"가시지요, 대추장! 그 비월이란 년을 박살내고 이 전쟁을 끝냅시다!"
족장들은 아예 자무카의 출전은 당연한 것이오, 승리까지 기정사실화 하면서 잔뜩 흥분해 있었다.
반면 듣고 있던 자무카는 담담한 표정을 연기했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내가 미쳤냐! 이 정신 나간 놈들아!'
플레이어인 자무카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리 봐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비월은 백제의 B급 무력형 영웅으로 바얀처럼 카오스 월드에서 널리 알려진 진짜배기 인재였다. 동시에 단순 1:1 전투에서는 바얀보다 우위라고 평가 받는 괴물이다. 그런데 고유 능력에서 손해를 보는 자무카 본인이 그녀를 이길 가능성은 얼마나 되겠는가? 아무리 후하게 쳐줘도 절반 이하였다.
게다가 그동안 교활한 전략만을 구사해온 백제가 난데없이 1:1 일기토 제의를 걸어오다니! 구린내가 풀풀 났다. 이것은 노골적으로 플레이어인 자신을 끌어내려는 계략이 아닌가? 뭔가 더 꼼수가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상황들을 모두 배제하고 비월을 쓰러트릴 수 있다 한들, 백제는 그냥 병력을 퇴각 시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백제에게 선조의 영혼 같은 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자무카에게도 이 정도의 판단력은 있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그는 단정 지었다. 생각을 정리한 자무카가 입을 열었다.
"일기토 제안은 거절한다."
"……?!"
벌써부터 큰 소리로 웃어대며 승리를 자축하고 있던 족장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이었다.
"……거, 거절이라고 하셨소?"
"어째 섭니까? 대추장!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이건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란 말입니다!"
자무카는 잠시 거절의 이유를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족장들 앞이니 에둘러서 잘 말해야 했다.
"일기토는 백제 놈들의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내가 그 일기토에서 승리한다고 한들, 놈들은 절대 순순히 군대를 물리지 않을 것이다."
"놈들은 선조의 영혼을 걸었습니다! 말을 바꾸지는 못할 겁니다!"
"대추장! 부디 재고를!"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족장들은 도저히 자무카의 결정을 납득하지 못했다.
최고 무인들끼리의 1:1로 내는 승부. 너무나 간단하고 명예로운 길을 두고 왜 굳이 고생을 사서 하려한단 말인가! 일기토 찬스를 물리고 전쟁을 계속해도 백제에 끌려 다닐 뿐이었다. 식량도 부족하고, 체력도 부족하고, 정신력도 이제 한계였다.
"잠깐, 잠깐! 진정들 하시지요!"
그때, 머리를 뾰족하게 세우고 코에 코걸이를 한 족장이 나서서 모두를 주목시켰다. 자무카의 시선도 그에게로 꽂혔다. 기억하기론 아미르 파의 소속된 족장이었다.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대추장."
그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말해봐라."
"먼저 일기토는 양측 진형에서 공정하게 떨어진, 화살이 닿지 않는 지점에서 성사될 겁니다. 애초에 함정을 준비해 둘 수가 없을 뿐 더러! 놈들이 일기토를 중단시키고 병력들을 보내도 우리 또한 마찬가지로 병력을 보내면 그만입니다."
자무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함정을 준비해 둘 수가 없다니, 뭘 모르는 소리였다. 지구의 플레이어들이 얼마나 교활한지 알고 있었더라면 저런 소리는 쏙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일기토에 패배한 백제 놈들이 병력을 물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 비월이라는 년을 사로잡아 성벽으로 데려가 놈들이 보는 앞에서 욕을 보이는 겁니다! 명색이 백제 최고 무인이라 했으니 놈들의 사기는 크게 낮아지겠죠. 저들이 물러나지 않더라도 적장 포획과 적의 사기를 동시에 떨어뜨릴 수 있는 기회인 겁니다! 손해 볼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추장!"
"오오오!"
"그 말이 옳소!"
족장들이 격렬한 환호성을 보내왔다. 특히 아미르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치고 있었다. 어지간히 부하의 활약이 기분 좋았던 모양이었다.
'……저 무식한 놈들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논리적으로 지껄이는 거야?'
사실 저런 논리로 나오면 자무카의 입장에서는 크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일기토를 거절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논리는 '내가 비월보다 약하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선택지는 불가능했다. 전사의 문화를 가진 아로게쓰에서 여성들의 권위는 가축보다 조금 높은 정도였다. 아로게쓰에 있어 여성들은 그저 새로운 전사를 낳아주는 존재라는 것에 의미가 있었고, 그밖에는 성욕의 해소처, 혹은 집에서 잡일을 하는 딱 그 정도의 인식이었다.
이렇게 여성의 인식이 바닥인 아로게쓰 사회에서, 대추장인 자신이 여성보다 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지다 못해 구멍이 날 것이다. 결국 지금, 자무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모두 시끄럽다!
자무카가 버럭 소리쳤다.
"내 결정을 반복하게 하지 말라!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일기토를 할 생각이 없다. 그게 불만이라면 결투를 신청해서 내 대추장의 자리를 가져가보아라!"
"……."
그의 일갈에 회의장이 싸늘하게 식었다.
힘으로 밀고 나오면 아무도 거스를 수 없다. 이것이 아로게쓰였다. '딱 이정도 밖에 안 되는 놈들.' 자무카는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회의실을 나섰다.
그가 나간 후에도 회의장은 한동안 깊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실망했소, 대추장."
아미르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자무카가 떠나고, 아미르도 회의장을 나와 성벽으로 되돌아갔다. 좋은 소식을 받아오지는 못했지만 그에게는 아직 생각이 있었다.
성벽으로 올라와 아래를 내려다보니 여전히 비월이 서서 답을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백제의 명랑한 계집은 들으라!"
아미르가 가슴을 탕탕 치며 소리쳤다.
"대추장께서는 그대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허나, 그대가 대륙 최강의 사내인 대추장께 도전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도 순서가 맞지 않는바, 대추장 전에 아로게쓰의 2인자인 이 아미르를 쓰러트리고 실력을 입증하라! 내가 그대의 도전을 받아주겠노라!"
아미르의 선언에 전사들이 무기를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소녀는 분명히 말씀 드렸사옵니다."
비월은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소녀는 긍지 높은 백제 최고의 무인으로서 이 자리에 섰사옵니다. 그런데 그대들은 같은 최고 무인이 아닌, 2인자를 내보내 우리 백제국을 시험할 셈입니까?"
비월은 진심으로 화가 난 듯 눈을 치켜뜨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광오하옵니다! 이 비월, 그대들의 한낱 안줏거리로 농락당하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대 백제국을 무시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사옵니다!"
"…큭!"
아미르가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전사로서 명예로운 행위라고는 할 수 없었다. 두 국가는 동등하다. 저쪽에서는 예우를 지켜 최강의 전사가 나왔는데, 이쪽에선 멋대로 상대의 실력 부족을 운운하며 시험하는 듯한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승부를 받아주시지 않겠다면, 소녀도 어쩔 수 없군요."
비월이 등을 돌리며 말했다.
"자무카라는 자의 마음이 바뀌면, 그때 다시 말씀해 주시옵기를."
그녀가 백제 진형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악몽과도 같은 징과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미르와 족장들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시 지옥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한편 씩씩거리며 집무실로 돌아온 자무카는 화면을 띄워 놓은 채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결국 그렇게 됐다네! 비월이 내게 일기토를 신청했단 말이야! 이건 분명 노림수가 있어! 선광 그 자식, 비열함에 도가 튼 새끼 같으니!"
화면에 나온 남자는 그저 웃는 얼굴로 자무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방향성 없이 자유롭게 웨이브진 갈색 머리와 짙은 눈썹과 쌍꺼풀, 호감이 가는 선한 외모, 항상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는 카사르의 플레이어인 '아크 더 라운드'였다.
"…일기토라, 이런. 이런."
아크는 홀로 체스를 두고 있었다. 흰말과 검은말 모두 그의 것이었다. 아크는 자무카의 대화보다는 체스에 더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선광 씨는 아닐 거예요."
"무슨 말이지?"
"그 수법을 생각해낸 사람 말이에요."
아크가 하얀 나이트로 검은 비숍을 잡고는 그것을 들어 이빨로 살짝 깨물었다.
"아로게쓰라는 나라에 대한 이해력이 높은 자의 책략.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플레이어겠군요."
"아니,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냐! 풋힐랜치 앞에 백제군이 몰려와 있단 말이다!"
"?누구일까나아? 역시 그……."
뚝! 아크가 깨물고 있던 비숍의 머리가 떨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자칭 게임폐인 씨려나?"
"이보게! 아크! 내 말 듣고 있…… 흡!"
자무카가 화들짝 놀랐다. 스크린 창 너머로 대뜸 초록 머리의 소녀가 나타나 아크의 무릎 위로 올라온 것이다.
아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와 입을 맞추었다. 그녀 또한 눈을 감고 아크를 받아들였다.
'……!'
국정을 논하는 두 왕의 회의는 갑작스런 키스 타임 생중계로 변질 되었다. 졸지에 구경꾼이 되어버린 자무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흘러, 아크가 천천히 입술을 땠다. 그리고는 그녀의 뺨을 매만지며 웃었다.
"오늘도 아름다워, 릴리 양. 머리 했구나?"
"……헤헤헤."
그녀가 쑥스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아크는 다시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아, 그런데 누구랑 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고 말을……."
"후후. 별 거 아니란다. 미안하지만 일이 있어서 그러니 저기 밖에서 놀고 있으련?"
"네에."
소녀가 무릎 위에서 일어나 화면 밖으로 벗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아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는 얼굴로 돌아와 자무카를 보았다.
"계속 하시지요."
"……."
자무카는 너무 당혹스러워서 화도 잘 나오질 않았다.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짓거린가! 게다가 아까 그 여자는 신관도 아닌 것 같던데, 그렇게 부주의해도 되는 건가?"
"어차피 보지도 못하니까요, 그리고 이 편이 더……."
아크가 윙크했다.
"짜릿하잖아요."
자무카는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으스스한 소름이 돋아났다.
"아, 아무튼! 지금 백제군이 코앞이다! 수도 앞까지 도달해 있는데 그 놈의 지원군은 대체 언제쯤 도착한단 거냐?"
"이제 금방입니다. 너무 걱정 마시길."
아크가 태연히 말했다. 자무카는 몸이 달아서 물었다.
"금방? 또 그 소린가? 이번엔 정말로 급하단 말일세! 우리 쪽 사정을 제대로 알고 있긴 한 건가?"
아크는 웃는 얼굴로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다시 체스를 두었다. 이번엔 검정 룩이 하얀 폰을 잡았다.
아크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자무카는 열불이 뻗쳤다. 서운하기도 했다.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됐는데 남일처럼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자네의 말을 믿고 어비스를 쳤다가 이렇게 됐네! 동맹국이 대한 책임감이 이렇게 없어도 된단 말인가?"
"헤에?."
아크의 입꼬리가 불쑥 올라갔다.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네요."
"뭐, 뭐가 재밌단 말이냐!"
"당시 어비스의 정규 병력은 정말 딱 오백! 그건 저를 탓할게 아니라……."
선한 웃음을 짓고 있던 아크의 표정이 일순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오히려 '떠먹여' 줘도 먹지 못한 자무카님의 멍청한 군대를 탓해야 하지 않나요?"
"……크윽!"
자무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말은 나였으면 진작에 어비스를 멸망시켰다. 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도 바얀이 퇴각에 합의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뭐어, 자무카님을 탓하는 건 아니랍니다."
아크가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우선 오해를 풀어야겠군요. 글레이시온과 전쟁 중이라 시간이 좀 걸렸을 뿐, 우리 병사들이 아로게쓰의 국경선 근처까지 온 건 사실입니다. 이제 풋힐랜치까지는 얼마 안 걸릴 테지요."
'……드, 드디어!'
카사르가 온다.
카사르의 기사단만 오면 백제든 어비스든 모조리 갈아버릴 수 있다! 이제 정말로 버티기만 하면,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아크가 화사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조금만 더 참아주시길. 나의 소중한 동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