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59화 (59/296)

<-- 전사들의 나라 -->

아로게쓰의 신관, 루그릭은 B급 통솔형 영웅이다.

통솔형 클래스는 대규모 전쟁에 특화되어 있는데 전황을 보는 탁월한 감각, 냉철한 판단력, 뛰어난 용병술과 카리스마, 그리고 병사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그들은 '무인'이라기 보다는 '장군'이나 '지휘관'에 가까웠다. 특히 통솔형 영웅이 직접 통솔하는 부대는 시스템 어시스트로 능력치 보너스효과까지 받으니, 대규모 전쟁에선 무력형 영웅 보다 통솔형 영웅이 기여하는 바가 더 크다고 평하는 플레이어들도 많았다.

그러나 루그릭이 아로게쓰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불운이었다. 그는 스테이터스 상으로 B급 통솔을 가졌지만 무력이 고작 C급이었다. 대장군이 될 자질을 갖추었어도 전사의 결투의 잇따른 패배로 루그릭은 그저 그런 중급 관리 정도에서 멈추었다. 병사들 또한 루그릭 보다는 그보다 더 싸움을 잘하는 전사들을 존경하고 따랐다. 그렇다고 아로게쓰와 같은 곳에서 '신관'이라는 직위를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한동안 비관에 빠져있던 자무카는 이 남자를 보면 괜히 자신의 꼬인 상황을 보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플레이어와 가장 가까운 존재인 신관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무카는 루그릭을 홀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까지 자무카 옆에 서 있는 자는 루그릭 뿐이었다.

"이쪽이옵니다, 대추장."

루그릭은 자무카를 낡은 창고로 데리고 갔다.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으나,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저게 뭔가?"

"대형 연입니다. 탑승용으로 설계되었지요."

장방형의 방패연과 같은 모습이었다. 크기가 사람의 수 배에 달할 정도로 컸으며, 튼튼한 대나무를 통째로 몸체로 써 사람이 탈 수 있게 만들어졌다. 천 또한 특수한 재질로 되어 있었는데, 만져보니 은빛 가루 같은 것이 떨어지는 게 척 봐도 값비싸 보였다.

"……이런 걸 어디서 구했나?"

"최근에 들여온 수입 품목 중에 있었습니다. 잘못 배송된 물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운이 좋군요. 신들께서 대추장을 돕고 계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거대한 연을 창고에서 꺼낸 다음, 지체 없이 그것을 들고 낭떠러지 쪽으로 달렸다. 특별히 길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어느 쪽 방향으로든 쭉 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자무카가 이쪽에 있다!"

"잡아라!"

벌써부터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연이 걸려 찢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길목을 내달렸다. 중간 중간 화살이 날아와 연에 구멍이 났지만, 크기 자체가 워낙 거대해서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렇게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낭떠러지에 도착해 있었다.

'……밤에 와서 보니 더 아찔하군.'

인간이 기어 오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가파른 절벽. 그 아래로는 시꺼먼 어둠이 있었다.

"정말로 이런 걸 타고 빠져나갈 수 있겠나?"

자무카가 연을 붙잡은 채 말했다. 바람이 불자 연이 격하게 나풀거렸다. 손을 놓으면 그대로 날아가 버릴 정도로, 바람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괜찮을 것이옵니다. 바람이 강하니 바로 지상으로 내려가지는 못해도 다른 산봉우리 어딘가에는 닿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즉시 산을 내려가시옵소서. 놈들도 백제에게 둘러싸여있는 상황이니 추격대를 보낼 수 없을 것이옵니다."

루그릭이 절벽 끝에 연 줄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와아아아아!"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특히 가장 선두에는 얼굴이 시뻘게진 아미르가 보였다. 그가 거칠게 악을 질러댔다.

"자, 타시옵소서."

루그릭이 말했다. 자무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나무 몸체 위로 올라탔다.

"자네는?"

"꽉 잡으십시오."

루그릭이 대뜸 연의 몸체를 절벽에서 밀어버렸다. 후우우우웅! 절벽 아래로 떨어지던 연이 이내 바람을 타고 부웅 떠올랐다.

루그릭은 검을 뽑아 줄을 자르며 말했다.

"그 연은 일인용입니다."

"루, 루그릭!"

당혹스러워 하는 자무카의 얼굴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가 뭐라고 외치는 것 같았으나 바람소리에 묻혀 들리지는 않았다. 루그릭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걸로 됐다.

그리고 한발 늦게 아미르의 군대가 도착했다. 이미 자무카가 탄 연은 바람에 밀려 저 멀리 날아간 뒤였다.

"……루그릭!"

분노한 아미르가 검을 빼어 들며 소리쳤다.

"제정신이 아니군!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이유가 있어서 한 선택입니다."

루그릭이 덤덤하게 말했다. 아미르가 '하!' 하고 허탈한 소리를 냈다.

"……당신은 대추장을 증오하는 줄 알았기에 회의에 참가시켰거늘! 그런 수모를 겪고도 그를 돕는 거요?"

루그릭이 검을 세우며 웃었다.

"나는 신관입니다. 주인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죽게 내버려둘 수야 없지요. 저의 목숨은 주인의 것입니다."

"……신관이라, 그랬었지. 결국 마지막까지 한 사람의 전사로 남는 것을 포기하는 것인가."

아미르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죽여라."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나의 주인이시여, 부디 무탈하시길!"

루그릭이 검을 꼬나쥐고 병사들 무리에 달려들었다.

*

서서히 새벽이 밝았다.

연을 타고 날아가던 자무카는 산등성이가 가까워지자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마운틴 고블린들의 눈을 피해 산을 내려갔다.

반란으로 풋힐랜치에서 쫓겨난 그가 향할 수 있는 곳은 이제 한 곳뿐이었다. 아로게쓰의 거점 영지 세 곳 중 마지막 남은 하나인 '플랫랜치'였다.

그리고 플랫랜치는 아미르의 구세력에 의해 쫓겨난 아란의 세력들이 있는 곳이었다.

"하! 내가 이런 꼴이 되다니……."

세상사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란의 구세력이 수도에서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도 똑같은 꼴이 된 것이다. 풋힐랜치에 있었을 땐 상상도 못 했었던 일이었다.

그래도 아란 또한 아미르에 의해 풋힐랜치에서 쫓겨났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의외로 환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환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도 대추장인 자신을 위시하여 다시 세력을 떨칠 수 있는 기회일 테니 말이다.

이제 선광의 백제 병력들은 자신이 빠져나간 줄도 모르고 풋힐랜치를 공격하여, 알아서 반란군을 숙청해줄 것이다. 자무카 자신은 아란의 신세력을 흡수하고 카사르의 지원군과 힘을 합친다. 그리고 지쳐있는 백제군을 몰아내고 다시 풋힐랜치를 수복하는 것이다.

아직 희망은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곧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자무카는 희망을 품은 채 걷고 또 걸었다.

백제군이 언제 어디서 쫓아올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자무카는 풋힐랜치에서 빠져 나온 뒤로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평평한 육로는 발각될 염려가 있어 일부로 숲길을 따라 걸었다. 중간 중간 몬스터들과 마주쳐 싸우기도 했고 몸에 얕은 상처도 생겼다. 옷은 흙 범벅에 찢어졌고 얼굴도 초췌하게 변했다. 그의 모습은 거의 거지꼴이나 다름없었다.

"……어째서."

자무카는 플랫랜치로 걸어가면서 끊임없이 지휘관 창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처절한 발버둥과 같았다. 그의 입에서는 '어째서. 어째서.' 하는 소리만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자무카'님이 '아크 더 라운드'님께 1:1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 '자무카'님이 '아크 더 라운드'님께 1:1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 '자무카'님이 '아크 더 라운드'님께 1:1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 '자무카'님이 '아크 더 라운드'님께 1:1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어째서, 어째서 받질 않는 거냐! 아크!"

결국 날이 저물고 자무카가 플랫랜치의 성까지 도착한 끝에도, 아크에게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성문이 보이자 그는 광소를 터뜨렸다.

비참했다. 너무 비참해지니 분노나 울음보다는 웃음이 먼저 나왔다. 대체 어디까지 떨어져야 한단 말인가.

"……후후후후."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비관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주신전에서 탈락할 수는 없었다.

비록 아크는 자신을 버렸지만, 아직 아란의 세력이 남아있고 거점 영지도 하나 가지고 있다. 일단 지휘관 창으로 동맹을 구할 것이다. 동맹이 아니라면 다른 나라의 속국이라도 되어서 버틸 것이다. 속국으로 시작했다가, 상황을 역전시켜 대 제국을 건설한 경우는 카오스월드에서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복수하마. 백제, 어비스, 카사르까지! 전부 내 손으로 굴복시키겠다!'

피 끓는 분노로 인해 다시금 몸에 활력이 생겼다. 성문 앞까지 도착한 자무카가 큰 소리로 외쳤다.

"본인은 아로게쓰의 대추장 자무카다! 성문을 열어라!"

"대, 대추장?"

성벽 위에 있던 경비병들이 화들짝 놀라며 내려갔다. 곧이어 거대한 성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그 틈으로 경비병 둘이 달려와 허리를 숙였다.

"대추장께서 어찌 이런 곳까지……! 아, 아니. 이게 다 무슨 꼴입니까!"

"설명하려면 길다. 우선 안으로 안내해라."

"예, 예!"

경비병 하나는 자무카를 안내했고, 다른 하나는 '대추장께서 오셨다!' 라고 목청이 터져라 외치며 진입로를 앞서 달려 나갔다.

자무카는 경비병을 따라 천천히 길을 걸었다. 멍하니 걷고 있으려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이 게임에서 최선을 다했는가?'

아니었다.

모든걸 잃고 나서야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아크의 실력만 보고, 그가 자신을 이용하려 했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한 채 달라붙었다.

어비스 전쟁에서도 바얀에게 모든 것을 맡겨 버린 채, 자신은 직접 출정하지 않고 여색에 빠져 지냈다.

구세력과 신세력의 분쟁도 진작에 말릴 수 있었던 것을 그저 그림이 재미있다며 방관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잘못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다른 누구의 잘못이 아닌 자무카 자신의 방심과 잘못이었고, 그것들이 일제히 곪아터져 지금의 상황이 된 것이다. 불행에 비관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자무카는 속으로 다짐했다. 마침 2차 내성문이 열리며 아란이 헐레벌떡 뛰어 왔다.

"소신 아란, 대추장을 뵙습니다!"

놀라 보이는 와중에도 그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오래간만이군, 아란."

자무카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대, 대추장! 어찌된 일입니까? 그 꼴은…?"

"아미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

당황한 듯 굳어있던 아란의 얼굴이 이내 지독한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 자식이 기어이 대추장까지!"

그리고는 자무카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신, 아란! 반드시 반역자 아미르를 참하고 그 목을 대추장께 바치겠습니다!"

"……고맙군. 여정이 고되어 잠시 쉬고 싶다. 자세한 설명은 안에 들어가서 해도 되겠는가?"

"무, 물론이옵니다! 이쪽으로……."

아란이 팔을 뻗으며 그를 안내했다.

두 번째 성문을 통과하자, 성문이 스르륵 내려와 닫혔다. 아란이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본성까지는 조금 걸립니다. 마차를 대령할 터이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알겠다."

아란이 헐레벌떡 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자무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낮이 저물고 성 안은 어두웠다. 멀리서 마을의 불빛들이 드문드문 보이는 게 전부였다.

몸이 지쳐있어 그런지 살짝 현기증이 났다. 긴장이 풀리고 안도감이 들자 격한 피로감 또한 몰려들었다. 그저 어디든 몸을 기대어 다리를 쉬게 하고 주린 배를 채우고 싶었다.

'살긴 살았구나.'

문득 자신을 탈출시키기 위해 희생한 루그릭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네 복수는 반드시 해주겠다, 루그릭.'

자무카가 복수를 결심하며 이를 갈고 있는 바로 그때.

화르륵!

자욱한 어둠 속에서 횃불이 고개를 불쑥 들었다.

그것을 신호로 횃불들이 주위로 빠르게 퍼져나가며 불쑥 불쑥 나타났다. 어두컴컴했던 주변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하며 주위가 분간이 되었다.

어느새 자무카는, 횃불을 든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자무카가 당황해서 외쳤지만 횃불을 든 병사들은 묵묵부답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저벅 저벅.

그때 어둠 속에서 차분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은 질서정연하게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아, 반갑습니다, 자무카님."

어둠을 뚫고 걸어온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히죽 웃고 있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자무카의 입이 쩍 벌어졌다.

"너, 너는……!"

자무카의 목소리가 크게 떨렸다. 그의 정체는 다름아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드 폴렌티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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