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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벨. 저번에 내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됐어?'
'아, 다른 나라 상회를 시켜서 아로게쓰에 물건을 전달한 거 말이야? 시키니까 하기야 했는데, 그런 뻘짓은 왜 하란거야?'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한 대비책.'
'흥, 또 나왔다! 둘러서 말하는 나쁜 버릇.'
바얀을 비롯한 아로게쓰의 주력이 전부 당했다.
로드가 생각하기에, 이제 아로게쓰에게 남은 수는 천혜의 요새 풋힐랜치에서 백제군을 상대로 버티는 것뿐이다.
로드는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로게쓰로 넘어왔다. 무엇을 숨기겠는가, 로드의 목표는 처음부터 자무카였고, 멸망 보너스였다. 물론 백제에게 알린 '출진의 명분'은 선광과 앞서 이야기 했던 세 개의 영지 중 한 곳을 차지하기 위함이라고 일러두었다.
로드가 세운 계획은 먼저 백제군을 이용해 풋힐랜치의 요새가 무너지도록 만들고, 위기에 빠진 자무카가 그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하나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 구멍이 바로 '탑승용 연'이었다. 유니벨을 통해 풋힐랜치로 향하는 유나이티드 상회에 접촉한 다음, 돈을 지불하고 그 연들을 풋힐랜치로 운반해 두도록 했다.
그렇게 자무카가 풋힐랜치를 탈출한다고 하면,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하나 남은 거점 영지인 '플랫랜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 숨어 있다가 자무카를 잡는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다.
그런데 중간에 변수가 하나 생겼다.
로드가 막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가고 있는 중에, 구세력과의 세력 다툼에서 패한 아란의 신세력이 수도를 벗어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로드는 어쩔 수 없이 근처의 숲에서 매복해 있다가 플랫랜치로 들어가려는 아란군을 격멸한 다음, 플랫랜치를 차지할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아란이란 녀석은 수도에서 쫓겨났다고 했지. 흐음, 뭔가 앙심을 품고 있지 않을까?'
로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파이를 보내 아란과 대화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아란은 스파이의 목을 칠 수도 있었지만, 의외로 순순히 로드의 연락을 받아들였다. 곧 두 사람은 통신 수정구를 통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어비스의 왕 로드라고 합니다."
"……검은이리족의 족장 아란입니다."
아란은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던 지 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외네요. 연락을 받아주실 줄 몰랐습니다. 언더하임에서의 전쟁 때문에 우리를 좋지 않게 볼 줄 알았는데……."
"딱히 어비스를 적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란이 말했다.
"애초에 남의 터전에 먼저 쳐들어간 건 우리인데, 왜 우리가 그쪽을 먼저 미워하겠습니까? 백제는 조금 증오스럽긴 하지만, 어비스에는 별 감정 없습니다."
로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했다. 이 녀석, 정말 아로게쓰 사람 맞아?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로드는 여기서 잠시 고민했다. 아로게쓰와의 세력 싸움에서 밀려난 신세력. 풋힐랜치에 잠복해있던 스파이의 정보에 따르면 아란의 신세력은 무조건적인 전사의 결투 중심의 문화에서 벗어나 상식적인 아로게쓰 사회를 건설하자! 라고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이번에 로드가 파고들어갈 부분 또한 그것이었다.
"소문을 들으니 세력 싸움에 밀려 풋힐랜치에서 쫓겨나셨다고 하더군요."
아란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의 반응을 캐치한 로드는 둘러말하는 게 아닌,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소문이 좀 악질적이더군요. '입만 산 전사, 아란.' 이라고."
"크아아악! 빌어먹을!"
아란이 버럭 소리질렀다. 주위의 사람들이 움찔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이 나라 국민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바보 천치입니다! 그렇게 고생을 해서 만들어 놓은 수도 내 지지권들이 결투 한 번 졌다고 전부 등을 돌리다니요! 힘이 강한 게 무슨 대수입니까? 힘이 약하면 무조건 복종해야만 합니까? 이런 문화를 가진 나라가 정녕 나라인지 모르겠습니다!"
툭 치니 푸념이 우수수 쏟아졌다. 로드는 십분 째 수정구로 그의 한 어린 불만을 들어야만 했다. 아로게쓰의 체제에 대한 아란의 분노는 로드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제대로 악이 받힌 모양이었다.
'그냥 이쪽 병사들로 몰살시켜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잘 하면 써먹을 구석이 나올 것도 같군.'
그의 푸념이 길어지기 전에 로드가 재빨리 말했다.
"다행이군요. 그 말을 믿고 제안 드릴게 있습니다."
아란이 말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로드는 조금 뜸을 들이는 척 망설이다가 이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 드려서 이제 아로게쓰에는 가망이 없습니다."
"이깟 나라! 처음부터 가망이 없었습니다! 백제가 성 안에 있는데 뭐요? 요격을 나가자고? 뇌도 근육으로 찬 멍청한 새끼들! 그래 놓고 반대하니까 또 뭐? 전사의 결투로 결정해? 하, 참나! 이런 나라는 그냥 빨리 멸망하는 게 답입니다!"
또 시작됐다. 로드는 그의 푸념을 들으며 기다렸다가 빈틈을 노리고 치고 들어왔다.
"하지만 나라의 기득권자들이 쓰레기들이라도, 죄 없는 국민들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아란의 입이 우뚝 멈췄다.
"까놓고 말하죠. 나는 대추장인 자무카를 잡길 원합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신다면……."
로드가 아란의 반응을 보며 말을 이었다.
"플랫랜치에 아로게쓰 시민들의 자치권을 드리겠습니다."
"……."
반응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란의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말씀하신 자치의 범위는 어느 정도로?"
"물론 저희 어비스의 영토로 귀속되게 됩니다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나 법률에는 일제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독자적인 권한을 드리죠. 플랫랜치에 나오는 밀이나 보리 또한 강제로 수탈하는 게 아닌,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구매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 쪽 국민들의 약탈이나 범죄 행위도 일제 금하며, 동등한 국민으로 대우하도록 하지요."
듣는 아란의 입장에서는 로드가 상당히 양보해 주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었다. 사실 어비스라는 나라 자체가 법의 힘이 그리 강하지 않아서, 그들만의 관습법을 존중해주겠다는 약속을 해주는 건 로드 입장에선 간단했다. 게다가 어비스라는 나라 자체가 이미 다민족, 다문화의 나라이고 서로 존중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를 받아들이는 데는 최고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고심 끝에 아란은 승낙했다. 그의 판단으로는 이제 아로게쓰의 멸망은 기정사실화되어 있으며, 그렇다고 백제의 통제를 받는 것은 싫다. 로드가 내건 조건 또한 항복하는 것 치고는 괜찮은 편이었다.
그렇게 로드와 아란의 신세력은 손을 잡았고, 로드는 플랫랜치에 무혈 입성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지만 어렵지 않게 해결했다. 이제 준비는 완벽하다.
자무카가 로드가 준비해 둔 연을 타고 도망쳐 나온다면 플랫랜치 밖에 올 곳이 없다. 그가 빠져나올 상황만 만들면 되는 것이다.
로드는 선광에게 자무카의 지지도를 깎아 내릴 계략을 알려주었고, 선광은 그대로 실행하였다.
백제가 요새를 무너뜨리던, 가신들이 반란을 일으키던, 자무카가 탈출할 확률과 그렇지 않고 끝까지 풋힐랜치에 남아 싸울 확률을 비교해 본다면, 로드는 전자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냥 백제가 자무카를 잡아버린다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렇게 로드는 플랫랜치에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그리고 상황은 로드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자무카는 반란을 일으킨 가신들에게 쫓겨나 도망쳤으며 결국 이 플랫랜치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
"……로드!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냐!"
자무카가 경악하여 물었다.
그때 빙그레 웃는 로드의 옆으로 아란이 걸어 나왔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본 순간 자무카는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아란! 네, 네놈이 감히 나를 배신했느냐!"
"……."
아란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벌레를 보듯 자무카를 응시할 뿐이었다.
"……이 지경이 되고도 아직도 대추장 대접을 받으려 하십니까?"
"뭐, 뭐라?"
"저도 처음엔 당신을 존경했습니다. 그 빌어먹을 전사의 결투를 하지 않고도, 족장들을 다독여 설득할 줄 알고, 그 뜻이 달라도 끌어안을 줄 아셨으니까요. 그런데 대추장이 된 이후로는 왜 그렇게 변해버리셨습니까? 입버릇처럼 복종! 복종! 마음에 안 들면 소통을 거부하고, 방에 처박혀 여색에나 빠져 허우적대셨죠. 전형적인 권력에 물든 폭군의 모습이었습니다."
"……감히!"
두 사람의 분위기가 가열되자 로드가 웃는 얼굴로 박수를 쳤다.
"자, 자, 연회 이후론 처음이죠? 자무카님. 이렇게 또 뵙게 되네요."
"……로드! 그 일기토 모략을 짜낸 것도 네놈의 짓이었냐?"
자무카가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로드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두 저의 각본이었죠."
"…내가 여기로 올 건 어떻게 예상했지?"
"그거야 너무 당연하지 않나요?"
로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제가 본 자무카님은 기본적으로 야심가이십니다. 어디 산골짜기에 숨어서 풀뿌리를 뜯어 먹으며 감 떨어지기를 기다릴 위인은 아니시지요. 다른 나라에 가면 바로 죽임을 당할테구요. 결국, 재기하려면 어떻게든 거점 영토를 손에 넣고 세력이란 것을 갖추어야 합니다. 자무카님은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 것처럼 생각했겠지만, 사실 선택지는 애초부터 하나밖에 없었던 거죠."
"……."
자무카가 입술을 으득 깨물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완패였다.
"이보게, 로드."
"네."
자무카가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날 살려주게."
"……예?"
너무나 뜬금없는 요청에, 로드가 눈을 깜박거렸다.
"이 플랫랜치를 내게 주면, 즉시 자네의 속국으로 들어가겠네.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하겠네! 공격하라면 공격하고, 병력을 보내라면 보내고, 식량도 달라는 대로 주겠네. 자네도 멸망 보너스 같은 부가이윤을 챙기는 것보다는, 아로게쓰라는 나라 자체가 온전히 자네를 돕는 쪽이 더 낫질 않겠나?"
로드가 당혹스런 미소를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에서 일말의 망설임을 보았는지 자무카가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게! 자네를 위해서라면 정말 뭐든지 하겠네! 나는 욕심이 없어. 그저 복수를 하고 싶을 뿐이라네!"
로드가 혀를 끌끌 차더니 그를 노려보았다.
"저도 당신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한 사람입니다. 사실 그 복수의 대상에는 저도 포함되어 있는 거겠죠?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 입장에선 위험 요소를 내버려둘 이유가 없네요."
로드가 오른팔을 뻗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죽어주셔야겠습니다."
로드의 팔을 신호로, 포위해있던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우르르 자무카에게 달려들었다.
'쯧. 역시나 내 연기 따윈 먹히지 않는 건가.'
피식 웃어 보인 자무카의 무릎이 일순간 펴졌다.
부우웅!
그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정면에 달려오던 병사의 머리를 손날로 내리쳤다. 콰앙! 병사의 머리가 땅에 처박혔다. 자무카는 착지와 동시에 휘둘러진 검을 피하며 팔꿈치를 펼쳤다.
콰직!
팔에 부딪친 병사의 몸이 종잇장처럼 날아갔다.
"죽어라!"
등 뒤에서 창이 기습적으로 찔러 들어왔다. 자무카는 허리를 젖혀 피하면서 한 손으로는 창대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병사의 몸이 순간적으로 끌려옴과 동시에 자무카가 한 발짝 전진해 박치기를 가했다.
빠악! 요란한 타격음이 울리며, 병사가 쥐고 있던 창에 힘이 빠졌다.
자무카는 그대로 창을 뺏어 휘둘렀다.
부웅! 부웅! 창날이 대기를 가르며 소름 끼치는 곡선을 그리자 주위의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창의 현란한 움직임이 병사들을 현혹해 베어나갔고, 다가오는 공격들은 절묘하게 몸을 꺾거나 스탭을 밟아 피해냈다. 창과 몸이 완전히 따로 노는 듯한 조화, 공격과 회피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묘기에 병사들은 손쓸 도리 없이 나가떨어졌다.
'…하, 미친! 지쳐있어도 B급은 역시 B급인가.'
어찌됐건 전투 능력만으로 신에게 대리 플레이어로 뽑힌 인물이었다. 로드도 그의 무예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로드가 팔을 휘둘러 신호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