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한 왕국의 월례회의 -->
어비스 왕궁 회의실에서 정례 회의가 열렸다. 메이드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음료와 음식들을 나르고 있었다.
가신들도 속속 도착했다. 클랜장들이 전원 참석하는 대단한 규모는 아니었고 로드, 이브, 유니벨, 베아트리체, 피닉스, 하버트, 애니록스, 아란. 이렇게 8명의 구성으로 간단히 이루어졌다.
"그럼, 안건이 있으신 분은 손을 들어 발언해 주시길 바랍니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이브가 손바닥으로 보드판을 두드리며 회의 시작을 알렸다.
"저요!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버트가 손을 번쩍 들며 일어났다.
"폐하를 개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쟤 입 좀 막아라."
로드가 이마를 감싸며 한숨을 쉬었다.
"아니, 폐하! 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입니까?"
하버트가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호소하듯 말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껏 우리 어비스에 얼마나 많은 위기가 있었습니까? 폐하께서 독 뭍은 단검에 맞아 중독되시고, 폐하께서 복부를 얻어맞아 기절하시고, 폐하께서 검에 찔려 팔에 구멍이 나시고……."
"아니, 어찌된 나라의 위기란 게 전부 내 수모밖에 없어?! 누가 들으면 평소에 내가 맞고 다니는 줄만 알겠네!"
로드는 잠시 열을 식혔다. 이대로는 하버트에 말발에 휘말리는 것 같아 잠자코 태연함을 연기했다.
"백날 말해봐야 그런 안건이 여기서 받아들여 질 리가 없지. 포기해."
"베아트리체 단장!"
하버트가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의 주전부리를 축내고 있는 베아트리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과자를 입에 문 채 고개를 갸웃했다.
"잘 들으셨죠? 그동안 폐하께서 얼마나 많은 위기를 겪으셨습니까? 폐하의 안위를 책임지는 단장 또한 이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녀가 충격 받은 얼굴로 먹던 과자를 입에서 툭 떨어뜨렸다.
"…내 잘못 …이었어?"
"물론이죠!"
'야 이 미친놈아!'
그녀가 없었더라면 위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옆에 앉은 베아트리체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로드가 재빨리 그녀를 달래주려는데…….
"그런 의미에서! 제 안건에 동의하시면 폐하를 강철 피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게 목적이었냐!"
그녀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를 잃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단장."
하버트는 마치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하는 뱀처럼, 교활한 혓바닥을 놀렸다.
"……."
그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애원하듯 로드를 바라보았다.
"……개, 개조 당해 주세요. 주인님."
"싫어! 아무리 베아의 부탁이라 해도 그건 싫어!"
쾅! 쾅!
"아, 정말 시끄럽네! 바보 과학자!"
맞은편에 앉은 유니벨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네놈의 그 입이나 피떡으로 개조해 줄까? 앙? 진지하게 할 생각 없으면 네놈의 그 빌어먹을 연구소로 꺼져!"
'오오! 잘한다, 유니벨!'
로드가 감명 받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역시 소녀의 몸으로 클랜장들을 모조리 휘어잡은 실세는 달라도 뭔가 다른 것인가.
그러나 하버트는 주눅들지 않고 한마디 했다.
"제 안건에 동의해 주시면 가슴 발육에 좋은 약품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아, 찬성."
"야 이 새끼들아!"
로드가 이마를 짚었다. 이 무슨 나사 빠진 왕실 회의란 말인가. 그 와중에 로드의 시선이 잠시 유니벨의 특정 신체 부위로 향했다.
"그래도 빈유라는 자각은 있었군."
"누가 빈유란 거야!"
그녀가 꽥 소리질렀다.
"하지만 빨래판 가슴이라도 언제나 사내놈들의 수요는 있기 마련이니, 본인의 신체적 개성에 만족하고 살아가도록."
"뭐? 대가리가 빨래판에 박혀 세탁되고 싶냐?"
두 사람이 투닥거리고 있는데 하버트가 옆에서 '후후후후!'하고 사악한 웃음소리를 냈다.
"자, 어쨌거나 이걸로 찬성 세 표입니다, 폐하. 앞으로 몇 명만 더 설득하면……."
"시끄러워! 왕의 권한으로 이 안건은 폐기한다."
"…예?"
그때 하버트가 지은 표정은 실로 나라 잃은 애국지사의 그것이었다.
"아, 안됩니다! 이럴 순 없어요. 이건 독재입니다!"
"하버트 소장?"
마침내 인내심이 한계가 달한 이브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입 다물고 자리에 앉으세요."
"……예."
하버트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굴복했다. 역시 이브. 유일무이한 하버트의 천적다웠다.
"장난은 여기까지만 해주시고, 이제 진지한 안건으로 넘어가죠."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신설하는 학교 있잖아. 교사 선임 문제는 어떻게 됐어?"
로드가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아로게쓰 출정으로 잠시 손 놓고 있었던 문제였다.
"폐하께서 오래 걸리실 것 같아 제가 임의로 처리해 두었습니다."
"…응? 그걸 처리했다고? 어비스에서 교사를 할만한 사람은 없을 텐데……."
"더 인텔리전스에서 맡기로 했습니다."
'오!'
더 인텔리전스는 종교 집단이긴 하지만, 신이 아닌 지식 그 자체를 숭배하는 독특한 교단이었다. 로드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수가 있었구나!
"교단에서도 학교를 설립한다는 말에 무척 반기는 기색이더군요. 그리고 기꺼이 교사직을 맡아주기로 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지식을 전파하는 것이 교단의 가르침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요. 또 신도들 모두가 상당한 수준의 지식인들이니 교사로서의 자질 또한 문제없을 겁니다."
"…너 혹시 천재 아니니."
역시 내정에 관해서는 이브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로드는 생각했다.
"그럼 이 문제는 일단락된 것 같으니 다른 안건으로 넘어가죠."
"나! 나!"
유니벨이 손을 들었다.
"네, 재정관. 말씀하세요."
"테라 수출 건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어."
그녀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유나이티드를 중심으로 한 상인 연합놈들이 또 테라 매입 값을 낮췄거든."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마법 무구의 재료가 되는 테라는 대륙 전역에서 발견되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소량만 채굴되기 때문에 값비싼 광물에 속했다. 그런데 테라의 판권을 쥔 상인들이 담합하여, 테라 광산으로부터 매입하는 테라의 가격만 동일하게 조정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인들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어비스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채굴한 테라를 팔아서 바로 바로 식량을 사들여야 했고, 나라에서 테라 원석을 보유하고 있어봤자 가공 기술이 없으니, 팔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시세보다 다소 낮은 가격으로 테라를 수출해오던 중, 이번에 상인들이 또 가격을 낮췄다는 것이다.
"이런 나쁜 자식들!"
잠자코 듣고 있던 피닉스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완전히 호구 잡혔네. 이대로는 놈들이 계속 테라 값을 내리……."
"테라파는 우리 조폭클랜에서도 최약체! 그런 녀석들을 괴롭히다니! 대체 어느 파의 소행인 거요? 큰형님!"
"……대화를 해도 문자가 서로 통하질 아니하니 저 새낄 이길 수가 없도다."
로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래. 그럼 하나 물어볼게, 유니벨. 왜 상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테라 매입 값을 조절해도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한 걸까?"
"그야 그동안 왕실이 개호구였으니까?"
그녀가 당당하게 말했다. 저 표정은 마치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니?'라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아니, 좀 더 구체적인 이유."
"흐응, 이유야 많지. 그쪽 상인들이 테라 유통권을 꽉 쥐고 있기도 하고, 우리는 손해를 좀 보더라도 급히 식량을 마련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또, 우리는 테라를 보유하고 있어도 별 쓸모가 없잖아?"
"그래! 내가 주목하는 건 그 마지막 부분이야."
로드가 손가락을 척 올리며 말했다.
"우리는 항상 천연자원인 원석을 캐서 바로 팔아넘기는 1차 산업만 해왔지. 왜냐면 가공 기술이 전무했으니까. 하지만 1차 산업으로 만족하면 결과적으로 돈이 안 돼! 지금처럼 중간 상인들에게 휘둘릴 수도 있고 말이지."
"…흐응, 그래서?"
"그러니까 자원을 우리의 기술로 가공해 파는 제조업을 하는 거야! 그냥 강철을 파는 것 보다 강철을 무기로 만들어 팔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어."
"요컨대 무기 산업을 하자는 거네."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농업으로 살아남기 힘든 땅이라면 다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된다. 제조업은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이었다. 만약 강철 한 덩이가 50실버라고 치면, 대장장이를 거쳐 만들어진 무기는 그 10배 이상으로 팔린다. 명작으로 불리거나 프리미엄이 붙는 무기는 달라는 게 값이다. 그저 같은 50실버 분량의 강철을 써서 만들었을 뿐인데 말이다. 부가가치가 차원이 달랐다.
유니벨이 눈을 감고 팔짱을 끼며 '으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물론 그게 가능하면야 나도 좋지. 무기야 항상 수요가 많고, 다른 상인들을 거치지 않더라도 급히 필요한 국가에 직매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한텐 그런 기술이 없잖아?"
"후후, 그래서 과인이 아로게쓰에서 노호준걸과 대장장이들을 빼온 것이 아니겠느냐."
로드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지금은 대장간을 짓는 중이라 안 되겠지만, 노호준걸과 대장장이들이 자리를 잡으면 우리도 본격적으로 무기를 만들어 팔 수 있을 거야. 대장장이의 수도 계속 늘릴 생각이야. 노호준걸이라는 이름값으로 대륙의 대장장이들을 끌어들이고, 어비스 출신 대장장이들도 양성하는 거지. 앞으로 대륙에 수많은 전쟁들이 일어날 테니 무기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거야."
"그럼 그 대장간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어떻게 해?"
"그건 재정관인 네 마음이지.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로드의 물음에 그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면야 호구 탈출 해야지. 테라는 팔지 말고 쌓아둘 거야. 놈들이 다시 시세를 올리면 좋고, 아니어도 이젠 우리 쪽에서도 쓸모가 있을 테니까."
"나도 동감이다."
"응."
그녀는 자신의 안건은 끝났다는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이브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아요. 이제 제대로 된 회의같네요. 그럼 이번엔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브가 서류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우리의 고질적인 문제인 식량 문제에 관한 겁니다."
식량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로드가 움찔했다.
"뭐, 뭐야? 저번에 다른 나라들로부터 받아온 거, 전부 다 쓴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이번에 언더하임으로 유입된 사람들이 꽤 많아서요.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예요."
"이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인가……."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건 미래의 문제에 대해서예요. 인구는 점점 늘어나는데 식량을 확보할 곳이 마땅치 않아요. 그렇다고 지금처럼 식량 수입에만 의존하면 마틴의 유산으로 풍족해진 국고도 점점 바닥이 보일 거예요."
유니벨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또, 유나이티드 같은 곳에서 식량 수출을 전면 중지하면 우린 꼼짝없이 굶어 죽어야 해."
"맞아요. 좀 더 안정적이고, 정기적인 식량 획득 방안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