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재 게이머 -->
- '아크 더 라운드'님이 1:1 대화를 종료하셨습니다.
'……하아, 대체 뭐야? 이 종잡을 수 없는 놈은.'
"뭘 보고 대화하는 거야?"
유니벨이 고개를 배꼼 내밀며 물었다.
"우왓! 깜짝이야!"
"……이미 꺼진 수정구잖아?"
"아, 아니 방금 까진 켜져 있었어."
로드가 재빨리 둘러댔다. 유니벨이 수상한 표정으로 그를 한번 쏘아보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됐으니까 빨리 준비해. 퍼들스퀘어를 차지하기 앞서 카사르부터 상대해야 할 것 같으니까."
*
플레이어가 차지하지 않은 빈 영토인 퍼들스퀘어를 두고 어비스와 카사르, 두 나라의 군대가 대치했다.
로드는 지휘를 위한 사전 작업부터 했다.
마침 퍼들스퀘어에 심어둔 스파이가 성벽 위로 올라간 모습이 보였다. 로드는 스파이의 눈을 발동시켰다. 그의 오른쪽 눈이 푸른 마력으로 물들며 시야의 한편이 스파이가 보는 광경이 되었다.
스파이들은 특화 연구인 '천리안' 효과를 받고 있어 멀리서도 시야를 폭넓게 살필 수 있었다. 로드는 지상에서 보는 자신의 시선과 높은 성벽 위에서 망원경처럼 들여다보는 스파이의 시선 모두를 운용할 수 있었다.
'좋아. 다음은…….'
로드는 자신의 바로 뒤에 서있는 기수들을 체크했다. 이 네 개의 깃발을 조합하여 병력을 지휘할 수 있었다. 거기에 주력인 네 명의 영웅들에겐 '마력 신호 팔찌'를 지급해 주었다. 통신 수정구처럼 지휘관 창에 연동되는 장비로서 로드가 지휘관 창으로 팔찌의 색깔을 변경할 수 있었다. 빨강색이면 '퇴각' 파랑이면 '돌격' 등 미리 정해준 명령이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병력의 컨트롤은 자유자재로 가능했다. 로드가 베아트리체를 보며 물었다.
"베아야. 빨강은?"
"퇴각이요."
"초록은?"
"이능력의 사용이에요."
"잘했어."
로드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베아트리체가 '헤헤' 기분 좋게 웃었다.
"흥, 저런 단순 암기 가지고 뭘."
유니벨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로드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니벨, 파랑은?"
"돌격이지."
"보라는?"
"포위! 야, 지금 날 시험하는 거야?"
"오, 잘했어. 머리 쓰다듬어줄까?"
그녀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중지 손가락을 내밀었다. 반응이 재미있어서 로드가 소리 내어 웃었다.
'자, 이걸로 준비는 끝났고…….'
아크의 진형을 바라보며, 로드는 생각에 잠겼다.
지형은 전략적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완벽한 평지. 황무지라서 화공도 불가능하다. 오로지 군대 본연의 전력에 따라 승부가 갈릴 것이며, 단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양 측의 전력을 비교하자면 척 봐도 어비스의 우위였다. 어비스의 병력은 2500. 카사르의 병력은 1500. 물론 병력의 질을 따지면 카사르 쪽이 더 좋긴 하겠지만 이런 평탄한 개활지는 수가 더 많은 쪽이 유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웅진의 차이가 컸다. 어비스는 B급 무력형 영웅이 둘이나 포함되어 있는 반면, 아크는 주력이 아닌 C, D급으로 이루어진 2군 영웅진이다.
게다가 이곳은 어비스의 영토. 패주할 시 퇴각도 그리 용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왜 도망치지 않지?'
아크는 진행 중인 전쟁과는 별개로, 소수의 병력을 운용해 퍼들스퀘어를 기습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로드가 가진 정보의 구멍을 파고든 것도 칭찬할 만 했다.
그러나 결국 로드에게 들켜버렸고, 병력의 전력 차가 크니 일단 후퇴하는 게 옳다. 그런데 아크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싸움을 걸어왔다.
'……어째서일까.'
생각해보면 아크는 언제나 도전자의 입장에서 시작해 강자들을 꺾고 위로 올라가는 것을 즐겼다. 이것도 그와 같은 도전 정신인가? 아니면 그저 자신이 있는 건가?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가 지어졌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몸을 타고 흘렀다.
'기대돼서 미칠 것 같네.'
그저 토착 세력뿐인 영토를 확보하려는 가벼운 마음으로 왔지만, 얼떨결에 그 대단하다는 아크와 병력을 맞대고 선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이번 전쟁은 '나의 군대'로 동경하던 천재 프로 게이머와 대결한다. 로드는 가슴이 터질 듯이 요동쳤다.
과연 내 실력이 진짜 프로를 상대로 어느 정도로 통할 것인가! 로드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너무 흥분했다. 지휘관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냉철해야 한다. 로드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아크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힘으로 맞부딪칠 수 밖에 없는 지형이고, 정면 대결이라면 국가의 모든 전력을 끌어 모은 내가 카사르의 2군에게 밀릴 이유는 없다. 병력의 우세를 앞세워 밀어붙이면 그만일 뿐. 나는 그저 변수라는 잔가지들만 쳐내고 묵직하게 밀어붙이면 돼.'
생각을 정리한 로드는 병력을 4개 군으로 재배치했다.
로드와 베아트리체가 지휘하는 중앙군 1000명.
유니벨이 지휘하는 우익 500명.
아란이 지휘하는 좌익 500명.
마지막으로 피닉스가 이끄는 경기병 부대 500명.
총 2500명의 군세였다.
반면 아크는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카사르군의 병력을 나누지 않고, 하나의 군세로 운용했다. 1500명이 견고한 방진을 이룬 모습이었다.
"좋아, 가자."
뿌우우우!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뿔나팔이 울려 퍼졌다. 로드는 우선 피닉스의 경기병 부대를 출군 시켰다.
모루와 망치 전법. 중앙군과 좌, 우익의 보병을 모루로 삼아 튼튼히 버티고, 경기병을 망치로 삼아 두들기는, 심플하지만 효과적이며 인류 역사상 가장 숱하게 쓰인 전술이었다.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정석적으로, 침착하게, 우위만 점한다. 그러면 승리할 것이다.
후우우우우우웅!
'큭!'
로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멀리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카사르 진형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로켓처럼 쏘아 올려지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저게 뭐야?"
"마, 마법?"
웅성거림이 일었다. 끝을 모르고 하늘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화염구가 이내 곡선을 그리더니 그 머리를 아래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쇄애애애애액!
시커먼 검은 꼬리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지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이, 이쪽으로 떨어진다!"
"피해!"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진형도 무시한 채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로드도 드레이크를 몰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하늘의 화염이 가까워지는 순간 머리 쪽이 잠시 뜨거워졌다. 그리고.
꽈아아아아앙!
진형의 정중앙에 불의 징벌이 떨어졌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시뻘건 화염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라 병사들을 집어삼켰다.
실로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헤에?"
아크가 씨익 웃었다.
"다들 잘 피하네. 너무 잘 보이게 던져 버렸나?"
"충분해요. 아크."
초록 머리의 소녀, 릴리가 이마의 땀을 소매로 훔치며 말했다.
"과시가 목적이었으니까요."
"응, 그렇지."
아크는 이 공격으로 군의 수를 줄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그저 다음 계획을 위한 포석. 즉, 적군의 머릿속에 저런 거대한 것이 내 위로 떨어질 수가 있다는 공포를 박아두는 것이었다. 전쟁은 기세의 싸움이기 전황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수단들은 무척 중요했다.
아크가 다시 손바닥을 펼쳤다.
화르르륵!
그의 손바닥에 성냥불 같은 작은 불꽃이 떠올랐다. 그것은 점점 주위의 마력을 빨아들이며 크기를 키워갔다.
"이제 천천히 가지고 놀아볼까?"
"하여간 악취미라니까요. 연설은 할 거예요?"
"전쟁은 이미 시작했으니까, 짧게 하지 뭐."
릴리가 옆으로 비켜서고, 아크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제군들."
확성 구슬을 통해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련과 투쟁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그대들의 흘린 구슬땀에 비하면 이것은 씻겨 내려가는 진흙탕일 뿐일지니, 물러서지 마라. 역량을 결집시켜라. 적에게 대항하라."
그의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가 대기를 타고 넓게 울려 퍼졌다.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전체. 나 자신을 배제하고 전체의 일부로 움직여라. 그저 한 자루의 검이 되어 눈앞의 적에게만 집중하라. 그대의 옆에는 동료가 있고, 뒤에는 짐이 있노라. 짐이 그대들의 머리가 되어 주겠다. 지시에 복종하라. 그리고 짐을 믿고 앞만 보아라!"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정적이 흘렀다.
아크가 근엄한 표정을 풀고는 본래의 장난스런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는 모두를 쭉 둘러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믿고 있어. 나의 기사님들."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와 대기에 파문을 일으켰다.
연설을 마친 아크가 앞으로 걸어 나가며 병사들 한 명 한 명 어깨를 두들기며 사기를 돋우어 주었다. 그는 병사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친절하게 안부를 물었다. '자네는 다리도 불편할 텐데 고생이 많다.' '어머니의 몸은 이제 괜찮은가?' '다음에 언제 또 같이 럼주 한잔 할 텐가?' 사소한 이야기들이었지만 병사들의 개인사정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아크의 행동에 병사들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아크가 병사들을 지나쳐 앞으로 나오자 그의 가신 4명이 무릎을 꿇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디베어 양, 제레인트 양, 보호트 군, 아론 양. 모두 일어나."
그들 모두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으며 아크에게 경례를 취했다.
"어비스 정도야, 간단히 요리해보자구."
*
'……이 정도의 위력이라니.'
로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군 병사들은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혼란에 빠져버렸다. 지휘관 창의 알림에는 사기가 얼마 떨어졌다는 등의 상태 메시지들이 떠올라있었다. 부관들이 악을 지르며 흥분한 병사들을 통제했다.
로드는 곧바로 지휘관 창을 움직여 아크의 스테이터스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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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크 더 라운드
소속 : 카사르 왕실
직위 : 왕
종족 : 인간
무력등급 : (B)
통솔등급 : (B+)*
지략등급 : (B)
정치등급 : (B)
B+급 통솔형 클래스 입니다.
고유능력 : 홍염의 계승자.
화검(火劍)으로 유명한 카사르의 기사 가문 출신인 아크는 유명한 문제아였습니다. 화염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폭주하기 일쑤였으며, 검에 불꽃을 입히는 기본적인 테크닉조차 불가능했었습니다. 그러나 컨트롤이 불가능하다며 묻어두었던 화염의 권능을 완전히 개안하는 순간, 가문의 돌연변이가 아닌 불의 축복을 받은 존재였음을 모두가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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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로드의 간단한 감상이었다.
모든 등급이 B에 통솔은 무려 B+. 역시 종합력으로 놓고 본다면 의심할 여지없는 세계 최고의 게이머였다.
'게다가 고유능력의 설명만 봤을 때는 그냥 공격형 능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건 그냥 메테오를 떨어뜨리는 격이잖아?'
저 광범위 고유 능력을 몇 번이고 쓸 수 있다면 곤란했다. 경계할 수밖에 없는 능력이었다.
어느 정도 혼란이 가라앉자 로드는 망설일 것 없이 전 병력을 일제히 진군시켰다. 다시 저 거대한 화염구가 날아와 병사들의 사기를 꺾어버리기 전에 전투에 들어가야 했다.
보병들이 갈팡질팡 하던 사이 부지런히 기동하고 있던 경기병들은 적진의 후방을 거의 다 돌아갔다. 이걸로 양동의 그림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움직이는 건 어비스군만이 아니었다.
'아크도 병력을 움직이고 있어?'
가만히 정지해있던 카사르의 병력들이 후방으로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빠른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병사들의 동작이 절도 있게 척척 맞아떨어지는 모습에는 질서와 균형이 느껴졌다. 로드의 머리가 다시 빠르게 돌아갔다.
'도망가는 건가? 포위를 벗어나기 위해서?'
하지만 포위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기병들이 움직일 때 진작에 병력을 기동시켰을 것이다. 로드가 이끄는 본군의 움직임에 맞추어 물러나는 저 지시는 단순히 이쪽의 본군과 멀어지려는 의도로 보였다.
로드는 왼쪽 눈을 감고 스파이의 시야로만 카사르의 진형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아크의 손바닥 위로 불씨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고유 능력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군.'
로드가 외쳤다.
"진군 속도를 높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