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재 게이머 -->
"속도를 높여라!"
"빨리 빨리 움직여! 굼벵이들아!"
부관들이 복명복창하며 로드의 명령을 전달했다. 병사들의 움직임이 신속해졌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카사르군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가만 둘 수 없지.'
로드는 이번엔 궁병을 움직였다. 로드의 지시에 따라 기수들이 깃발을 흔들자, 궁병 부대에 배치된 부관들이 병력을 멈춰 세우고 사격 준비를 하게 했다.
"쏴라!"
"퍼부어라!"
궁병들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화살비가 하늘을 통과해 카사르 진형에 떨어졌고 병사들은 방패를 들어올려 막아냈다. 화살을 막아내느라 그들의 진군 속도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이쪽은 궁병이라는 확실한 우위가 있다.'
카사르의 국가 고유 능력인 '검의 나라'는 검을 쓰는 병종의 공격력을 대폭 올려주지만 원거리 공격수, 즉 궁수와 마법사들의 전력이 줄어드는 극단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나라의 문화 또한 '활'이란 무기는 소드맨들 중에서 성적 이하의 자들이 받아 드는 굴욕과도 같은 무기였으니, 궁병 부대는 낙제자 집합소나 다름 없었다. 그들의 자존감은 바닥을 기었다.
궁병이 워낙 약하여 아크 또한 궁병을 그리 많이 배치하지 않은 듯 보였다. 가끔 화살들이 몇 발 날아왔으나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조금만 더!'
이제 거의 다 따라붙었다. 화살 공격에 의해 아크의 병력은 움직임이 상당히 굼떠졌고, 이 틈을 타 어비스의 중앙군과 좌 우익이 적진을 감싸듯 들어왔다. 또한 후방에는 피닉스의 경기병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완벽한 포위였다.
'…그런데 어째서?'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너무 쉬웠다.
그 대단하다는 아크가 사방 포위를 너무 간단히 허용하는 것이 아닌가? 화살 때문에 움직임을 멈춘 게 아니라, 화살을 핑계 삼아 움직임을 멈추고 있는 느낌이었다.
로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나?'
로드는 찬찬히 아크가 쓸 수 있는 카드를 머릿속으로 짚어 보았다. 특히 제일 중요한 카사르의 국가 고유 능력.
첫 번째가 '검의 나라'.
두 번째는 '기사도 정신'. 사기의 감소를 막는 보정 효과와 상태이상 마법에 대한 저항력 추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불굴의 의지' 그 효과는…….
로드의 동공이 커졌다.
'설마……!'
어비스의 전군이 카사르의 병력들을 완전히 둘러싸는 형국이 되는 그 순간,
로드의 눈에 카사르 병사들의 몸에서 푸른 아우라 같은 마력의 흔적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 표정이 광기로 물들기 시작했다.
"날뛰고 와, 애들아."
아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두 진형의 선두들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쿠쿠쿠쿠쿵! 콰쾅! 콰직!
병사들이 충돌하며 병장기들이 요란한 울음소리를 뿜어냈다. 인간의 몸이 찌그러지고, 바닥에 깔리고, 뭉개져 짓밟혔다.
"크윽!"
"물러서지 마라!"
첫 번째 충돌에서는 두 군세가 동등해 보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난전에서 바로 그 차이가 확 드러났다.
촤아악!
촤아아아아악!
"젠장, 이 놈들 뭐야?"
"뭐 이리 강해?"
냉정히 말해 상대가 되지 않았다.
카사르의 병사들은 무거운 갑주를 입었음에도 날아다닐 듯 전장을 활보하며 검을 휘둘렀다. 어비스 병사들은 채 몇 합을 나누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역시나 인가.'
나가는 족족 바닥에 깔려나가는 아군을 바라보며 로드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카사르의 마지막 국가 고유 능력인 '불굴의 의지'는 적에게 완전히 포위당할 시 병사들이 '광분'상태가 되며 공격력이 대폭 증가되는 효과였다.
본래 이 국가 고유 능력은 개발자들이 퇴각 상황을 고려해 고안했을 것이다. 적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상황이라면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는 뜻. 패색이 짙은 병사들이 의외의 힘을 발휘하여 기적적으로 퇴로를 뚫고 도망치는, 그런 그림을 생각하고 디자인 했으리라.
그러나 아크는 일부로 적을 끌어들여 포위를 유도하고, 고유 능력의 발동 조건을 충족시켰다. 이곳은 엄폐물이 많은 숲이나 언덕이 있는 매복지가 아닌 개활지였고, 포위당하더라도 병사들의 구심점이자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아크의 존재로, 병사들은 사기의 하락 없이 상황을 신경 쓰지 않고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어비스의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병장기를 휘둘렀다. 숫자도 많고 적을 사방에서 포위한 만큼 진형도 우위일 터였다. 그러나 적은 무너지지 않았다. 카사르의 기사들은 정신없이 전장을 활보하며 검을 휘두르는 것 같으면서도 진형은 유지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아크의 의도대로 흘러갈 뿐이다.'
로드는 과감히 퇴각 결단을 내렸다. 퇴각을 알리는 깃발을 올리고 지휘관 창을 조작해 영웅들의 팔찌에 빨간 불이 들어오도록 했다.
"퇴각 명령이다!"
"후퇴하라!"
어비스의 병력들이 뒷걸음질 쳤다. 물론 적과 맞붙어 싸우는 와중에 갑자기 퇴각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카사르 병력들은 더욱 기세등등해져서 따라붙었고, 결국 어비스군은 적지 않은 사망자를 남긴 채 후퇴했다.
"잘했어, 놈들을 멀리 쫓지는 마."
아크가 통제했다. 이 순간에도 그의 손바닥에서는 불꽃이 꿈틀대고 있었다.
"놈들은 먼저 공격해올 수밖에 없으니까. 우린 그저 이 포지션만 고수하면 돼."
"…아크."
초록 머리의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왜 그래? 릴리 양."
"적의 지휘관은 바보? 왜 병력을 물린 걸까요?"
아크가 훗 하고 웃었다.
"그게 정답이야."
카사르군의 주력은 타 국가들의 일반 '검보병'에 해당하는 '카사르 솔져'로서, 검보병보다 비용은 많이 들지만 능력치가 더 우수하다. 거기에 백제의 싸울아비에 해당하는 값비싼 특화 병종인 '카사르 나이트'가 300명. 이 두 주력 병종은 현재 아크가 지휘관 창으로 집중적으로 수행한 '보병 관련 연구'의 효과를 적용 받고 있었으며, 아크 자신부터가 B+급 통솔형 영웅이라 막대한 부대 능력치 보너스가 병사들에게 부여되고 있다.
바로 여기에 병사들을 폭주시키는 '불굴의 의지' 효과까지 덧씌워진다면? 어비스의 병사들이 상대가 되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이대로 계속 싸웠다면 간단히 낙승을 거두었을 것이라고 아크는 생각했다.
'재밌네. 그래도 명색이 게이머 출신이라는 거지?'
카오스월드의 전쟁에는 변수가 상당히 많다. 그저 단순히 보병이 막고, 궁병은 쏘고, 기병은 뒤를 치는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세계에서는 기병을 발로 따라잡는 보병이 있을 수도 있고, 장창 부대를 돌진으로 뚫어버리는 기병이 있을 수도 있다. 하늘을 나는 비행 병종과 광범위 폭격이 가능한 마법사들도 존재한다.
마력이 있고, 고유 능력이 있고, 천인지적이 가능한 영웅이라는 존재, 그리고 특화 병종이라는 이능의 힘을 받는 특별한 병사들까지. 실로 '변수 덩어리'의 전쟁이라 할 만했다.
지구에서 진행됐던 베타 테스트에서는 전쟁 전문가나 현직 군 참모 등 전술에 능통한 사람들도 여럿 참여했으나 항상 게이머 출신들보다 저조한 성적을 내며 탈락했다. 가상현실 게임의 조작이 어려웠던 게 아니라, 그들은 기존의 상식적인 전쟁에 너무 얽매여 있어 변수를 대처하는 능력이 뒤떨어져있었던 것이다.
반면 게이머들은 게임을 진행하면서 수많은 도전을 받는다. 새로운 시련과 그것을 극복하는 힌트들이 끊임없이 투척되고, 게이머들은 그런 상황에 익숙해져 있다. 의외의 상황에 맞닥뜨려도 당황하는 게 아닌, 어떻게 이 새로운 상황을 써먹을 수 있을 지부터 고민하는 것이 게이머라는 인종이었다.
아크는 로드의 판단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양상을 조금만 더 지켜보자.'라고 생각하며 방관했다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판이 됐을 것이다. 기껏 따라잡아서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퇴각 결정을 내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나, 반드시 내려야만 하는 결정이었다.
'자아아? 하지만 퇴각을 해봐야 원점이야. 어떻게 할래? 로드 군."
*
퇴각 이후 로드는 영웅들과 부관들을 전부 한 자리에 불러모았다.
"보쇼, 큰형님! 왜 퇴각 명령을 내린 거요! 잘 때려눕히고 있었구만!"
피닉스가 뻐근한 팔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유니벨도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명령은 나도 이해가 잘 안돼. 적의 반격이 거센 건 알겠는데 굳이 퇴각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아? 그 이상한 화염이 언제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아니, 그대로 계속 싸웠으면 우리가 졌을 거야."
로드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카사르의 병사들은 적에게 둘러싸였을 때 이능의 효과가 발동해서 폭주해. 적이 너무 강해 보였던 것도 그 때문이야."
"……이능의 힘이었다고?"
에덴의 사람들에게 '이능'이란 개념은 제법 익숙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고유 능력, 그리고 누구나 몸에 가지고 있으며 훈련을 통해 다룰 수 있게 되는 '마력' 또한 이능의 일종이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이능을 보고 다루는 것이 일상이고 그들의 삶과 때려야 땔 수 없을 만큼 가깝게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능이라는 것은 정확히 말해, 에덴이라는 평범한 중세의 세계를 '카오스월드'라는 환상적인 주신전의 무대로 바꿔놓은 신들의 권능을 뜻했다. 카오스월드의 '시스템 어시스트'가 실세계인 에덴에서는 이능으로 대체된 것이다.
플레이어들이 쓰는 지휘관 창 또한 이능을 다루는 시스템으로서, 신의 힘을 휘두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이능의 힘이 사라진다면 에덴은 마법도 마력도 없는 평범한 중세 시대로 전락할 것이다.
로드는 가신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불굴의 의지'에 대한 부연 설명을 간략히 했다. 이 세계의 주민들은 '이능'이라는 힘에 큰 의문을 품지 않았다. 다들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주인님, 그럼 어떻게 해요?"
베아트리체가 물었다. 로드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병력이 좀 줄긴 했지만 우리가 우위라는 점은 여전해. 힘으로 밀어붙이자. 대신 이거 하나만 확실히 기억해."
로드가 가신들을 둘러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사방 포위'는 안 돼. 카사르의 퇴로는 무조건 만들어 놓을 것."
로드는 병력을 재편했다.
4개군을 좌익과 우익 단 두 개의 부대로 통합했다.
우익은 로드와 베아트리체가, 좌익은 유니벨과 아란이 맡았다. 피닉스의 경기병들 또한 반으로 나누어져 좌, 우익의 후방에 배치시켜 놓았다.
로드는 전력을 ‘일점’에 집중한 두 개 부대만을 운용할 생각이었다. 현재 어비스의 가장 강력한 이점은 누가 뭐래도 두 명의 B급 무력형 영웅. 저쪽에는 그녀들을 상대할 만한 영웅이 없을 것이다. 베아트리체와 유니벨 둘 중 어느 한 쪽이라도 적의 진형을 뚫어낼 수 있다면 전황은 급격히 유리해진다.
'분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크에게 전략으로도, 병사들의 지휘에서도 뒤떨어진다. 그러니 철저하게 내 군의 우위만 믿고 승부하겠어.'
로드가 마침내 다시 진군의 신호를 내리자 좌우익의 부대가 동시에 진군했다. 움직이면서 점점 두 부대의 사이가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본 릴리가 아크에게 보고했다.
"아크. 어비스가 진군해와요."
"아? 그렇군. 휴식은 벌써 끝인가?"
화르르륵! 아크의 손바닥 위에 솟아오른 화염이 작아지며 구의 형태로 압축되었다. 아크가 다리를 벌리며 자세를 낮추었다.
"증폭 부탁해, 릴리양."
"네에."
그녀의 손바닥에서 마력이 피어오르자 아크의 불꽃이 이에 반응하듯 더욱 맹렬히 타올랐다.
아크는 지면에 발을 내리찍듯 내딛고는 역동적으로 허리와 다리를 비틀며 화염구를 하늘로 날려보냈다. 후우우우우웅! 화염구가 다시 한 번 하늘로 솟구쳤다.
"아, 아까 그 공격이다!"
"조심해!"
화염구는 병사들을 지나쳐 멀리 날아가다가 포물선을 그렸다. 그리고 다시 화염구가 향한 곳은 다름아닌…….
'……궁병대!'
꽈아아아아아앙!
집채만 한 화염구는 그대로 후방의 궁병대에 떨어졌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불과 살점의 파편이 튀어 올랐다.
'빌어먹을!'
로드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 공격 한 번으로 궁병의 절반 가까이가 당했다.
"더 빨리 움직여라!"
"저 이상한 화염구를 또 쓰기 전에 달라붙어!"
부관들이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어비스군은 더욱 속도에 박차를 가했고, 카사르군 또한 일정한 속도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거의 다 따라잡았다. 이제는 바로 근접한 거리였다. 우군의 베아트리체와 좌군의 유니벨과 동시에 공격 준비를 했다. 두 군세가 좌우에서 카사르군을 물어뜯으려는 순간,
"자아? 모두들 준비됐지?"
아크가 두 팔을 벌렸다.
"렛츠 고!"
파밧!
후방으로 행군하고 있던 카사르 병사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정면의 어비스군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놈들이!"
"가, 갑자기 뭐야!"
그동안 일정하게 느린 행군 속도를 취한 것은 바로 이 때를 위해서였다는 듯, 그들은 엄청난 순간 스피드를 냈다. 도저히 무거운 갑주를 입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어비스군이 당황한 찰나의 틈을 붙잡고, 좌익과 우익의 벌어진 틈을 파고들어 기민하게 통과했다.
"노, 놈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쳐라!"
"둘러싸라!"
좌우익의 몸체에서 병사들이 진형을 무시하고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아크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걸렸다. 이 기동을 위한 훈련을 얼마나 가혹하게 했던가.
'옳지. 옳지. 이걸로 다시 포위당해 '불굴의 의지' 효과가 발동돼…….'
"멈?춰라아아아아아!"
그 거대한 외침에 어비스 병사들이 주춤하며 멈췄다. 그 외침의 주인공은 아란이었다. 확성구슬 입에 가져다 댄 그가 목에 핏줄을 세우며 외쳤다.
"머저리 같은 새끼들! 누가 대열을 이탈해도 좋다고 했나! 좌우익의 몸체는 그대로 대기하라!"
그가 고개를 돌려 살벌하게 외쳤다.
"부관들은 뭘 멍하니 있는가! 모두 목이 날아가고 싶은 것이더냐!"
그제서야 부관들이 화들짝 놀라며 병사들을 통솔하기 시작했다.
"좌, 좌우익은 대기하라!"
"움직이지 말고 포위를 완성하라!"
========== 작품 후기 ==========
통솔형 영웅이 이렇게 좋습니다 여러분! (아로게쓰 신관님 애도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