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재 게이머 -->
부관들이 움직이면서 질서가 잡히고 병사들이 자리를 지켰다. 아크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다 지은 밥이었는데… 어비스에 괜찮은 통솔형 영웅이 있나 보네.'
로드가 불끈 주먹을 쥐었다.
'나이스, 아란!'
두 플레이어의 희비가 엇갈렸다. 아란의 활약으로 다시 카사르군을 포위해 '불굴의 의지' 효과가 발동되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카사르군을 지나쳐간 좌우익의 머리가 우회하여 하나의 군세로 합쳐져 카사르군의 후방으로 들이닥쳤다.
릴리가 표정을 굳히며 아크를 보았다.
"아크. 적이 오고 있어요. 어쩌죠?"
"걱정마, 릴리 양. 상황이 바뀐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아크가 진군해오는 어비스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능의 효과를 받지 않더라도 우리 애들은 충분히 강해. 적이 한 면으로 와준다면야 감사하지. 궁병의 수도 줄여 놓았으니까 차분히, 그리고 느긋하게 정면 승부로 이끌어가면 돼."
아크의 표정은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고 여유가 있었다. 지휘관의 흔들리지 않는 모습은 아래의 가신들과 병사들까지 용기를 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아크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기꺼이 상대해 주자고."
*
"천박한 부랑인들이 더러운 발을 이끌고 오는구나! 저들에게는 기사도의 자비 또한 사치다! 격의 차이를 보여주자!"
"전쟁에 예절 따윌 같다 붙이고 자위하는 머저리들이다! 저 집단 정신병 환자들에게 현실을 깨우쳐 줘라!"
두 진형이 다시금 맞붙었다.
카사르군은 진형을 유지하며 제자리에 굳건히 버티고 섰고, 어비스군이 그에 돌진하는 형국이었다.
전황은 팽팽했다. 상대적으로 전력이 부족한 어비스 병사들은 악으로 깡으로 달라붙어 분투했고, 카사르의 병사들 또한 처음 둘러싸였을 때와는 달리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진 못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활약하는 자들이 바로 영웅들이었다. 어비스 진형 쪽에서 유니벨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후우우웅!
그녀의 시야 아래로 두 진형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그녀가 팔을 교차하자 양 손가락 사이로 붉은 탄환들이 나타났다.
- 맹약의 폭주, 융단 폭격.
그녀의 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휘둘러지며. 소름 끼치는 붉은 비가 카사르의 진형에 내리 꽂히기 시작했다.
"호오?."
아크가 손으로 햇빛을 가린 채 하늘을 바라보며 웃었다. 붉은 강선들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모습은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인간 폭격이라, 말도 안 되네. 최소한 B급이려나. 하지만…….'
아크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밀집 대형을 쓰면서 적의 광범위 공격에 대비하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부탁해, 베디베어 양."
"예, 폐하."
베디베어라 불린 여자는 작고 앙증맞은 몸매였지만 중갑을 착용하고 허리춤에 검을 차는 등 기사로서의 장비는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그녀가 만세를 부르듯 번쩍 팔을 들어올려 마력을 일으켰다.
- 슬로우 필드.
파아아아앗!
노랑색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반투명한 막이 카사르 진형의 위로 펼쳐졌다.
"릴리 양!"
"네!"
릴리가 베디베어에게 증폭 효과를 부여하자, 노란색 막이 커져가며 카사르 진형의 머리 위를 온전히 뒤덮는 커다란 지붕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유니벨의 붉은 폭탄들이 들이닥쳤다.
'엥? 뭐야 저건?'
공중에 있는 유니벨의 미간이 모아졌다.
마력 폭탄이 막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물처럼 걸렸다. 정확히는 앞으로 전진하고는 있었으나 그 속도가 너무 느려 마치 정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결국 설정해둔 시간이 지나 폭탄이 터졌다. 그것이 막에 걸린 다른 폭탄들까지 터뜨리며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쿠구구구구!
카사르 병사들의 머리 위가 시커먼 연기들로 뒤덮였다.
'쳇!'
꽤 많은 마력을 쏟아 부었으나 유니벨은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한 채 지상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아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봤어? 로드 군. 베디베어는 흔한 D급이야. 하지만 플레이어가 쓰기에 따라서 B급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만큼 그 활용도는 무궁무진해. 부하의 힘을 200% 끌어올릴 수 있는 자야말로 진정한 군주다.'
아크의 시선이 움직였다. 전체적으로 팽팽한 양상이었으나 유난히 아군 진형이 밀리는 지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선봉에는 베아트리체가 있었다.
'또 하나의 실력자가 있군?'
아크는 한 손으로는 지휘관 창을 움직이며, 다른 한 손으로는 기수들에게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크가 다루는 기수의 수는 열 명, 깃발의 수는 그 배 이상이었다. 아크의 복잡한 명령에도 영웅들과 병사들은 척척 움직였다. 이것이야 말로 아크가 키워낸 카사르군의 강점이었다.
그리고 한편.
"이 꼬마는 대체!"
"큭! 막아라!"
공중의 유니벨이 막혔지만, 지상에서는 베아트리체가 활약하고 있었다.
상대는 중갑을 착용한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단검은 눈이 달린 것처럼 갑옷의 이음새와 빈틈만을 귀신같이 노리고 움직였다. 그녀의 앞에서 기사들은 맨몸이나 다름없었고, 그녀가 걸어가는 곳마다 진형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압도적인 무위 앞에선 수많은 훈련을 겪은 기사들조차 뒷걸음질쳤다.
"비키거라!"
쿵! 커다란 방패가 베아트리체의 앞을 가로 막았다. 사용자의 몸을 완전히 뒤덮은 거대한 라운드 쉴드. 그 뒤에는 나머지 한 손에 검을 든 여기사가 있었다.
"본관은 수호의 기사, 제레인트 폰 레밍턴이다. 악마의 탈을 쓴 소녀여, 본관의 도전을 받으라! "
"……."
베아트리체는 무표정한 얼굴로 달려들었다.
카앙! 카앙! 단검이 불똥을 튀기며 연이어 방패를 후려갈겼다. 그러나 흠집도 나지 않았다. 게다가 방패의 크기가 너무 커서 힘으로 쳐 올려도 틈이 생기지 않았다. 팔을 영체화시켜 방패를 뚫고 단검을 내지르는 방법 또한 방패의 두께가 너무 두꺼워 여의치 않았다.
베아트리체가 하는 수 없이 옆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방패의 움직임은 완벽했다. 방패로 완전히 몸을 가리고 있음에도 마치 방패 밖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 베아트리체의 움직임에 따라 맞춰 방패의 위치가 바뀌고 있었다.
'……이래서는 싸움이 안 돼.'
베아트리체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려 고개를 돌렸다. 그때 방패가 줄어들며 검을 들어올린 제레인트의 모습이 나타났다.
까아앙!
베아트리체가 아슬아슬하게 코 앞에서 내려쳐지는 검격을 가드해냈다. 주위에서 흙먼지가 터져 나왔다.
"어딜! 본관의 앞에서 등을 보이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
'…크기가 바뀌는 방패.'
채앵!
베아트리체가 힘으로 검을 쳐내며 재차 달려들었으나 제레인트는 다시 방패의 크기를 키워 그 뒤로 숨어버린 뒤였다. 베아트리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귀찮은 상대. 지지는 않겠지만 오래 걸릴 듯.'
*
전황은 고착되었다.
유니벨과 베아트리체는 각각 베디비어와 제레인트에 의해 마크당하고 있었고, 병사들의 승부에서는 카사르의 우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역시 아크. 상당히 능숙하다.'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살린다. 아크는 병력을 움직이는데 있어서 거침이 없었고, 그럼에도 모든 상황을 완벽히 대비하고 움직였다. 로드는 입맛이 썼다.
'군사의 공백이 여기서 또 느껴지는구나.'
아크는 군주인 본인 자체가 뛰어난 전술가이고 책략가였다. 반면 로드는 모략엔 자신 있었지만 전장에서의 책략에 있어서는 우수하다고 할 수 없었다. 책략이 개입할 수 없는 지형이긴 해도 전투가 길어질수록 아크가 조금씩 이득을 보며 우위를 점해가는 모습을 보면 군사의 필요성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는 소리할 때가 아냐. 이 악물고 따라붙어 주마!'
로드의 손가락이 지휘관 창 위에서 춤을 추었다.
우선 카사르 나이트가 날뛰고 있는 지점에 액스워리어들을 투입시켰다. 그나마 어비스군 내에서 대 기사전에 밀리지 않는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기병대를 움직였다. 좌우익의 후위에 붙어있던 기병대가 떨어져 나와 카사르 군의 후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크. 후방에 적의 기병대가 옵니다."
릴리가 바로 보고했다. 아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를 내렸다.
"창보병부대. 후방으로 이동해서 진형을 짜라."
명령을 따르는 병사들의 움직임 또한 신속했다. 여러 병종이 뒤섞인 진형에서 창보병들이 쏙쏙 빠져나가 후방으로 집결했다. 그들은 본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장창을 들어올렸다. 창대에 연결된 날카로운 쇠붙이들이 다가오는 기병대를 향해 그 흉흉한 자태를 뽐냈다.
'카오스월드에서 기병은 창병의 밥이지. 특히나 이제 막 기병을 운용했을 초보 부대라면 더더욱. 기병들의 기마술에서 티가 난다구, 로드 군.'
창보병을 배치한 아크는 후방에 시선을 끄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지쳐있는 전면의 병사들과 쌩쌩한 후면의 병사들을 교체하는 등 다시 현란한 지휘를 선보였다.
*
두두두두두!
어비스의 기병들은 정면에 장창병이 배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세를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
"하하하! 정말로 오는 거냐?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올 테면 와봐라! 벌집으로 만들어 주마!"
창보병들의 기세가 높았다. 갖춘 진형도 완벽했다. 이대로 기마병들이 달려와 봐야 꼬치가 되어버릴 터였다.
하지만 스파이의 눈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로드는 여유로웠다.
'미안하지만, 아크. 내가 전장에서 유일하게 너에게 앞서는 부분이 있다면.'
그때였다. 기병들이 허리춤에 달려있던 주머니에서 동그란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는 창보병진에 달려들지 않고 옆으로 우회하면서, 그것을 던졌다.
'꼼수다.'
퍼어엉!
창보병들의 머리 위로 날아가던 둥근 물체가 폭발해 자욱한 연기를 일으켰다. 어비스 특제 최루탄이었다.
"뭐, 뭐야 이게!"
"크윽!"
창보병들이 콜록거리며 괴로워했다. 눈물 콧물이 쏟아지며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거기에 최루탄이 연막의 효과까지 내고 있으니 한치 앞도 살필 수 없었다. 최루탄은 바람에 퍼져나가 창보병 부대 전체를 뒤덮고도 멀리 퍼져나갔다.
"멈추지 마라!"
"계속 던져!"
기병들 중에서는 최루탄 말고도 검은 연금술 협회의 마력 폭탄을 든 자들도 있었다. 기병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창보병진의 전면을 우회하며 투척물을 날려댔다.
화학 공격에 물리적 폭격까지 이어지자 결국 버티지 못한 창보병들의 진형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제대로 창을 들고 있는 자들이 없었고, 진형에서 이탈하는 자들이 생겼다.
두두두두두두두두!
폭탄을 던지고 우회하는 기병들의 뒤로, 창검을 앞세운 기병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 모두 코와 입을 가리는 터번을 덮어 쓰고, 눈에는 보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다.
"돌격!"
콰콰콰콰쾅! 진형이 무너진 장창부대의 전면을 기병들이 들이박았다. 시야를 빼앗긴 장창병들은 말발굽에 짓밟혀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처음에 폭탄을 던지고 우회하던 기병들 또한 터번을 덮어쓰고 돌진하는 기병들의 꼬리를 이었다. 카사르의 창보병들은 거의 궤멸 직전까지 갔다.
"창보병부대는 들으라!"
그때 확성구슬을 타고 아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루 연기에서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빠져 나온 병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아크가 아군 진형을 빠져 나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짐이 자랑하는 기사들이 겨우 저런 잡수에 무너지는 것이냐! 끝까지 물고 늘어져라! 짐이 가고 있노라!"
"……폐, 폐하께서 직접!"
창보병들의 눈빛이 변했다.
아크는 카사르군 내에서 신앙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병사들도 그가 툭하면 무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실수 때문에 아크를 또 위험에 빠트리다니. 이대로 목숨을 건진다 해도 다른 동료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빌어먹을, 이 무슨 불경이냐! 가자!"
"폐하의 발목을 잡지 마라!"
"와아아아아!"
창병들이 다시금 최루 연기 속으로 뛰어 들어가 창을 내질렀다. 바닥에 엎어진 병사들과, 아직 전면에서 진형을 유지하고 있는 자들 모두 이를 악물고 창을 앞세웠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기병들이 창에 찔리고 저들끼리 얽혀 무너졌다. 뒤따르던 다른 기병들도 흐릿한 시야 때문에 바닥에 쓰러진 아군 기병의 시체를 보지 못해 낙마했다.
선두의 부대는 통과했으나 허리 부분이 창보병들의 분투로 끊기고 말았다.
"돌아보지 말고 계속 달려라!"
"이대로 카사르 놈들의 진형을 꿰뚫는 거다!"
기병대를 통솔하는 부관들이 말허리를 차며 소리를 높였다.
========== 작품 후기 ==========
수아시 / 쿠폰 감사합니다! 연참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ㅅ;
은신설야 / 데려오니 밥값은 하네요!
벌레 / 아하...! 역시 영지물의 로망은 하렘 구축이 아니겠습니까!
섹시파워 / 위급한 상황에 튀어나오는 저런 박력있는 통솔력은 재능의 영역이지요.
Leessa / 감사합니다. 완결까지 달려볼게요.
llSongOfBladell / 그렇군요. 병력이 이정도로 많이 모일 수 있다는건 기본적으로 강대한 군사력과 전 국민이 기사를 목표로 힘을 갈고 닦는 문화 자체도 그렇고 무엇보다 아크의 역량이 가장 크게 작용했습니다. 어비스의 경제력은 최악이었지만, 현재는 로드에의해 부유한 내정 운영을 하고 있는것처럼요.
Lgb / 일단 이 전쟁 끝나고요!
Xedrions / 추천 사랑합니다!
아스라히i / 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드에 비해선 아크가 모든면에서 월등히 우수해보이죠.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앞으로 스토리 흐름을 보시면 알수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전반적으로 로드가 밀리긴 하지만, 로드는 로드만의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火炎無 / 광역은 안되고 1회 1인 시전만 가능합니다 ㅠㅠ 광역이 되면 너무 사기지 않을까요!
spadel / 하렘구축은 죽창으로 심판해야 합니다! 이스터에그! 한 번 작중에서 외전 느낌으로 다루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