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재 게이머 -->
허리가 끊겼음에도 기병대는 계속해서 전진했고, 그 앞으로는 아크가 달려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신인 보호트와 아론다이트가 뒤에 따라 붙었다.
"그럼 함께 몸 좀 풀어볼까? 보흐트 군, 아론 양."
아크가 돌아보며 눈을 찡긋했다.
"아오, 이 멍청아!"
보호트라고 불린 흑발의 남자가 돌연 아크의 뒤통수를 퍽! 소리 나게 때렸다.
"히잉! 갑자기 왜 그래!"
아크가 울상을 지으며 머리를 매만졌다.
"달려오는 기병 부대에 홀로 전진하다니! 죽고 싶은 거냐, 정말!"
"너무해, 보흐트 군. 병사들이 없을 땐 말 놔도 된다고 했지만 떨어지자마자 구타라니!"
"진짜 하극상이 뭔지 보여주랴?"
"두 분 다 그만해요!"
땋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갈색 머리의 여자가 소리쳤다.
"그리고 보흐트 경!"
"뭔가."
그녀가 진지하고 엄격한 표정으로 보호트를 노려보았다.
"기왕 때릴 거면 제 엉덩이나 때려 주시죠! 아깝게시리!"
"입 좀 다물게! 진성 마조!"
"가신들이여. 그대들의 성적 취향을 공유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전장이니 자중하길 바라노라."
"넌 좀 조용히 해! 네 인생부터 자중해라!"
"너, 너무해! 보호트 군!"
세 사람이 투닥거리는 사이 기병들이 코앞까지 와있었다. 보흐트가 창을 빼들었고 아크는 아론다이트의 손을 붙잡았다.
"자, 가볼까? 아론!"
"하앙! 폐하. 손길이 너무 거칠어요!"
라고 말하던 아론다이트의 몸이 출렁거리며 변신하였다. 어느새 아크의 손에는 멋들어진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아론. 릴리의 증폭 효과는 받고 있지?"
"네, 폐… 아앙! 그 부분을 세게 쥐시면 곤란…… 하읏!"
"간다!"
아크가 대기를 가르며 도약함과 동시에, 검으로 변한 아론다이트의 검신이 10미터까지 늘어났다.
"으랏챠!"
그 자세에서 허리를 돌려 아론다이트를 한번 휘두르자 기병 여섯이 동시에 밀가루 반죽처럼 썰려나갔다.
"미, 미친!"
"저건 또 무슨 이능이냐!"
아크는 허공에 뜬 상태로 연속해서 장검을 휘둘렀다. 갑주를 입지 않은 기동력 위주의 경기병들이 한 번에 수 명씩 베여 바닥을 뒹굴었다.
"빌어먹을!"
"무시하고 전진해!"
그러나 아크 혼자의 힘만으로는 기병들을 잠시 주춤하게 할 수는 있어도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기병들이 떠오른 아크의 발 밑을 지나쳐가자 아크가 확성 구슬을 켜고 외쳤다.
"놓쳤어. 그쪽으로 간다!"
이미 카사르의 본군 쪽에서는 보병들이 방패를 바닥에 박으며 기병의 차지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아크가 직접 분투하는 모습을 보고 사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흐아압!"
아크는 계속 공중에 머무르며 10미터의 아론다이트로 기병들을 농락했다. 그의 몸이 아래로 떨어지려고 하면 허공에 파문이 일어나 다시 위로 떠올랐다. 아크에게 베인 기병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때 반대편 전장에서 유니벨이 다시 공중에 떠올랐다.
곧이어 그녀의 광범위 공격기인 융단 폭격이 시작되었고 베디베어가 슬로우 필드를 펼쳤다. 그러나 이번엔 릴리의 증폭효과가 아론다이트에 가있어 그 범위가 좁았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마력 폭격에 상당수의 병사들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결국 릴리가 증폭의 효과를 돌렸는지 슬로우 필드의 크기가 커졌다. 대신 아크가 쥐고 있는 아론다이트는 검신의 길이가 줄어들어버려 더 이상 사거리를 이용한 공격으로는 싸울 수가 없게 되었다.
"쩝, 로드 군의 수작인가?"
아크는 허공에 뜬 채로 발 밑의 기병 부대를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타이밍이 너무 좋다. 아마 일부로 증폭 능력을 베디베어로 돌리게 하게끔 하기 위해 벌인 짓일 것이다.
'눈이 두 개라도 달렸나? 흐으음.'
"이봐, 아크!"
보호트가 공중에서 다가왔다.
"여기 계속 있어봐야 의미 없어. 소정의 목표는 달성했으니까 돌아가자고. 총사령관이 이렇게 적진에서 나대는 건 너무 위험해."
"그래야겠네. 본진으로 가자."
보호트가 팔을 움직이자 아크의 등 뒤로 대기의 파문이 생겼다. 아크가 '어라라?' 하면서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파문이 펑! 소리를 내며 아크의 몸을 날려보냈다.
"으아아아! 너무해! 보호트 군!"
"폐, 폐하! 거길 꽉 잡으시면! 읏!"
"……쯧."
하여간 한심한 놈들. 보호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발밑에 대기의 파문을 만들어 내 허공을 도약했다. 이것이 바로 바람의 기사로서의 그의 능력이었다.
*
카아아앙!
마력이 실린 베아트리체의 단검이 은빛 꼬리를 이끌며 나아가 방패에 부딪쳤다.
"큭!"
제레인트의 몸이 크게 기우뚱했으나 방패의 크기를 키워 오뚜기처럼 버텨냈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비오듯 흐르는 반면 베아트리체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귀찮아.'
베아트리체는 이렇게 극단적인 방어 일편도의 전술을 사용하는 적은 처음 상대해보았다. 까다로웠다. 아니, 거추장스러웠다. 베아트리체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도 제레인트는 끈질기게 따라붙어 그녀의 전진을 방해했다.
결국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진 이 똥개를 치우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거슬릴 것이다. 베아트리체가 어떻게 공략할지 고심하고 있는데 후방에서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팔을 흔들며 걸어왔다.
"베아트리체 선배! 내가 왔소!"
피닉스였다.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보았다.
"큰 형님이 나를 보냈소! 이 여자는 내가 맡으리라!"
"……응, 그럼."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까닥하며 물러났다.
"큭, 본관을 앞에 두고 어딜 가느냐!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레인트가 달려들었으나 피닉스가 뛰쳐나와 쇠파이프로 방패를 후려갈겼다. 꾸우우우웅! 막대한 힘이 방패를 타고 손에 전달되자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네 상대는 이 황동파의 피닉스다!"
"귀찮은 파리가! 방해하지 마라!"
베아트리체를 막는 것이 아크가 그녀에게 맡긴 임무였다. 제레인트가 병사들 쪽으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피닉스가 자신의 재킷을 벗어 던져 그녀의 방패에 붙였다.
"무, 무슨!"
재킷의 겉면이 끈끈이처럼 변해 늘어났다. 베아트리체를 따라잡아야 했지만 피닉스가 재킷을 잡아 당기고 있는 바람에 물러날 수 없었다.
"놔라! 이놈!"
그녀가 검을 휘둘러 끈끈이를 때어내려고 했지만 오히려 검 마저 끈끈이에 붙어버렸다. 그녀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 해괴한 것은 대체 무엇이냐!"
"후후후!"
피닉스가 재킷을 바닥에 붙여놓고는 다가왔다.
"큰형님께서 친히 내게 특상품을 내리시는구나! 그것도 여기사라니! 이런 콘셉트도 좋지!"
"……뭐, 뭐라? 감히 본관을 더러운 창부 취급 하는 것이더냐!"
제레인트가 분노하며 등 뒤에 맨 예비 검을 꺼내 들었다. 피닉스는 그녀에게 달려듬과 동시에 손에 쥔 쇠파이프를 냅다 집어 던졌다. 그녀가 막는 사이, 피닉스의 몸이 번개같이 그녀의 몸을 지나쳐갔다.
'……빠르다!'
하지만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 제레인트가 의아해 하고 있는 그때.
절그럭.
그녀의 상체 갑옷이 벗겨져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윽!"
갑옷이 벗겨지며 몸에 착 달라붙은 검정 타이즈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제레인트가 얼굴을 붉히며 가슴을 가렸다.
"네, 네 이놈! 이, 이게 무슨 짓거리냐!"
"무슨 짓거리냐니? 옷을 벗기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피닉스가 뭘 새삼 그런걸 묻느냐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제레인트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신성한 전장에서 어찌 이런 망측한 짓을!"
"그렇다! 남녀가 뒤섞여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것도 하나의 전장이라고 할 수 있지! 좋은 표현이다."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전장이라고 이 미친놈아!"
피닉스가 음침한 미소를 흘리며 걸어왔다.
"토크는 이만하고 본방으로 넘어가지. 한 올도 남기지 않으마!"
"제, 제정신이 아니야! 이 어비스 놈!"
*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카사르군은 중앙에서 진형을 유지한 채 굳게 버텼고, 그들의 전방은 어비스군의 좌우익이, 후방은 경기병 부대가 덮치는 형국이 되었다. 사방 포위가 아닌 앞뒤에서의 이중 공격이었다.
창보병의 방진을 뚫어내며 후방으로 찔러 들어왔던 경기병 부대는 아크의 분전으로 기세가 잠시 주춤했다. 그리고 왕이 분전하는 모습을 본 보병들은 사기 백배하여 방패를 앞세우고 촘촘히 인간 벽을 쌓아 올렸다. 벽과 기마병의 차지가 부딪치는 과정에서 카사르 군은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지만, 이 정도면 수월하게 막아낸 편이었다. 현재 후방에서는 기마병들과 보병들의 난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좋아, 완성.'
화르르르륵! 아크의 손바닥 위로 시뻘건 불꽃이 솟아나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아크는 그것을 손바닥에 올린 채 전방으로 저벅 저벅 걸어 나갔다. 아크의 화염을 본 어비스 병사들 사이에서 한 차례 소란이 일어났다.
"저, 저건!"
"화염구야! 모두 조심해라!"
이 전장에 있는 모두가 아크의 고유 능력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언제 머리 위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불벼락의 공포에 밀집 진형의 병사들이 멋대로 흩어지거나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이거지, 이거야.'
아크는 화염구를 바로 사용하지 않고 손에 쥔 채 주위를 거닐기만 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어비스 병사들은 민감하게 반응했고, 카사르 병사들도 그 사실을 아는 듯 아크가 가는 곳마다 격한 환호를 보내왔다.
이미 공포는 심어두었다. 아크는 자신의 기술을 그저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득을 챙기고 있었다.
어비스 진형의 밀집력이 약해지자 카사르 병사들은 훨씬 수월하게 전투를 풀어나갔다. 반면 어비스 병사들은 전면에서 오는 적과, 하늘에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화염의 공포를 동시에 맞서 싸워야 했다.
공포는 또 다른 공포를 낳으며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어비스측의 사기가 점점 떨어지고 있었지만 딱 한 곳, 예외가 있었다.
카사르 진형에서 유일하게 밀리고 있는 지점. 바로 옆으로 돌아들어온 베아트리체와 액스워리어 부대가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베아트리체의 화력을 전면에 앞세워 카사르군의 방진을 돌파하고 있었다.
"단장을 지켜라!"
"뒤쳐지지 마라!"
그녀를 호위하는 액스워리어들 또한 카사르 나이트에 크게 밀리지 않는 실력자들. 거기에 베아트리체의 압도적인 무예가 구심점이 되어, 부대의 구성원들이 똘똘 뭉쳤다. 그들은 전심전력으로 앞만 보고 나가는 그녀의 뒤를 따라붙었고, 그녀를 계속 전진하게 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적어도 뒤는 이쪽이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전황을 보던 아크의 눈이 빛났다.
'저 아이들이 어비스의 최정예이자 희망인가? 화염구를 써야 한다면 저쪽이겠네.'
아크가 화염을 이끌고 움직였다. 베아트리체 부대를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아로게쓰의 전사들이 마법 같은 것에 사기가 떨어질 리 만무했다. 그들은 아크의 불꽃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무기를 휘두르는 데에만 전념했다.
'용감하네.'
생글생글 웃고 있던 아크의 표정이 이내 차갑게 변했다.
'그래서 더 까다로워.'
아크가 자세를 낮추며 화염을 던질 준비를 했다.
후우우우웅!
아크가 자세를 잡음과 동시에, 다리에 마력을 집중시킨 베아트리체가 지면을 박치고 날아올랐다.
하늘에 떠오른 그녀의 눈동자는 아크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전방에는 병사들의 벽이 두텁게 깔려 있었지만 공중으로 뛰어오르면 바로 직격이 가능한 거리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헤? 날 잡아볼 생각이야? 귀여운 꼬마 아가씨."
"……."
아크가 화염을 갈무리하여 손바닥 안에 응축시켰다. 언제든지 던질 수 있는 태세를 취한 것이다. 적장이 '나를 맞추시오!' 하고 떡 하니 앞에 나타나 주다니. 여기서 그녀를 패주시킬 수 있다면 화염구 한 발 정도는 아깝지 않았다. 운이 좋다면 화염구에 맞아 떨어진 그녀를 포획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B급 무력형 영웅이라. 천금을 줘도 아깝지 않은 가치다.
아크가 거리를 재며 팔을 움직이려는 순간.
"……어?"
아크의 동공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의 눈이 정녕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이 맞다면, 공중에 떠오른 베아트리체의 몸이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뒤바뀐 것 같았다.
그리고 난데없이 나타난 그 자는…….
"…로, 로드 군!"
다름아닌 로드였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B급 영웅에서 갑자기 한 나라의 '멸망 보너스'로 그 가치가 수배는 뛰어 올라 버렸다. 아크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눈빛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런데…….'
로드는 당황하거나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아크의 얼굴이 그제서야 차갑게 식었다.
'……웃고 있어?'
로드의 미소를 보는 순간, 아크는 가슴의 고동마저 느껴질 정도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 한 착각이 들었다.
저 미소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이 의도된 상황이란 말인가?
의도된 상황이라 한들 저기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방구석 게임 폐인이 무력 수치가 높을 리가 만무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을 뒤집을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로드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크를 향해 겨누는 모습이 보였다.
- 충전총 오덴발트 '포격'
========== 작품 후기 ==========
마틴의 두 가지 충전 무기중 오덴발트의 주인은 현재 로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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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시 / 주6일 연재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사정상 쉽지 않네요 ㅎㅎ;
쿠죠죠타로 / 확실히 흑사회를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야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을 듯 하네요.
Leessa / 감사합니다!
보라색맛 / 장문의 코맨트 감사해요..! 그런데 500명이 아니라 1500명입니다 ;ㅅ; 500대 2500이면 아무리 아크라도 게임이 안�怜憫熾�.
무꾸914 / 헉! 정말요? +_+
Digimon0002 / 5배 차이는 아녜용; 2500대 1500입니다.
섹시파워 / 좋은 작품이죠 ㅎㅎㅎㅎ
lineata / 맞아요. 전황이 밀리는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봤을땐 어비스쪽도 분투하고 있습니다! 어비스군이 이기는것 까지는 아니지만요 ㅠ
모라논 / 아크의 의존도가 상당히 높은 군이긴 하죠 ㅎㅎ 전작은 '왕들의게임'이고 조아라에서 연재했다가 출판했어요. 카카오 페이지나 네이버북스 등에서 보실 수 있어요. 세계관은 비슷하지만 스토리는 좀 다를듯합니다. 아, 그리고 1편에 써주신 코맨 뒤늦게 읽었는데 정말 힘이됐습니다. 아침에 정-말 기분좋게 출근했네요!
Lgb / 맞는 말씀이네요! 1군이 지키고 있으니 이이제이 전략을 쓰긴 좀 까다롭습니다. 아, 그리고 장기전으로 갈까 고민했지만 단기전느낌으로 가보기로 했어요,
@ 火炎無 / 거리제약 짧은 편이에요 ㅠㅠ 저격(?)은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