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재 게이머 -->
마틴의 충전 무기 중 하나인, 오덴발트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푸른 탄환이 일직선으로 쇄도하였고 한 템포 늦게 아크가 던진 화염구가 올라가며, 파랑과 빨강의 이능이 허공의 중앙에서 맞부딪친다.
천지가 뒤흔들리는 굉음이 공기를 때렸다.
충돌 이후 두 힘이 뒤섞이듯 휘몰아치며, 격렬한 폭발이 터져 나왔다. 폭발점을 기준으로 산사태를 연상케 하는 규모의 에너지 파편이 쩡! 소리를 내며 퍼져 나갔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파편의 반경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휩쓸어 소멸시켜 버렸다.
쿠구구구구구구!
두 거대한 에너지가 완전 소멸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 충돌의 결과로 전장 한 가운데에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으며 땅 위로는 작게 피어오른 불씨와 지직거리는 푸른 총흔만이 남았다. 사람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
"……."
전장에 잠시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후우우."
아직도 공중에 떠있는 로드가 숨을 크게 한 번 몰아쉬었다. 아크가 조금이라도 더 일찍 화염구를 던졌다면 폭발에 휘말렸으리라. 로드는 시야 아래의 알림창을 살폈다.
'없군.'
아무 메시지도 뜨지 않은 걸 보니 아크는 여전히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아쉽지만 성과는 충분했다. 적의 밀집 진형에서 대폭발을 일으켰고, 피해를 입은 건 카사르 쪽 뿐이다. 결코 옅은 데미지는 아닐 것이다.
'어라?'
그때 로드의 몸이 아래로 자유낙하하기 시작했다. 위험했다! 이대로라면 추락으로 인한 부상 이전에 적진 한 가운데에 홀로 떨어질 것이다.
덥석.
"야 이 정신 나간 새끼야!"
로드가 고개를 돌리자 성격 나쁜 빨간 머리카락의 구세주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나타났다.
"정말이지, 왜 이렇게 무모한 거야! 네 위치를 알기는 아는 거야? 멍청아!"
오자마자 잔소리라니. 로드가 쓴 웃음을 지었다. 그쪽이 잔소리라면 이쪽은 괴변으로 맞수를 두겠다.
"모두들 공평하게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장인데, 나만 후방에 짜져 있을 수는 없지."
"지랄!"
갑자기 그녀가 손바닥 위로 마력 폭탄을 만들어 냈다. 맙소사, 로드는 아까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움찔했다.
"어, 음. 유니벨. 내가 잘못한 것 같……."
그때 유니벨이 한 손으로 로드의 몸을 와락 끌어안고는 자신의 등 뒤로 폭탄을 던졌다.
퍼어엉!
폭발의 반동으로 로드를 붙든 유니벨의 몸이 부웅 허공을 날아갔다.
로드가 놀란 듯 눈을 깜박거렸다. 아, 이런 식으로 비행하는 거구나. 그러고 보니 그녀가 융단 폭격을 하러 하늘에 올라갔을 때도 이런 방법을 썼던 것 같다. 매 번 스스로 상처 입으면서 싸우는 건가.
그때 로드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유니벨의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멍청한 새끼."
"너도 만만치 않아."
로드는 그렇게 대꾸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곤 등을 더듬어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찢어진 옷 안으로 빨갛게 부어 오른 살집이 느껴졌다.
"……만지지마."
그녀가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저항했다. 하지만 더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날아가는 두 사람의 몸이 카사르 진형을 넘어 아군 진형으로 갔다.
"저, 저기 오신다!"
"받아라!"
후방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러나 폭발의 화력이 예상보다 강했던지 두 사람의 몸은 아군 진형을 그대로 지나쳐서 텅 빈 황무지까지 날아가고 있었다.
'흐읍!'
지면이 가까워지자 이번엔 로드가 그녀를 어깨를 꽉 껴안은 채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마력을 일으켜 몸을 보호했다.
파학! 로드의 등이 먼저 바닥에 닿았다. 그리고 바닥에 기다란 자국을 그리며 쭈욱 밀려났다.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나 주위를 자욱하게 덮었다. 입안에 텁텁한 흙 맛이 났다.
"야! 야! 괜찮아?"
로드의 몸이 멈추자 유니벨이 벌떡 고개를 들며 물었다.
"…괜찮아. 다행히 바닥이 푹신하…… 으윽!"
"무리하지 말라니까 바로 또!"
"에이 뭘, 너도 아까 나 구한다고 등 다쳤으니까 쌤쌤으로 쳐."
"쌤쌤은 무슨!"
그녀가 버럭 했다. 평소의 버럭보다 유난히 목소리가 큰 것 같았다. 그렇게 화가 났나? 하고 들여다보는 순간 로드는 움찔 놀랐다. 진홍빛 눈동자 아래로 눈물이 작게 맺혀있었던 것이다.
"다시는 무리하지 마."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유, 유니벨. 너……."
"대답!"
"아, 알았어."
그녀가 재빨리 옷소매로 눈가를 닦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곤 이마의 땀을 닦으려고 했던 마냥 팔을 올려보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울어버린 티는 다 나버린 것을.
아무래도 많이 놀란 듯 했다. 하긴 유니벨에게 '도와줘.' 한마디 툭 던지자마자 베아트리체의 능력이 발동되었으니… 로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엇.'
그리고 이제서야 자각했다.
"유, 유니벨."
"…왜."
로드가 당황해 하자 유니벨 또한 자각했다.
로드는 바닥에 누워있었고, 유니벨은 그의 허리춤 위에 말을 타듯 올라가 있는 자세였다. 그리고 그녀의 엉덩이는 정확히 로드의 남성상을 깔아뭉개고 있었다.
여러모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로드는 자신의 건전한 성적 정체성 확립을 위해 특정 부위의 신체 반응을 통제하려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유니벨의 얼굴에 홍조가 도는 듯하더니 한 번에 확 새빨개졌다.
"꺄, 꺄아악!"
"우, 우왓!"
유니벨이 급하게 내려오려 했고 로드도 몸을 일으키려고 하다 서로 몸이 엉켜 옆으로 넘어졌다. 이번엔 유니벨이 아래에, 로드가 위에 자리 잡았다. 로드의 두 팔이 유니벨의 얼굴 좌우로 지탱하듯 닿아 있었고 무릎은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에 파고들어가 있었다.
그렇다. 실로 전보다 더 음란해진 자세였다.
"……"
"……"
얼굴이 시뻘게진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가까웠다.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폐인생활을 하며 완전히 지구상에서 멸종한 줄 알았던 로드의 연애세포가 다른 세계랍시고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이렇게 속삭였다.
각이다.
'시끄럽다. 나도 알고 있어.'
만약 이곳이 전쟁터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피를 뿌리며 죽어가는 아군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덮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게 아까 그녀의 엉덩이에 깔려있던 가엾은 그의 남성상이 바지에 불쑥 텐트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건전한 성적 취향을 가졌다는 것이 '정상인'으로서 내세울 수 있는 얼마 되지 않은 장점이라 여겼건만. 그녀에게 육체적인 욕망의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이 조금은 경악스러웠다.
"……."
그리고 애는 갑자기 또 왜 이런단 말인가.
차라리 평소처럼 뺨을 때리던 정강이를 걷어차던 리액션을 취해달라고 로드는 외치고 싶었다.
그녀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부끄러워하는 여자의 표정으로 이쪽을 힐긋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럽고 가냘파서 무심코 덮칠 뻔 했지 않는가.
"……."
두 사람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상념에서 깨어났다.
"……내가 먼저 일어날게."
"…아, 응."
로드가 비켜나고 유니벨이 상체를 일으켰다. 역시 무슨 일이든 질서를 지켜야 하는 법이다.
잠시 무안한 공기가 흘렀다.
"위험한 일은 끝났어. 진형으로 돌아가. 유니벨."
로드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여기서 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너는 어쩌려고?"
"아크에게 연락해서 담판을 지을 거야."
"담판? 그런 게 가능해?"
"해봐야지."
로드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아, 알았어. 그리고 음……."
유니벨이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했다. 그렇다. 그녀의 이 반응은 클리셰다. 뒷말은 듣지 않아도 빤히 예상 된다. 막말이나 욕설은 서슴없이 잘 하는 주제에 감사 표시는 유난히 서툴었으니까.
"……고…."
"고마워, 유니벨. 바로 구해주러 와줘서."
로드가 먼저 말했다. 그녀의 붉은 낯빛이 두 뺨에서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돼, 됐어! 됐으니까 앞으로 또 그런 무리 하지 마! 그땐 위험에 빠져도 구해주지 않을 테니까!"
로드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유니벨은 먼저 등을 돌려 도망가 버렸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로드가 소리 없이 웃었다.
*
'으으음.'
아크는 눈을 떴다. 잠시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무거워.'
아크가 누워있는 자세로 고개만 들자 릴리가 제일 먼저 그의 가슴 위에 엎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는 기사들이 몸을 던져 아크를 보호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하여간 못 말리는 바보들.'
아크가 미소를 지으며 릴리의 초록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런 비장의 한 수를 쓰지 않고 잘도 아껴뒀네. 로드 군.'
평소답지 않게 방심을 했다. 아니, 정확히는 탐욕에 눈이 멀었다. 플레이어인 로드가 떡 하니 나타났을 때부터 진작 이상함을 눈치 채고 빠졌어야 했다. 하지만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겨울철 굶주린 사냥꾼이 허공에 활을 겨누고 있는데 꿩 한 마리가 스스로 날아와 준 격이랄까.
'나도 아직 멀었어.'
호랑이도 토끼를 사냥할 때 전력을 다하는 법이거늘. 방심을 했고, 방심이 탐욕을 만들어 냈다. 아크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어라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뒤늦게 자신의 몸 위에 올라가 있는 릴리와 기사들의 무게가 확실히 몸에 와 닿았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지, 질식 하겠어어! 애들아! 좀!"
아크가 소리쳤지만 모두들 정신을 잃은 듯 반응이 없었다. 질식사로 죽은 플레이어라는 오명을 남길 순 없다는 사명 아래, 아크가 낑낑거리며 빠져 나오려 애쓰던 중. 그의 눈앞으로 알림창 하나가 나타났다.
- 로드 폴렌티아'님이 '아크 더 라운드'님께 1:1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아크의 이마에 선명한 십자 마크가 그려졌다.
'……지금 나 약 올리는 거니?'
아크는 힘겹게 인간 햄버거에서 빠져 나왔다. 릴리도 데리고 나와 바닥에 눕혔다. 나머지 사내놈들은 내버려 두면 알아서 깰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방금 전의 폭발로 전황은 잠시 고착 상태가 되어 있었다. 진형을 유지한 채 서로 군주의 생사 상황을 확인하는 중인 듯 했다. 아크는 한 손으로는 옷에 묻은 흙을 털며 나머지 한 손으로는 지휘관 창을 움직였다.
- '아크 더 라운드'님께서 1:1대화를 승낙하셨습니다.
화면에 로드의 얼굴이 나타났다. 로드가 웃으며 말했다.
"살아있었네."
"물론."
아크가 얄미운 표정으로 혀를 쏙 내밀었다.
"유감이야, 로드 군! 나름 목숨을 걸고 던진 비장의 수였을 텐데."
"별로 신경 안 써. 요행으로 이기는 결말은 나도 찜찜하니까."
"오? 가끔은 멋진 말도 하네! 그런데 무슨 일로 내게 연락을 한 걸까나아?"
"협상을 하자."
아크의 눈썹이 꿈틀했다.
"헤에? 설마 정전협정을 하자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잠꼬대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이?"
"어, 그건데?"
"하!"
아크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너 정말 재밌다, 로드 군! 내가 그 여동생 약점 잡힌 멍청한 아로게쓰의 영웅도 아니고. 정전이라는 게 그렇게 내킬 때마다 할 수 있는 건 줄 아니?"
"아무리 완벽 주의자인 너라도 약점이 없을 수는 없어. 예를 들면……."
로드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전장이 아닌, 네가 통제하지 못하는 다른 전장의 상황이라던가."
"……너 설마."
아크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래. 글레이시온과 맞붙고 있는 네 '본군'이 있는 북쪽의 전장. 난 처음부터 그곳을 주목하고 있었어."
아크의 실력은 역시나 압도적이었다. 책략, 용병술, 그리고 본인의 무예까지 삼박자 모두 완전체에 가까웠다.
그래서 로드는 다른 곳을 주목했다. 아크가 강점을 보이는 전장에서 기를 쓰고 따라가 봐야 계속 끌려 다닐 뿐이다. 모략과 정보력이야말로 자신과 어비스의 진가였으니 상황을 넓게 보고 어떻게든 그 장점을 살려보려고 한 것이다.
아크가 다시 표정을 풀고 웃는 얼굴을 했다.
"아아, 뭔지 알겠다! 글레이시온에게 접촉해서 내가 어비스에 와 있는 사실을 알리고 공격을 부추긴 거지? 쯧쯧!"
아크가 허리에 한 손을 얹으며 검지를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이를 어째? 지금 글레이시온과 싸우고 있는 본군은 줄곧 나 없이도 싸워왔어. 그런 뻔 한 수작으로는……."
"틀렸어. 내가 정보를 준 쪽은 글레이시온이 아니라."
로드의 손가락이 화면 너머의 아크를 척 가리켰다.
"바로 너희, 카사르야."
"……뭐?"
========== 작품 후기 ==========
샤폴 / 공통점은 둘다 변태라는 거..
수아시 / 크으, 제겐 최고의 극찬입니다. 감사합니다.
Digimon0002 / A급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등장하기 이를 뿐이죠.
섹시파워 / 한결같은 피닉스. 저도 존경스럽습니다!
etb08222 / 저검 가지고 싶습니다. �
@어비스 제오프 / 글레이시온을 공격하라고 부추겨도 별 의미 없다는건 이번편에 나왔구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에요. 로드도 당일에 아크가 쳐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았죠. 다른 나라들도 전쟁에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부르면 쳐들어갑니다! 하고 기대리는건 아니에요.. 요는 시간입니다.
MoriyaSuwako / 한결같은 피닉스!
블라토 / 피닉스의 분량을? 왜죠? 이분...!
spadel / 아크는 무사했었습니다 ㅠㅠ 그리고 무슨 기구요?;; 히익;
빠빠기 / 세계관은 동일하고 용의나라 아르곤에서 다른 주인공이 플레이해요. 물론 이번작보다 스토리나 전개가 차이가 있어요. 전개가 엄청 빠름 ㅠㅠ
@SW스윈 / 기사들도 고유 능력은 쓰니까요! 그리고 이들은 기사만 대우받는 나라에서 아크가 발굴해낸 인재들입니다. 다들 독특한 분야에서 힘을 발하는데 검이 부족해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던 자들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