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73화 (73/296)

<-- 천재 게이머 -->

로드가 알란드에게 카사르 군사 정보를 넘겨주면서 자주 확인했던 사실이었지만, 북부 전장에 파견된 스파이는 꽤 오랫동안 카사르 쪽 신분으로 '위장 잠입'해있었다.

로드는 스파이에게 이쪽 정보를 카사르 측에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신뢰를 얻으라는 추가 명령을 내렸다. 밑밥을 깔아두는 것이다. 그리고 스파이는 정확히 지시대로 움직였다. 실제로 카사르 본군의 총사령관인 가웨인은 이 정보로 몇 번 짭짤한 재미를 보았고, 스파이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스파이는 위장 잠입해있으면서 카사르군에 대한 여러 흥미로운 소식들을 전해왔다. 그 중에서 특히 로드가 주목한 부분은 가웨인이 전투를 서두르고 있다는 대목이었다. '이번 달 까지다. 이번 달 까지 어떻게든……' 라고 중얼거리며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고 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 까닭을 몰랐지만… 아크 네가 병력을 이끌고 이곳에 오면서 대강 그림이 맞춰지더라고."

"…헤에, 흥미로운 걸. 그 추리 한번 들어나 볼까?"

"우선 네가 여기 온 것에 대해 몇 가지 의문점이 있었어. 첫째, 어째서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병력을 쪼개 우리 어비스를 침공했는가? 지금 상대하는 글레이시온에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야."

로드가 두 번째 손가락을 폈다.

"둘째, 네가 곳곳에서 긁어모았다고 말한 2군 병력치고는 훈련이 너무 잘 되어있어. 무엇보다 군주인 너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 이건 절대로 단기간에 끌어 모은 병사들이 보일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리고 마지막 셋째."

로드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아크를 노려보았다.

"이 전장에서 네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어. 카사르의 가장 우수한 전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네가 어째서 글레이시온의 전쟁터에서는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

"너는 에이스인 가웨인에게 모든 걸 맡겨버리고 왕궁에만 박혀 있었지. 만약 네가 처음부터 나섰더라면 전쟁이 이렇게까지 길어지지는 않았을 거야."

로드가 손뼉을 탁 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 성격과 성향을 이 상황에 대입해보니 그림이 나오더군. 가웨인은 카사르의 강력한 토착세력이었고, 아직 완전히 네 '장기말'로 만들지 못한 거야. 그렇지?"

카오스월드와는 달리 이번 주신전에서는 소속된 영웅 모두가 플레이어에게 복종하는 게 아니었다. 왕실을 견제하는 토착세력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어비스의 마틴과 유니벨이 그랬으며, 아로게쓰의 바얀이 그랬다.

아크의 표정이 다시 싸늘하게 굳어지는 걸 보며, 로드는 더욱 확신에 찼다.

모를 리가 있겠는가. 로드는 한때 아크, 그러니까 지구에서 프로게이머 시절로 활동했던 '강율'의 팬이었다. 덕분에 그의 성향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아크는 극단적으로 깔끔한 플레이를 추구했다. 게이머 출신임에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를 싫어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경계했던 것이 바로 아군의 '배신'이었다.

아크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내는 능력이 탁월했고 그들의 힘을 100% 이상 끌어낼 수 있는 군주의 자질 또한 갖추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말이 될 것. 아크의 이런 성향은 그의 연설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전체. 나 자신을 배제하고 전체의 일부로 움직여라.'

'짐이 그대들의 머리가 되어 주겠다. 지시에 복종하라. 그리고 짐을 믿고 앞만 보아라!'

아크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말이 아니면 믿음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배제했다. 믿을 수 없는 아군을 적보다 더 위험한 요소로 단정 지었던 것이다.

"한 달 만에 끝내야 한다는 가웨인의 그 초조한 발언도 이해가 돼. 내기를 했거나, 혹은 공략 기일을 정해두었겠지. 글레이시온과의 전쟁도 아크 네게는 그저 '에이스 길들이기' 정도에 불과했던 거야."

아크의 베스트 시나리오는, 자신의 2군 병력만으로도 어비스 영토를 획득한 다음, 그대로 본토로 올라가 그동안 가웨인이 지지부진 끌던 글레이시온과의 전쟁까지 깔끔하게 끝내버리는 것이리라.

가웨인의 입장에서는 기한을 맞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크의 업적과 비교가 되어 미래의 입지 또한 좁아진다. 그러한 마음의 틈을 아크는 노릴 것이다. 아크라면 그 상황을 활용해 가웨인을 감명시켜 완전히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 정도는 간단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로드가 계속 이어서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맞아떨어지더군. 북쪽의 글레이시온과 싸우고 있는 가웨인의 병사들이 카사르의 본군은 맞지만, 아크 너의 주력은 아니었던 거야. 오히려 너의 주력은 지금 여기서 싸우고 있는 2군 영웅들과 병사들이야. 본군에 비해 화력은 부족해도 완전히 네게 완전히 복종하는 장기말들. 그 편이 네게는 더 효과적이겠지. 그렇지 않아?"

"……로드 군."

아크가 몸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나 방금 소름 돋았어."

"내 예측이 너무 정확해서?"

로드가 거들먹거렸다. 아크는 시선을 살짝 돌린 채 홍조를 띄웠다.

"아니, 로드 군이 내 스토커였을 줄은 몰랐……."

"그 정도까진 아니야! 그냥 한 때 경기 좀 찾아봤었을 뿐이라고!"

로드가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당시 로드의 또래라면 강율이란 스타게이머를 모르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아크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무튼 대단해, 로드 군. 나에 대한 분석을 면전에서 들어보는 건 처음이라 흥미로웠어. 그럼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내가 퇴각해야만 할 이유를 들려줄 수 있을까?"

"아, 그래. 서론이 길었군. 내가 파고 든 부분은 가웨인이 전투를 서두르고 있었다는 점이야."

로드는 아크의 병력과 대치했을 때, 즉시 스파이에게 연락을 취했다. 지휘관 창 연구를 통해 습득할 수 있는 '전음 스킬'은 통신 수정구로는 닿지 않는 먼 거리의 스파이들에게 플레이어의 명령을 전달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물론 발신만 가능했고, 재사용 시간이 있다는 제한도 있었다.

로드가 전달한 메시지는 간단했다. 거짓 정보를 제공하여 가웨인을 움직이게 하라는 것. 즉, 그동안 뿌려두었던 떡밥을 회수하는 것이다.

스파이의 보고에 따르면, 가웨인이 공략 중인 요새의 서쪽 성벽에는 낡고 허름한 취약점이 한 부분 있었다. 그러나 그 성벽 부근은 크고 울창한 밀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가웨인이 그 포인트를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만약 밀림에 적병이 매복해 있으면 그대로 당할 위험이 있었기에, 그쪽으로는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로드의 지시가 떨어졌고, 스파이는 정보를 바꿔 이야기하였다. '내일 저들의 본토에서 병력이 충원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구장창 정문만 공격하니 정문 쪽에 수비병이 부족해져서 오늘 밤만 밀림에 매복해있던 병사들을 정문쪽으로 옮긴다고 합니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입니다. 양동전략을 쓰시지요.'

가웨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로드는 아직 스파이의 눈을 쓰지 않고 아껴두었기 때문에 결과는 몰랐지만, 예상은 할 수 있었다. 이미 몇 번의 사례로 검증된, 신뢰하는 정보꾼이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고 어필한다. 내일이면 본토에서 병력이 온다는 말까지 언급했다. 아크와 약속한 기한이 끝나가며 몸이 잔뜩 달아있을 가웨인이다. 하나만 걸리라며 잔뜩 벼르고 있던 그가 위험 부담 때문에 이 기회를 그냥 놓칠 것인가? 아마 가웨인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에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승부를 걸어야 할 때라고 생각해 전군을 동원할 것이라고 로드는 단언했다.

"물론 가웨인이 서쪽 성벽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글레이시온도 알고 있어. 내가 전쟁 전에 그쪽 플레이어에게 귀띔해줬거든. 카사르군이 올지도 모르니 밀림 쪽 매복해둔 병력들을 평소의 5배로 배치하라고. 지금쯤 북쪽은 늦은 밤이겠지? 슬슬 움직이고 있을 거야."

"……헤에, 카사르에게 정보를 준다는 게 이 뜻이었구나."

아크가 턱을 괴었다.

"참신하긴 하네. 글레이시온이나 타국을 움직여서 날 공격하게 하는 게 아니라, 역으로 내 부하에게 정보를 줘서 움직이게 한다는 거지? 흐음."

아크는 잠시 로드의 계책을 음미하듯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아직은 의문투성이인걸. 로드 군이 한 말이 거짓일 가능성도 있고, 가웨인이 그 보고를 듣고도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잖아."

"직접 네 눈으로 보는 게 낫겠지. 지금 바로 경과를 보여줄게."

로드는 1:1 대화 화면 옆으로 새로운 지휘관 창을 켰다. 살짝 긴장이 됐다. 로드도 지시만 했을 뿐이지, 그대로 이루어졌을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로드는 '스파이의 눈'을 발동한 다음, 지휘관 창의 새로운 화면에 연동시켰다.

'됐다.'

스파이가 보고 있는 시야가 화면에 나타났다. 로드는 그 홀로그램 화면을 손으로 붙잡아 아크가 볼 수 있도록 돌렸다. 스파이가 보고 있는 광경은 어둠이 깔린 밀림. 그리고 무수히 많은 병사들의 뒤통수가 보였다. 멀리 볼 것도 없었다. 저 병사들의 갑옷은 카사르 나이트들이 입는 것이었고, 어두웠지만 곳곳에 카사르를 상징하는 문장 또한 보였다.

"헤에, 정말이네. 가웨인 저 멍청이가……."

분노가 뚝뚝 떨어져 나오는 목소리로 아크가 중얼거렸다. 여기서 글레이시온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 통신 수정구를 쓸 수도 없다. 즉, 아크는 눈 뜨고 주력이 당하는 꼴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저런 곳에서 매복을 당한다면 대패가 예상된다. 최악의 경우에는 가웨인이 전사할지도 모른다.

아크가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좋아, 로드 군. 날 화나게 하는 건 성공한 것 같아. 하지만 이를 어쩌나? 내가 지금 그를 도우러 북쪽으로 올라간다 한들 너무 늦어버릴 것 같은데. 그냥 홧김에 여기서 로드 군의 병력을 전멸시키고 언더하임까지 진격하는 쪽이 더 빠를 것 같은 걸."

"워어, 진정해. 협상이라고 했잖아."

로드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내게 정보를 사라, 아크."

"무슨 말이야?"

"밀림이 비어있다는 게 거짓이라는 정보 말이야. 지금이라도 내 스파이가 가웨인에게 그 말을 하게 하면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다."

"……어떻게 스파이와 연락을 한다는 거지? 통신 수정구로는 닿지 않는 거리일 텐데."

"어비스에는 전음 스킬이 있거든."

아하. 아크가 수긍하듯 탄성을 흘렸다. 그도 어비스의 스킬에 대해서는 베타 테스트 정보를 통해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었다. 아크가 입술을 깨물며 고민했다.

"뭐, 내 제안을 무시하고 계속 싸워도 우린 큰 상관없어."

로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자 아크가 입꼬리를 올렸다.

"큰 상관없기는. 전쟁 내내 탈탈 털리다가 비장의 한 수도 빗나가고 먼저 협상이나 제안한 녀석이……."

"…비장의 수는 아직도 많이 남았어."

"약 팔지마, 친구."

아크가 다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정보의 대가는?"

"퇴각."

로드가 즉각 대답했다. 아크가 '쩝' 하고 쓴 입맛을 다셨다. 결국 원점으로 돌리자는 말이었다.

'여기서 어비스에 시간을 더 주면 귀찮아 지는데 말이지.'

아크가 고심하고 있는데 돌연 로드가 손바닥을 뻗으며 외쳤다.

"그리고 돈 내놔! 2천 골드."

"……으, 으잉?"

"뭔 좋은 착각을 하고 앉아 있어? 내 고객이 됐으니까 병력을 물리는 건 당연한 거고, 정보 값은 따로 내셔야지."

아크가 예상치 못한 펀치를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푸핫!' 하며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그 웃음이 요란한 폭소로 바뀌었다.

"너 정말 골 때리는 놈이구나?"

어떻게든 병력을 돌리게 하려 애를 써도 모자랄 판에, 돈을 또 요구하고 앉아 있다. 담력이 큰 건가 아니면 단순히 바보인 건가.

혹은 양쪽 모두 인가.

========== 작품 후기 ==========

맨발의첼시 / 그렇습니다. 허위사실유포지요..

고구마무침 / 언제나 뒤통수 조심

주용 / 각이네요!

spadel / 하렘은 죽창으로 심판해야 합니다!

천화백부 / 음, 어떤 부분이 답답하다고 느끼셨는지요?

니트지향 / 아크도 본인이 없는 곳에선 힘을 발휘할 수가 없지요오

Xedrions / 갸아악! 감사합니다! �!

모라논 / ㅠㅠㅠㅠㅠㅠ... 곧 바꿀생각입니다. 우선 77이 끝나면요!

아프게했어 / 경찰아저씨가 열일 하십니다..

火炎無 / 젠장! ;ㅅ;

@빛과하늘 / 하렘은 역시 죽창으로 심판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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