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인 스카우트 대작전 -->
어비스가 개척 시대가 된 이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문화 혁명'이라는 이능의 효과가 나라 전체에 부여되며 어비스는 겉과 속 모두 크나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국민들의 옷차림부터 시작해서 건축 양식과 식생활, 사상까지 많은 것이 바뀌었다.
단 시간에 '문명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카오스월드의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변화였다. 사람들은 그러한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큰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 채 생활했다. 가끔 누군가가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그랬던 거 기억나?' 라고 운을 때면 그제야 사람들이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하며 놀라곤 했다.
물론 현대인인 로드가 보기에는 기원 시대나 개척 시내나 그 나물에 그 밥, 비슷한 중세의 모습이었지만 확실히 '변화'는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어비스 내에서 조각상을 비롯한 조형물을 들이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학교 같은 교육 시설을 쓸데없는 것이라 치부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광산에서 하루 벌고 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어비스 사람들이 다양한 곳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것은 다시 새로운 변화의 발판이 되었다. 문화, 예술, 정치, 과학, 미술 등 변화는 그 영역을 가리지 않았다.
개척 시대부터가 이 정도인데, 과연 다음 단계인 문화 시대가 되면 '문화 혁명' 이벤트는 얼마나 클 것인가? 로드는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물론 그때까지 살아남는 게 가장 큰 문제겠지만 말이다.
'흐음, 그러면…….'
로드는 지휘관 창을 켜서 지도를 살펴보았다.
치열했던 마피아들과의 내전과 아로게쓰, 카사르와의 외전을 겪은 이후, 어비스는 나름대로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대륙 전체의 상황은 마냥 평온하다고 볼 수 없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같은 기원 시대가 지나가며, 개척 시대로 발전하기 직전의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각자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평화에 심취하고, 치열함을 잃은 채, 전쟁으로 멸망하는 나라들을 남 일처럼 관망하며 자신의 왕정을 가꾸는데에만 여념이 없던 플레이어들의 나라는 준비된 공격에 간단히 무너졌다.
지금까지 멸망한 국가는 다음과 같다.
1. 야만국가 아로게쓰 (멸망 보너스 : 어비스)
2. 흡혈귀의나라 드라큘레안 (멸망 보너스 : 하데스)
3. 음악의나라 베틀린 (멸망 보너스 : 게노세르크)
4. 광명의나라 루미너스 (멸망 보너스 : 이카루스)
5. 곤충의나라 카르프리 (멸망 보너스 : 카사르)
6. 해양국가 다이달로스 (멸망 보너스 : 가이아)
주신전이 중반으로 접어들며 총 6개국이 멸망했다. 이제 남은 국가는 16개이다.
이번 주신전은 변수가 많았다. 초반을 넘기기가 어렵다는 '속국 삼대장' 중에서 베틀린을 제외한 두 개국이 살아남았다는 것도 특별했고, 언제나 선호 국가 순위 1~2위에 뽑히던 다이달로스가 개척 시대도 못 가고 무너진 것 또한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현재 대륙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 받는 나라는 북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암흑국가 하데스'이다. 드라큘레안을 큰 힘 들이지 않고 간단히 무너뜨렸으며 그 힘을 온전히 흡수했다. 현재는 가이아와 국경을 맞대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 강자로는 서남쪽에 위치한 야수의나라 게노세르크를 꼽을 수 있었다.
이웃 나라인 베틀린을 무너뜨렸으며, 그 다음으로는 루미너스를 접수한 강대국인 이카루스와 전쟁을 벌여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결국 게노세르크는 이카루스를 몰아내고 거점 영토 6개를 홀로 독식하게 되었다. 본토까지 합쳐 무려 9개 거점 영토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또한 카사르는 퍼들스퀘어에서 물러간 이후, 놀랍게도 글레이시온에게 정전협정을 제안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 때문에 안팎으로 쪼들리며 계속 기원 시대를 유지하고 있던 글레이시온은 얼른 정전을 승낙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론적으로 놓고 본다면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카사르는 즉시 말머리를 돌려 반대편에 위치한 곤충의나라 카르프리를 침공했고, 너무나 쉽게 멸망시켜 버렸다. 카르프리는 삼면이 바다였으며, 정면에는 초반 약소국 알란드와 전쟁 중인 카사르밖에 없었으니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그들이 잦은 전쟁으로 단련된 기사들과 아크의 신들린 지휘를 막아낼 리 만무했다. 아크는 카르프리를 무너뜨린 후 다시 병력을 글레이시온 쪽으로 돌렸다.
글레이시온의 입장에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카사르를 상대로 잘 버텨왔지만, 잠깐 정전을 하고 여유를 가진 사이에 숙적이 더 강해져서 와버린 꼴이 된 것이다.
'글레이시온도 끝장이네.'
'카사르가 속국 받아 주려나? 아님 멸망 보너스를 먹으러 강공으로 가려나?'
역시 카오스 월드에서 가장 재미있는 건 남의 집 싸움 구경이었다. 안전한 본인들 왕궁에서 팝콘을 먹으며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플레이어들은 단언했다. 글레이시온이 살길은 이제 카사르의 속국이 되는 것뿐이며, 조만간 속국 제의를 들고 올 것이라고.
아무튼 어비스는 대륙 곳곳에 일어나는 격정의 포화 속에서 그나마 평화로운 편이었다. 한가지 위험한 상황이 있었다면, 어비스보다도 빨리 개척시대가 된 이웃국 '오펙투스'와 '알브헤임'의 병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스파이의 보고를 듣고 화들짝 놀란 로드는 병력을 집중시킨 채 두 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했고, 그 때문에 퍼들스퀘어 공략은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이것 참…… 내 영토 하나 먹는 것도 이렇게 남의 눈치를 봐야 한다니.'
로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혁명단이나 다른 특화 병종들이 완전히 가동되어 돌아가기 전까지는 함부로 병력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대로 웅크린 채 더 강해질 때까지 버티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 버티는 수 밖에 없지. 그런데……."
로드가 시선을 돌렸다. 그의 집무실에 떡하니 와 있는 손님이 보였다.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거냐!"
소파에 편안히 다리를 꼬고 앉아 지휘관 창을 끄적거리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챙이 넓은 마녀 모자를 눌러 썼고,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두 갈래의 보랏빛 머리카락은 끄트머리를 리본으로 묶어 귀여운 포인트를 주었다. 셔츠 위에도 커다란 리본이 하나, 하의 쪽은 짧디 짧은 스커트와 허벅지까지 오는 검정 스타킹을 착용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야 심심하니까요, 로드 오빠."
"……하아."
그렇다. 한국에서는 흔히 말하는 엄마 친구 딸이었으며 얼떨결에 이번 주신전에서 다시 만나게 된 두 살 어린 '설유라'였다. 에덴에서는 마녀의나라 켈타인의 왕, '치엘로 블랙노트'라고 불리고 있었다.
"아, 여기 딸기잼 쿠키 맛있네요."
치엘로가 바구니의 쿠키를 집어서 입에 넣으며 말했다.
"너 말이야."
로드가 책상에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경각심이나 경계심이란 게 전혀 없는 거냐?"
"응?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그도 그럴게 지구에서나 지인 관계였지. 이 세계에선 우린 서로 적이고 경쟁 플레이어라고. 이렇게 적진에 떡 하니 나타나셔도 되는 겁니까?"
천진난만한 얼굴로 눈을 깜박거리던 그녀가 옷깃을 여미는 자세를 취했다.
"앗, 어머. 그럼 저한테 이상한 짓이라도 하실 건가요?"
"…그럴 리가 없잖아!"
로드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그럼 됐네요."
그녀가 딸기잼 쿠키를 하나 더 집어 먹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저 미소의 의미는 무엇인가? 로드는 괜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하여간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다.
방금 전에 있었던 상황을 설명하자면, 치엘로가 갑자기 1:1 대화를 신청해왔다. 그리고 대뜸 이쪽 좌표를 물어보았다. 로드가 좌표를 불러줌과 동시에 그녀가 워프게이트를 타고 이곳으로 넘어온 것이다. 로드는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바로 이거구나. 켈타인의 워프게이트…….'
마녀의나라 켈타인.
그 이름처럼 흑마법을 사용하는 마녀들이 다스리는 나라다. 켈타인의 정통 흑마법은 여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쟁에 나가는 것도, 출세하는 것도, 국가의 중대사에 관여하는 것도 전부 마녀인 여자들이었다. 남자들은 주로 집에 남아 집안일을 하거나 힘을 쓰는 노역 등에나 동원되는 등, 다소 특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그리고 개척 시대에 도달한 켈타인이 연구할 수 있는 특화 스킬인 '워프게이트'.
워프게이트는 켈타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국가의 정체성으로 손꼽히는 기술로, 시공간을 넘어 대륙의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는 공간계 마법이다. 워프게이트를 습득한 켈타인은 거리나 영토에 구애 받지 않고, 앉은자리에서 모든 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카오스월드의 유일무이한 나라가 된다.
"그래도 어비스 같은 나라로 개척 시대까지 잘도 버티셨네요."
치엘로가 손톱을 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후후, 그야 당연하지! 내가 다스리면 어비스라도 충분히……!"
"로드 오빠가 잘한 게 아니라 사실 주위 6개국이 무능한 게 아닐까요?"
'……저 돌직구는 여전하구만!'
로드는 그녀가 과자를 먹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지구에서의 성장한 설유라의 모습은 나름대로 볼륨감을 갖춘 보기 좋은 몸매였으나, 저 치엘로란 마녀는 또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니벨처럼 빨래판 가슴까지는 아니었지만, 결국 또 소녀다. 로드는 잠깐 울화가 치밀었다.
'이 세계는 정녕 내게 억하심정이라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이브를 제외하면 유니벨, 베아트리체, 치엘로까지. 주위 여자들의 연령대가 낮았으니, 눈을 뜨는 건 불순한 욕망뿐이요, 어긋난 성욕뿐이었다. 특히 저번 유니벨 때는 여러모로 위험했다.
'흠, 그래도…….'
로드는 검은 스타킹에 감싸인 치엘로의 하얀 다리를 바라보았다. 훌륭한 각선미였다. 로드의 몸에 다크서클이 남아있던 것처럼, 그녀 또한 다리 정도는 건진 게 아닐는지.
"……어딜 보시는 건가요?"
시선을 의식한 치엘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쿠키 맛있어 보이네."
로드가 차분히 답했다.
"제 다리가 맛있어 보이는 게 아니구요?
"……흠, 흠. 꼬맹이는 취향에 없다."
로드가 애써 당황함을 숨기며 헛기침을 꾸며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넘기며 살풋 웃었다.
"원하시면 한 번 정도는 대줄 의향이 있을 지도."
"정말이……!"
쿵! 로드가 간신히 본능을 억제하며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와, 방심했다. 위험했다.
"하아, 젠장. 쪼끄만 게 말 좀 조신하게 안 할래?"
로드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노려보았다.
"뭐 어때요? 전 성인인 걸요."
"…네가 몸을 차지한 그 귀여운 치엘로 양은 그렇지 않단다."
"후훗. 제가 좀 귀엽긴 하죠."
"……쯧!"
치엘로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로드 오빠는 이런 부분에선 왜 이렇게 보수적이세요? 어려도 맛만 좋으면 그만 아닌가?"
"……그 망할 입 좀 조신하게 놀리라 그랬지. 그리고 그건 다 이유가 있어."
"뭔데요?"
"우리 아버지랑 어머니는 나이차가 스무 살 정도 나."
차분히 대꾸하던 치엘로의 얼굴에 처음으로 놀란 기색이 어렸다.
"…그래도 요즘은 나이차가 많은 결혼이 유행이잖아요? 그 정도는……."
"어머니께선 나를 고등학생 때 낳으셨지."
"세상에."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조신하게 입을 가렸다. 로드는 과거가 떠오르는 듯 한숨을 쉬었다.
"젠장,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얼마나 따가웠는지 알아? 그에 얽힌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려면 날을 꼬박 새도 모자라! 아무튼, 그래서 난 결심했지!"
로드가 주먹을 불끈 쥐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절대 어버지의 길을 따라 걷지는 않겠……."
"흐응."
치엘로가 웃음기 없는 냉랭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로리콤이시군요. 그랬어요. 로드 오빠는 유전적으로도 로리콤이었던 거였네요. 어쩐지 여자 친구 하나 못 만드시더니, 그런 안타까운 사정이……."
"네 마음대로 내 취향을 단정짓지마!"
로드가 울컥해서 일어났다가, 다시 열을 식히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자, 그럼 이제 본론을 이야기 해봐. 지휘관 창의 1:1 대화 기능으로 이야기하면 되는데 굳이 왜 여기까지 온 거지? 워프게이트 자랑하러 왔냐? 아니면 또 하데스 쪽 정보 알려달라고?"
"……."
치엘로가 잠시 뺨을 부풀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됐어요."
그리고는 콧방귀를 끼며 쿠키를 와작와작 씹는다. 반응이 영 살갑지 않은 게 뭔가 말실수를 한 것 같다. 호감도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얼른 망해버려요. 어비스."
"……말조심해. 여기가 그 어비스야. 몰매 맞는다?"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