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티아 그란디네 -->
며칠 후.
긴 상단 행렬이 루트의 서쪽 성문 앞에서 멈춰 섰다. 엘프 경비병들이 창을 세우며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이고, 수고들 많으십니다요. 나으리!"
상단 행렬의 선두 마차에 내린 닭 벼슬 머리의 남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가 상단 허가증과 거래 증명서를 내밀었다.
"하토르 상단입니다요."
엘프 경비병이 그것을 받아 보았다. 확실히 상단 지장과 관계자 낙인이 찍혀있었다. 그가 서류를 돌려주며 말했다.
"짐마차 안의 물건을 살펴보겠다."
"이봐."
맞은편의 경비병이 입을 열었다.
"하토르라면 거기야."
"아 참, 그렇군. 깜박하고 있었다."
엘프 경비병이 물러나며 턱짓했다.
"지나가도 좋다."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나으리! 이건 저희 상단에서 드리는 작은 성의입니다요."
남자가 은밀한 동작으로 주머니를 내밀었다.
"흠흠, 뭘 또 이런 걸 다."
라고 말하면서 주머니는 잘 챙기는 그들이었다. 닭 벼슬 머리 남자는 속으로 크게 웃었다. 신성한 숲의 일족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엘프들도 돈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엘프들이 이와 마찬가지로 썩을 대로 썩은 자들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위그드라실도 아니고 이런 허름한 영지까지 오게 된 엘프들은 죄다 윗사람들에게 밉보여 좌천된 자들이었다. 여기서 돈이라도 벌어가지 못하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리라.
통과 허가를 받은 닭 벼슬 머리 남자가 다시 마차로 올라와 외쳤다.
"출발하라!"
상단 행렬이 성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평범한 물건들이 실려있는 앞의 짐마차들에 이어, 노예들이 갇혀있는 후방 마차까지 무사히 성문을 통과했다. 남자는 그제야 안심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의 이름은 랄프. 하토르 상단의 부상단주였다.
하토르 상단은 상단 허가증을 발급 받아 명목상으로는 생필품을 취급하지만 그것은 위장일 뿐, 실제로는 인신매매를 주 업종으로 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 오래 잠복한 보람이 있었구만. 설마 페어리들을 찾아낼 줄이야! 하하하!"
그가 마차 안으로 들어가며 마부의 어깨에 턱 손을 얹었다.
"눈 좀 붙이고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이야기 해."
"예! 부상단주."
랄프는 푹신한 마차 소파에 몸을 기대어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그러나 안락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기분 좋게 한숨 자고 있던 랄프는 마부의 시끄러운 외침에 눈을 떴다.
"뭐야? 무슨 일이야?"
"큰일 났습니다!"
마부가 소리쳤다.
"…산적! 산적들이 나타났습니다!"
"뭐?"
"어서 나와보십쇼!"
마부의 닦달에 랄프가 직접 마부석으로 건너와 밖을 바라 보았다. 정말이었다. 한 무리의 산적 무리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마차의 정면에는 말의 전진을 막기 위한 기다란 쇠줄 같은 것이 쳐져 있었다.
"어, 어떻게 하죠?"
"쯧, 호들갑 떨지 마. 이 일하면서 어디 산적 한 두 번 만나보나? 우리 쪽 경비 병력이면 충분히 막을 수 있어."
그가 냉정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마차를 멈춰라! 단원들은 모두 무장하고 밖으로 나와!"
상단원들과 용병들이 하나씩 무기를 쥐고 뛰쳐나왔다. 랄프 본인 또한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가 검을 들고 나왔다.
"저, 저놈들은!"
"설마!"
상단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산적단에 깃발 하나가 나부끼고 있었다. 아무런 문양이 그려져 있지 않은 노란 단색의 깃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히, 히그마다!"
"히그마 산적단이다!"
"……뭐라고?"
랄프의 눈이 부릅떠졌다. 히그마 산적단이라면 대륙의 산적들 중에서도 최대 규모로 손꼽히는 산적단이었다. 습격한 자들의 금품을 빼앗는 건 물론이고, 성에 차지 않으면 꼬챙이에 몸을 꿰뚫어 죽인다는 악질적인 소문의 집단이었다. 이미 몇몇 상단원의 얼굴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했다.
"물러서지 마라!"
랄프가 검을 빼어 들며 소리쳤다. 여기서 사기까지 꺾이면 꼼짝없이 끝장이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우린 돈방석에 앉게 된다! 눈 뜨고 재산을 빼앗길 셈이냐!"
"그, 그래!"
"물건과 노예를 지켜라!"
상단원들이 결연한 얼굴로 마차 앞으로 걸어 나왔다. 딱 이번 여정이다. 이번 여정만 끝나면 그동안의 고생을 몇 배로 보상받을 수 있었다.
"예에이이이!"
"쏴라!"
산적단들이 언덕을 내려오며 짧디 짧은 단궁을 쏘아댔다. 단거리 무기에, 조준도 제대로 안하고 마구 쏴대는 것이었지만 갑작스레 날아오는 화살 세례에 상단원들은 혼란에 빠졌다. 적지 않은 숫자가 나가떨어졌다.
산적단이 계속 달려 내려오면서 2차, 3차 사격을 가했다. 방패가 없는 상단원들은 죽은 동료를 엄폐물 삼거나 마차 뒤나 바퀴 아래로 기어 들어가야 했다.
초장부터 기를 꺾어놓은 산적단들이 단궁을 내팽개치며 칼을 뽑았다. 선두에 선 수령 히그마가 소리쳤다.
"이히히힛! 놈들의 물건과 목숨, 모두 우리의 것이다! 가랏!"
"우오오오오오!"
*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 제대로 된 전투라고도 할 수 없었다. 속절없이 쓰러져가던 상단원들은 결국 상대가 되지 않음을 깨닫고 항복했다. 일확천금도 중요했지만 역시 목숨이 더 소중했다.
살아남은 상단원들은 단체로 밧줄에 묶인 채 바닥에 엎어진 꼴이 되었고, 산적들은 기쁨의 환호를 지르고 하이파이브를 하며 짐마차를 열어젖혀 전리품을 확인했다.
"엇, 저기 폐하께서 오십니다!"
상황이 종료되자 로드와 치엘로가 걸어왔다. 요란하던 산적들이 일제히 로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폐하! 이히히히힛!"
그리고 산적단의 수령 히그마가 요란 법석한 웃음소리로 맞이했다.
히그마는 혓바닥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길었는데, 입안에 온전히 들어가 있는 모습을 로드는 본적이 없었다. 언제나 입을 벌리고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모습은 SF영화에 나오는 외계 괴물을 연상케 했다.
"수고했어. 갑작스러운 부탁이었는데 빨리 움직여줘서 고맙군."
로드가 말했다.
"이히히힛! 별 말씀을요! 저희도 이런 불경기에 일거리를 제공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옆에 선 치엘로가 로드를 올려다보았다.
"책임 소재가 없는 군대라길래 뭔가 했더니… 산적을 움직일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후후, 그렇지? 산적이야 대륙 어디서든 출몰하는 천재지변 같은 존재니까."
"그런데 어떻게 왕인 로드 오빠가 산적을 움직일 수가 있죠?"
"대외비지만, 이 녀석들도 엄연히 어비스의 23개 클랜 중 하나야."
"……참 이상한 나라네요. 어비스."
산적이 나라의 대소사에 관여하다니, 치엘로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였다. 로드가 피식 웃으며 히그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노예들은?"
"히힛! 저기 오고 있군요!"
산적들이 노예로 붙잡힌 엘프들과 페어리들이 담긴 자루를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산적들이 뒤에서 '빨리 빨리 걸어!' 하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티아 말고도 다른 엘프들도 납치한 건가? 대담한 놈들이네.'
그녀들은 모두 노예치고는 좋은 옷을 입었고 영양 상태도 좋아 보였다. 팔려나가기 전에 나름의 호사를 누리는 것이리라. 물론 귀족에게 팔리는 순간, 지옥이 펼쳐지겠지만.
요즘 귀족들은 성 노리개로서 훈련된 닳고 닳은 노예는 원하지 않았다. 본인이 직접 노예를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하니, 그것을 빼앗아 가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게 귀족들의 주장이었다. 이런 세계에서도 고객들의 니즈는 계속 까다로워지고, 다채로워지는 모양이었다. 로드는 고개를 저으며 잡생각을 떠나보냈다.
엘프들을 데려온 산적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뭐해? 이 년들아! 폐하의 앞이다. 꿇어!"
"……큭, 비천한 인간 따위놈들에게!"
스르릉! 산적이 단번에 검을 뽑아 바닥에 내리쳤다. 그 살벌한 모습에 엘프들이 대경실색하며 무릎을 꿇었다.
"이봐. 심하게 다루지마."
로드가 말했다.
"엥? 오늘 이년들의 몸으로 질펀하게 놀아재낄 거 아니었습니까?"
그 말을 들은 엘프들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허튼 소리, 중요한 사람들이니 정중히 모셔."
큰일 날 소리였다. 같은 엘프인 티아 그란디네가 자신의 동족들이 로드의 부하들에게 수모를 겪은 일을 알게 되면 그나마 생겼던 호감 마저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로드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없었다. 티아 그란디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포대 자루에서 나온 페어리들 또한 티아의 집에서 봤던 것만큼 수가 많지 않았다. 로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히그마, 책임자를 데려와라."
"예이!"
산적들이 부상단주인 랄프를 로드의 앞으로 데려왔다. 반항을 했는지 산적들에게 얻어맞아 얼굴이 시퍼렇게 멍이든 모습이었다. 로드와 치엘로를 올려다 본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다, 당신들은!"
"이틀 전 뿌리에서 보고 또 보는군."
랄프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네 이놈들! 이 바닥에서도 지켜야 할 상도가 있거늘! 산적들까지 끌어들이다니 제정신이냐? 저 산적단 놈들이 네놈들 의도대로 순순히 놀아날 것이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너흰 돈에 눈이 멀어 실수한 거야!"
"……뭐?"
"……네?"
로드와 치엘로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아마 우릴 경쟁 노예상 정도로 보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아하, 그런 건가."
로드가 쪼그려 앉아 랄프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미안하지만 난 인신매매로 돈 벌어먹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거든."
"으, 으응?"
"나는 어비스의 왕이다."
랄프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타국의 왕이 어째서 루트에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새빨간 거짓말을…!"
"믿어주질 않는데, 어떻게 생각해? 히그마?"
로드의 물음에 히그마가 긴 혓바닥을 움직이며 허리를 숙였다.
"폐하! 아무래도 소인이 그에게 폭력으로 믿음을 심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히그마가 '폐하' 라는 호칭을 쓰는 걸 듣자 랄프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히그마가 천천히 다가왔다.
"잠깐! 잠깐! 아, 알겠소! 모,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그가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산적들이 행사한 폭력의 효과는 대단히 우수한 모양이었다.
"묻겠다. 티아와 다른 페어리들은 어디로 갔지?"
"크, 클라크가 데려 갔습니다!"
"클라크는 또 누구야?"
"저희 상단의 상단주입니다! 그… 뿌리에서 폐하와 검을 맞댔던……."
"아하, 역시 그 녀석이 상단주인가."
로드가 몸을 일으키며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이들은 꽝인 모양이었다. 이번엔 치엘로가 질문했다.
"그 클라크란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죠?"
"지, 지금쯤이면 이곳과는 반대쪽인 동문으로 빠져나갔을 겁니다."
히그마가 옆에서 노려보자 그가 술술 불었다.
"저와 클라크는 서로 다른 노예시장에서 노예들을 판 다음 만나기로 했었습니다. 한 시장에서 전부 팔아버리면 가격이 떨어질지도 모르니……."
로드가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았다. 클리크라는 자,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이 순순히 물러서지 않을 것을 예상했는지 대규모 상단 행렬로 시선을 끌고 본인은 다른 문으로 빠져나갔다. 일이 조금 귀찮게 되었다.
"그럼 그 녀석이 어느 시장으로 향할지 알고 있나?"
"그, 그건 저도 잘…… 제게는 이야기 해주지 않았습니다."
로드의 시선이 히그마에게로 향했습니다.
"불게 해."
"이히히히힛! 그거야 우리 전문이지요!"
히그마와 산적들이 랄프의 목덜미를 붙잡고 끌고 갔다. 랄프가 난 정말 모른다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로드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치엘로 쪽을 보았다.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하지?"
"후훗. 그걸 왜 저한테 물어봐요? 클라크가 어느 노예 시장으로 가는지 알아보는 거라면 정보의 영역이잖아요. 그리고 정보는 로드 오빠의 특기구요."
"그, 그렇긴 하지만… 끄응."
로드는 다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각 나라에 파견해 둔 스파이들은 모두 왕궁이나 주요 병력들이 있는 곳에 잠복해 있었다. 클라크가 어떤 노예시장으로 갔는지 찾아내는 건 힘들 것이다. 애초에 노예 시장은 불법이기 때문에 수도 같은 사람들의 눈에 많이 띄는 곳에 위치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노예 시장과 암흑가에 가장 빠삭한 사람이라면…….'
로드는 해결책을 떠올렸다. 사실 티아가 납치됐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염두해둔 방법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있었다.
‘그 녀석을 쓰는 건 엄청 찜찜한데…….’
로드는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여러 가능성과 장단점을 재보던 로드는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통신 수정구를 작동시켰다.
"…앗, 폐하!"
수정구가 켜지자, 정보부 요원이 벌떡 일어나 경례를 취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히그마 클랜장은 계획대로 움직여 주었습니까?"
"응, 그래. 그건 잘 해결됐고 달리 해줄 일이 있어."
"얼마든지 하명하시지요!"
로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직접 이야기 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 작품 후기 ==========
@akksi / 워프 게이트의 발현 및 워프게이트 통과에는 각각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립니다. 만약 적국의 집무실에서 워프를 열었다면 적국 또한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설정입니다. 오히려 역으로 포위해놓고 끌어들이는 방법도 가능하죠. 워프게이트를 공격해서 제거해버릴수도 있습니다. 점차 시대가 발전하며 마력 탐지 기구도 나오는 추세라 왕궁에 워프게이트를 열어서 다 없애는 사기적인 전략은 사실상 불가능하답니다. 물론 어비스+켈타인 조합이 좋은건 사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