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티아 그란디네 -->
다시 며칠 후.
유나이티드의 영토에 속해있는 작은 시골 영지. 몇몇 지도에는 표기조차 되어있지 않을 만큼 사람들에겐 알려지지 않는 장소였지만 이곳에는 특별한 게 있었다. 바로 ‘노예 시장’이 열리는 장소였다. 특정 날이 되면 각국의 상인들이나 거부들은 물론 이름 높은 대륙의 귀족들까지 이곳을 방문하곤 했다.
"딱 맞춰 왔군."
마차에서 내린 클라크가 기지개를 펴며 중얼거렸다.
"자, 물건들을 챙겨라.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나면 가치가 확 떨어지니까 조심히 다뤄."
"예! 상단주!"
부하들에게 노예의 취급을 맡겨둔 후, 클라크는 콧노래를 부르며 대기실로 향했다.
이곳에서 노예의 판매는 주로 경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한 번에 세 개의 경매 무대가 운영되고 있었다. 클라크는 경매에 앞서 엘프와 페어리가 나올것이라는 소문을 뿌려두었다. 아마 이번에 대박을 터뜨리면, 앞으로는 일할 필요도 없이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두 종족의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크큭. 역시 인생은 한방이라니까.’
마지막에 와서 이상한 방해꾼들이 끼어들긴 했지만, 별 탈 없이 잘 해결됐다. 혹시나 그들에게 랄프 쪽이 당해버려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데려온 페어리들만 제대로 팔아 넘겨도 엄청난 돈이 굴러들어올 테니까.
클라크는 경매 무대의 뒤편에 위치한 건물로 들어왔다. 어두운 조명이 비치는 컴컴한 실내 안에는 각기 각색의 노예들이 자신이 팔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꾼으로 팔려나갈 노예들이나 몬스터들은 팔다리가 벽에 구속되어 있었고, 성 노리개로 팔릴 여자들은 몸이 다 비치는 천 쪼가리를 걸치고 손이 묶인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오크, 인간 여자, 드워프, 가장 희귀한 건 수인족 정도인가.’
클라크는 코웃음을 쳤다. 역시 자신의 물건보다 우수한 것은 없었다. 이번 무대의 주인공은 틀림없이 자신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클라크 씨! 오랜만이네요."
서류를 든 관리자가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그래. 자네도 오랜만이야."
"듣자 하니 이번 상품, 대단하다면서요?"
관리자가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하하하! 그래. 기대해도 좋네."
"자, 자, 대기실로 오시죠. 조금 있다가 바로 클라크 씨의 차례입니다."
"음? 벌써? 앞에 몇 차례 더 남아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앞 사람 약속이 모두 취소가 되어버려서요."
그가 곤란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니 클라크님이 바로 준비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상관없지."
클라크는 무대 뒤편에 마련된 대기실에 들어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쪽 시설의 사회자를 써도 무방하지만 클라크는 본인이 직접 경매의 진행을 맡는 것을 선호했다.
조금 기다리니 상단원이 와서 노예들의 준비가 다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클라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목을 풀었다.
"클라크님! 관중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올라오시죠!"
"아, 그래."
마침내 그의 차례가 왔다. 클라크는 긴장한 기색도 없이 대기실 문을 젖히고 나왔다. 검은 커튼이 보였고 주위에는 그가 이번에 팔아 치울 엘프들과 페어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커튼 너머로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오늘 경매의 하이라이트틀 진행해 볼까 합니다! 하토르 상회의 클라크 씨를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름이 불려지는 순간, 클라크는 커튼을 젖히며 당당하게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클라크라고 합……."
그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언제나 만원 관중으로 가득해야 할 1무대였으나,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검정 일색의 슈트와 중절모 차림의 칙칙한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게 전부였다. 분위기도, 공기도, 평소와는 달랐다. 그들은 거만하게 다리를 꼬거나 퍼질러 앉은 채 무슨 소릴 하나. 하는 얼굴로 클라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관중이 아니었다.
‘이, 이게 무슨……!’
그때 클라크의 시선이 가장 앞자리에 앉아있는, 슈트를 입은 통통한 몸집의 여자에게로 향했다. 큰 머리, 튀어나온 턱, 분장처럼 두꺼운 화장이 보였다. 클라크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 했다.
‘……스, 스카 파치노! 마피아가 어째서 여길!’
"오래간만이군용. 클라크."
스카 파치노가 호호호! 웃으며 코맹맹이 목소리를 냈다.
"젠장할!"
클라크가 무대 뒤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커튼이 걷히며 슈트를 입은 남자들이 가로막았다. 옆의 사회자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도 협박을 받고 클라크를 끌어들인 듯 했다.
"옴마나! 눈물겨운 재회인데 어딜 가려고 하나용?"
그녀가 헤벌쭉 웃었다. 화장으로도 가리지 못한 턱 주름살이 살아있는 것처럼 출렁거렸다.
"스, 스카 파치노!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요? 분명 마틴 대부가 죽고 마피아들은 전부 언더하임의 지하 감옥에 갇혔다고……."
"조직의 돈을 때먹은 자는 지옥 끝까지 쫓아가용. 그것이 마피아."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천천히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또각, 또각.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가 이 바닥에 종적을 감춘 동안 아주 많은 일을 했더군용? 대부의 유언을 조작하여 모든 거래처를 가로챘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마피아의 사업장까지 마음대로 가져가서 운영하다니. 간땡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어용!"
"자, 잠깐만 스카 파치노! 뭔가 오해를!"
스카 파치노가 걸어 올라와 통통한 손가락을 뻗었다. 스릉! 손톱이 칼날처럼 길어져 클라크의 목옆에 닿았다. 목 아래로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우리 마피아의 규칙을 알고 있겠죵? 클라크."
"크, 크흑! 그, 그만!"
목에 댄 날카로운 날에 점점 더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오홍홍홍홍! 대부를 사칭한 죄는 결코 씻지 못해요. 그만 죽……."
"죽이지 말랬지."
퍽!
뒤통수를 얻어맞은 스카 파치노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녀가 핏줄이 튀어나올 듯 눈을 부릅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감히 어떤 놈이……!"
"나다."
마피아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스카 파치노 또한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드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서 있었던 것이다.
"오, 오홍홍홍홍! 폐, 폐하! 오셨군요!"
스카 파치노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허리를 조아렸다. 클라크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저 남자는 분명 루트에서 만난 그 애송이 모험가였다. 그런데 대체 정체가 무엇이길래 저 잔혹한 스카 파치노가 쩔쩔맨단 말인가!
"…네놈은 누구냐?"
클라크가 물었다.
"네 부하도 비슷한 물음을 했었지."
로드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클라크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랄프측에서 답신이 없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네놈의 짓이었느냐!"
퍼억!
클라크가 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요란하게 엎어졌다. 스카 파치노가 대뜸 이단 옆차기로 그를 날려버린 것이다. 쓰러진 몸 위로 그녀의 거친 발길질이 이어졌다.
"감히이! 이 분이 누구신지 알고 네놈! 네놈! 하는 것이죵? 건방지기 그지 없군용!"
퍽! 퍽! 퍽! 퍽!
뾰족한 구둣발이 그의 몸 구석구석을 찌르자 클라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 그만! 커헉!"
"……이봐, 스카 파치노."
로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다고 네 처우가 나아지거나 하진 않아."
"호, 호호호호홍! 저, 저는 그저 순수한 충성심에서……."
그녀가 무안한 표정으로 다리를 거두었다. 클라크는 피를 흘리며 로드를 올려다보았다.
"…대, 대체 넌 누구냐?"
"로드 폴렌티아다."
"……큭."
클라크가 고개를 떨구었다. 어비스의 국왕이라면 이쪽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몰라선 안 되는 인물이었다. 대륙 전체의 암흑가와 뒷세계의 왕으로 군림하는 존재. 한땐 대부의 꼭두각시라고 들었지만 지금은 마피아를 무너뜨리고 세력을 장악한 실세였다.
마침 마피아들이 클라크가 입수한 노예들을 데리고 나왔다. 구속이 풀리자 엘프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페어리들은 꺄르륵 웃으며 하늘을 빙빙 날아다녔다.
"로드 오빠."
무대 뒤편에서 노예들을 인도하고 있던 치엘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없어요."
"응?"
"티아 그란디네가 여기 없다구요."
"……뭐라고?"
로드의 시선이 클라크 쪽으로 확 움직였다.
"아하, 당신들은 그 여자가 목표였었지."
클라크가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말해라. 티아는 어디 있지?"
"미안하지만, 그녀는 벌써 팔렸다."
그 말에 로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챙! 채앵! 로드의 심기에 반응하듯 마피아들이 일제히 단검을 뽑아 올려 클라크를 겨누었다.
"똑바로 설명해."
로드가 차갑게 말했다.
"…크크, 이렇게 된 마당에 무엇을 숨기겠는가? 사실이다. 나는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 가장 값을 많이 쳐줄 것 같은 자들에게 그녀를 팔아 남겼다. 노예 시장까지 데려올 필요도 없었어."
치엘로가 로드의 옆으로 걸어와 삐딱하게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누구에게 팔아 넘겼다는 거죠?"
"엘프들이다."
"……!"
로드와 치엘로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자네들, 그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군. 왜 내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루트에 잠복했겠는가?"
클라크가 소매로 입가에 흐른 피를 슥 닦으며 말했다.
"티아 그란디네는 세계수 해방 전쟁을 이끌었던 반란군의 수장이었지. 그녀는 엘프가 아니라……."
정적 속에서, 클라크의 목소리가 똑바로 울렸다.
"모든 페어리들을 다스리는 존재, 티아 그란디네는 페어리 퀸이다."
*
한때 위그드라실은 엘프와 다크엘프, 페어리, 픽시, 그리고 엘프들의 세례를 받은 인간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하프엘프까지, 다양한 종족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이들의 평화는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순혈주의 사상을 가진 강경파의 엘프가 다음 알브헤임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엘프에 대한 자부심과 우월감으로 똘똘 뭉쳐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가진 삐뚤어진 감정은 조금씩 타종족에 대한 혐오와 분노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세계수에 더러운 발자취를 남기는 것도, 세계수를 훼손하여 집을 짓고 물건을 만드는 인간들을 옹호하는 것도, 모든 행위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어째서 숲의 일족도 아닌 자들이 이곳에 머무르는가!
왕의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순혈주의의 일환으로, 숲의 일족인 엘프를 제1귀족으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러한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다. 당연히 다른 종족들은 반발했다.
그들은 왕의 폭거에 조직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이에 분노한 왕은 타종족들이 힘을 합쳐 우리 엘프들을 세계수에서 몰아내려 한다며 다른 엘프들을 선동했다. 또한 세계수에 남을 수 있는 자들은 오로지 진정한 숲의 일족인 엘프뿐이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엘프와 나머지 종족들 간의 불화의 골이 깊어져 갔다. 물론 여전히 온건파 엘프들도 많았지만, 그들이 갈라지는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바로 강경파 엘프들이 최근 들어 위그드라실이 시들고 있는 것을 타종족들의 짓이라고 누명을 씌웠을 때였다.
결국 불만은 폭발했고, 왕은 강제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엘프를 제외한 나머지 종족들은 폭군에게 저항한다는 명목 아래 무기를 들고 뭉쳤다. 그렇게 1차 세계수 전쟁이 열렸다.
여기서 두 세력의 군대는 큰 차이가 있었다. 타종족들의 군대는 연합군으로서, 지휘관도 달랐고 명령 체계 또한 달랐으며, 전쟁에 대해서 각기 다른 성향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엘프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그들에게 대항하였고 결국 전쟁의 승리는 엘프들이 거머쥐게 되었다. 큰 사상자를 남긴 채 연합군의 군대는 강제 해산되었다.
패배의 대가는 컸다. 분노한 엘프들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타종족들까지 철저하게 탄압했고 왕은 그들의 퇴거 조치를 밟아갔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서,
티아는 세계수 전쟁에서 전사한 선대 대신 새로운 페어리 퀸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한번 버렸던 것도 쓰레기 통에서 다시 꺼내 재활용 하는 로드...
내일은 아마 쉴듯 합니다 ㅠㅠ 예비군 다녀올게요!
---------------
즐을가암요 / 그래도 클랜들이 뒷골목 세계는 꽉잡고 있죠.
아침과저녁 / ㅋㅋㅋㅋㅋㅋ 왕보다 클랜장이 더 권력이 강했을때 부터 막장이었던..
알테니아 / 사실 네이밍 모티브는 원피스 맞습니다.. 허허!
Xedrions / 한때 잠시 했던 하스, 손놈덱 부들부들합니다.
Speedwagon / ㅋㅋㅋㅋㅋ 어비스에 익숙해지셨엌ㅋㅋ
Digimon0002 / 칠무산 히그마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W스윈 / 히로인의 왕도! 사실 완전히 소꿉친구는 아니지만요...! 엄친딸 엄친아 관계
akksi / 좋네요. 전투 정보 유틸의 삼위일체!
무꾸914 / 그러네요. 엘프 노예들은 보너스... (�)
섹시파워 / 마피아 범죄 조직도 클랜원이었는데요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