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티아 그란디네 -->
젊은 지도자가 된 티아는 지금과는 달리 왈가닥이고 열정적인 성격이었다. 그녀는 세계수가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다 함께 가꿔온 보금자리인 위그드라실을 엘프들이 독차지하려는 것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티아는 이미 기울어진 연합군을 반란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이끌어 해방 전쟁을 일으키는 데 이르렀다.
'반란군'은 앞선 세계수 전쟁에서 연합군이 패한 원인을 서로 다른 지휘관과 명령 체계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번엔 책략가로서 우수한 자질을 갖춘 티아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모든 지휘를 맡겼다.
그녀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반란군을 이끌고 5배가 넘는 전력의 엘프군을 상대로 대등하게 싸웠던 것이다. 작은 몸집이지만 우수한 책략과 화려한 용병술로 적병을 농락하는 모습은 반란군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그녀는 적 병력을 절반으로 줄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엘프의 왕을 사살하는 커다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화를 더 키우는 꼴이 되었다. 엘프들은 격분했고, 티아는 압도적인 전력 차를 끝내 뒤집지 못하고 패하고 말했다.
엘프들은 피의 복수를 일으켰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세계수에 숨어 지냈던 선량한 종족들까지 모두 학살당했다. 이 학살에서 우드픽시는 완전히 멸종했고 당시 티아가 이끌던 페어리들 또한 멸종 직전까지 몰렸다. 티아는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어린 페어리들을 데리고 도망쳤다. 나머지 타종족들은 대륙 곳곳으로 흩어졌다.
추격자들의 눈을 피해 떠돌아다니던 티아는 페어리의 고유한 요술인 '폴리모프'를 통해 엘프의 모습으로 루트에 숨어 살았다. 그녀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이유는 하나, 바로 그녀의 손에 맡겨진 어린 페어리들을 보살피기 위해서였다. 어린 페어리들은 아직 엘프로 변신하는 폴리모프를 사용할 수 없었고 세상은 연약한 그들에게 너무나 위험했다. 페어리들은 위그드라실 출입 금지뿐만 아니라 '학살령'이 내려진 상태였으며, 타종족을 납치해 거래하는 인간들 또한 믿을 수 없었다. 티아는 어떻게 해서든 종족의 멸망을 피하기 위해 애쓰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설명을 마친 클라크가 한숨을 쉬었다.
"마을 사람들이나 같은 엘프들조차 정체를 모르는, 세계수의 뿌리 위에 숨어 사는 고고한 현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나는 그 부분에 주목했고 갖은 노력 끝에 그녀가 해방 전쟁을 일으킨 페어리 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게 그녀를 붙잡아 전쟁의 주범인 페어리 퀸을 찾고 있을 엘프들에게 넘겼지. 엘프 놈들이 워낙 짠돌이라 생각했던 것만큼 큰돈을 받진 못했지만, 그녀가 보살피던 페어리들을 확보했으니 손해는 아니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클라크의 시선이 로드와 치엘로에게로 향했다.
"네놈들을 만나게 된 거지. 빌어먹게도 말이야."
"스카 파치노."
로드의 말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그녀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열 번만 더 밟아."
"오홍! 명을 받듭니다용! 오홍홍홍홍!"
일방적인 구타 소리를 배경 삼아 로드와 치엘로는 다시 논의에 들어갔다.
"엘프들에게 넘겨졌다니 곤란하네요. 가만히 내버려두면 분명 처형당할 거예요."
"내 실수야. 위그드라실 쪽 동태를 살핀답시고 하나밖에 없는 스파이를 그쪽에다 파견해 놨으니… 외부 변수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는데……."
상황이 계속 꼬였다. B급의 인재를 얻는 과정이라 그런지 일이 좀처럼 쉽게 풀리는 법이 없었다. 어비스에서 알브헤임, 유나이티드까지 3개국을 돌아다니는데도 별다른 수확이 없다니…
로드의 시무룩한 표정을 본 치엘로가 '얍!' 하고 로드의 뺨을 쿡 찔렀다.
"인상 펴요! 그래도 티아가 목숨처럼 아끼는 페어리들을 모두 구해냈잖아요? 그녀는 로드 오빠에게 큰 빚을 진 거예요. 물론……."
그녀가 뺨에 닿은 손가락을 때며 이어 말했다.
"그녀가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지만요."
"…그렇지. 엘프들에게 넘겨졌다니까 위그드라실로 압송되었으려나?"
그때 퍽! 퍽! 울려 퍼지는 구타 소리 뒤로 클라크가 뭐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팔을 휘젓고 있었다. 로드가 팔을 들어 올려 스카 파치노를 멈추게 했다.
"할 말이 있나?"
"……처형식은 루트에서 열릴 것이다. 끄윽, 컥!"
클라크가 코피를 질질 흘리며 말했다.
"페어리들을 비롯한 모든 타종족들은 어떤 경우에서도 위그드라실과 엘프의 숲 출입이 엄금되어 있다. 그러니 처형식도 루트에서 치러지겠지."
"오호, 좋은 정보 고맙다."
로드가 다시 치엘로를 보며 물었다.
"네 워프게이트, 앞으로 얼마나 쓸 수 있어?"
그녀가 지휘관 창을 열어 보더니 대답했다.
"이제 두어 번 정도 밖에 못 써요. 자원이 부족해요."
"…곤란한 걸. 대체 무슨 자원이 부족한 건데?"
"다른 건 어떻게든 되겠지만… 음, 테라라는 광물이 있는데 이게 꽤 진귀한 재료거든요. 요즘은 매입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물량도 얼마 없어서, 아무래도 구하는데 조금 시간이……."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로드를 바라보는데 로드는 함박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에이, 그런 거였어? 진작 말하지!"
"그런 거라뇨! 요즘 테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구요!"
"테라는 내가 제공해줄 테니까 그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돼. 테라가 무한정이면 워프게이트를 얼마나 쓸 수 있는지 계산해서 알려줘."
"으으음, 알았어요."
로드가 주먹을 탁 맞부딪쳤다. 워프게이트만 자유롭게 열 수 있다면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베아트리체나 유니벨 같은 주력 영웅들도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로드의 시선이 다시 치엘로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시킨 계산은 안하고 즐거운 듯한 미소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치엘로."
"네에?"
"너 정말로 어비스가 테라 매입지라는 거 몰랐어? 테라를 노리고 나한테 접근한 거 아냐?"
그녀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귀엽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설마요오?. 그런 어려운 거, 치엘로는 잘 몰라요."
'확실하군. 확실히 알고 있었어.'
역시 영악한 녀석이다. 로드는 한숨을 쉬며 워프게이트로 누굴 데려갈지 생각해 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로드는 감옥에서 스카 파치노와 마피아들을 풀어주며 동시에 감시를 붙여두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직 그녀를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감시역은 혹시 모를 상황에 마피아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는 암살단원들로 구성해 두었다.
'그렇다면 혹시……!'
로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언제 왔는지 관중석에 후드를 뒤집어쓴 자들이 있는 듯 없는 듯 서있었다. 하지만 로드가 찾는 그 조그마한 체형은 없었다.
'직접 오진 않았나 보네.'
로드가 아쉬운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려는 순간, 마침 관중석 입구로 한 소녀가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였다! 로드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힘껏 외쳤다.
"베아야!"
절그럭. 소녀가 손에 쥔 단검을 떨어뜨렸다. 그리곤 로드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주인님!"
그녀가 달려오면서 로브에 달린 후드가 벗겨지자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찰랑거렸다.
지금 이 순간, 이 우주에는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재회를 알리는 재즈 풍 배경음이 깔리며 주위는 꽃 이팩트가 만발했다. 로드가 한쪽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렸다. 베아트리체가 그 위로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 로드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다리가 붕 떠올랐다.
로드는 그녀의 포근한 온기, 따뜻한 숨결, 몸에서 나는 기분 좋은 꽃향기를 만끽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아아, 이 감촉은! 나의 베아트리체가 확실했다.
"보고 싶었다. 베아야!"
"저도 보고 싶었어요!"
로드는 재회의 기념으로 그녀의 탱탱한 볼을 꼬집었다.
'……!'
그 순간 로드의 동공이 강하게 흔들렸다. 평소처럼 탱탱한 뺨이었지만 예전과 같은 탄력이 부족했다. 깜짝 놀란 로드가 그녀의 얼굴과 살짝 거리를 두어 다시 바라보았다. 아아, 이럴 수가! 남들은 똑같다고 생각하겠지만 로드는 그녀의 몸에서 일어난 아주 미묘한 변화까지 캐치할 수 있었다.
"여, 여위었구나! 베아야!"
로드는 목이 메이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하루에 몇 번 간식을 먹었느냐?"
"여섯 번이요."
로드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가 분명 떠나기 전에 하루 열두 번 꼬박꼬박 베아의 간식을 챙겨주라고 그리 일렀거늘! 내가 없으니 널 제대로 챙겨주는 사람이 없구나! 내 반드시 돌아가면 책임자를 문책하고 엄벌에 처할 것이다!"
"…그러지 마세요, 주인님."
품에 안긴 그녀가 뺨을 붉게 물들인 채 말했다.
"…저는 주인님을 만난 걸로 충분해요."
"베아야!"
"주인님!"
세상에 이런 천사가 어디 또 있겠는가! 절로 사랑스럽고 귀중한 마음이 들어 그녀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자기들만의 우주에서 감격의 재회를 만끽하고 있는데, 옆에 몇 걸음 떨어져서 한심하다는 듯 그 작태를 관람하고 있던 치엘로가 불쑥 말했다.
"……뭐죠? 그 꼬마는."
'아.'
그 말에 로드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원래의 우주로 돌아왔다. 스카 파치노도, 클라크도, 마피아들과 암살단원들도, 주위의 모두가 그들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로드는 머쓱한 표정으로 베아트리체를 내려주었다. 옆에서 치엘로가 오른손을 은밀히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아마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보는 것이리라. 오호 통재라! 사람을 보면 인사보다 스테이터스부터 확인하게 되는 플레이어의 슬픈 습성이여.
치엘로가 흠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헉, 저런 꼬마가 B급?"
"인사해, 베아트리체야. 이쪽은 치엘로."
베아트리체가 로드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물쭈물하더니 고개를 폭 숙였다. 치엘로가 환하게 웃으며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베아 언니! 치엘로라고 해요!"
'……이 녀석, 양심이 없는 건가?'
"꺅! 귀여워!"
치엘로가 달려들어 베아트리체의 뺨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베아트리체는 몸이 빳빳이 굳은 채 무방비로 뺨을 희롱 당했다. 베아트리체는 여전히 낯가림이 심했고, 얼굴을 마주보면 말조차 제대로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녀가 로드를 올려다보며 구해달라는 눈빛을 했다.
"이봐, 베아의 뺨은 내 소유물이니까 함부로 만지지 마."
"헤헤, 좋은 건 같이 좀 만져요!"
'역시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먼!'
그때 치엘로의 손이 딱 멈췄다. 뭔가 중대한 사실을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리곤 경멸의 눈빛으로 로드를 노려보았다.
"……하아, 로드 오빠."
"응? 왜?"
"역시 유전적 로리……."
"아냐! 베아는 스타트 영웅이었어!"
로드는 슬펐다. 왜 자꾸 이런 변명을 해야만 한단 말인가! 건전한 성적 취향을 의심받아야 하는 현실이 씁쓸했다.
치엘로가 양 손으로 베아트리체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베아 언니. 만약 로드 오빠가 이상한 짓 시키면 바로 저한테 연락하세요. 알았죠?"
베아트리체가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벌써부터 잠재적 범죄자 취급이냐.'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었다. 로드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클라크를 바라보았다.
"티아의 처형일이 언제인지 알고 있나?"
클라크는 잠시 스카 파치노의 눈치를 살피고는 말했다.
"…루트에서 처형한다면 얼마 안 남았겠지. 위그드라실에서 사람이 도착하고 얼마 안 가서 바로 처형식이 열릴 거다. 적어도 삼일 이내야."
"……서둘러야겠군."
그때였다. 로드의 어깨 위로 페어리 하나가 날아와 앉았다. 그녀는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그마했는데, 마치 반딧불처럼 은은한 빛이 몸에서 나고 있었다.
"…제발."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우리 여왕님을, 엄마를 구해주세요!"
그리고는 로드 쪽을 간절한 눈망울로 바라보았다. 엄마라, 아마 진짜 엄마는 아니겠지만 그녀들에겐 그와 같은 존재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다른 페어리들 또한 쪼르르 날아와 로드의 몸에 엉겨 붙었다. ‘구해주세요!’ ‘도와주세요!’ 그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반드시 구해낼게."
로드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뻗었다. 어깨에 앉은 페어리가 훌쩍거리며 손가락에 몸을 기대주었다. 아, 페어리도 귀여웠다.
"……."
그리고 다시 치엘로의 수상쩍은 눈빛이 느껴졌지만 로드는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오오, 잭팟 100 안에 들었군요! 감사합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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