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84화 (84/296)

<-- 티아 그란디네 -->

정말이었다. 저번에 집으로 찾아왔던 그 금발의 사내였다. 그가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러나 티아는 발을 때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본녀는 두고 가거라."

"……어째서죠?"

"본녀는 더 이상 살아 있을 이유가 없노라."

고개를 떨군 그녀의 입에서 너덜너덜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젠 지쳐버렸느니라. 그만 다 끝내고 싶다."

그 말은 로드에게 하는 것이기도 했고, 그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 순간의 부주의로 자식이나 다름없던 페어리들이 모두 인간들의 노예로 팔려나갔다. 더 이상 이 세계에 살아있을 염치는…….

"엄마아!"

바로 그 순간, 눈물이 핑 돌만큼 반가운 목소리가 귓가로 그녀의 날아와 꽂혔다. 그녀가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로드의 상의 주머니에서 페어리 하나가 고개를 쏙 내밀고 있었다.

"로로!"

"엄마아아!"

페어리가 날아와 그녀의 품에 안겼다. 티아는 그만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로로. 네가 어떻게 여기에……?"

"페어리들은 모두 무사합니다. 설명은 가면서 할 테니까 어서 가죠."

그제서야 티아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땠다. 베아트리체가 로드에게 달려드는 병사를 화려한 동작으로 베어 넘기며 소리쳤다.

"주인님! 그리 오래는 못 버텨요!"

"알겠어. 바로 간다!"

로드가 그녀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주위를 후드를 눌러쓴 자들이 호위하듯 돌아다니며 엘프 병사들을 저지했다. 이들 전원이 어비스가 자랑하는 최정예 암살단원들이었으니, 일반 병사들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베아트리체와 암살단원들의 활약으로 두 사람은 무사히 처형장을 빠져 나왔다. 그러고도 멈추지 않고, 마력까지 써가면서 계속해서 달렸다. 주위의 마을 경관이 빠르게 휙휙 지나갔다.

"당신이 느꼈었던 그 죄책감. 이제 뭔지 짐작이 갑니다."

로드가 달리면서 말했다.

"……그런가."

"당신은 당신의 의지로 해방 전쟁을 일으켰고, 패배했습니다. 그 대가로 수많은 목숨들이 사라졌죠. 페어리 뿐만이 아니라 위그드라실에 사는 모든 종족들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았기에, 로드는 계속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운명이었죠. 페어리는 멸족 위기에 처했고, 당신은 페어리 퀸으로서 그나마 살아남은 일족들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니까요."

"……."

"당신은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로드의 그 말에 티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대가 본녀에게 면죄부라도 줄 셈인가."

"아뇨."

로드가 계속 달려 나가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런 듣기 좋은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티아 그란디네.

"일족이 멸망 직전까지 내몰리게 된 건 그저 당신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신의 군대가 약해서, 당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적에게 패배한 겁니다.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이 적의 보복."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다시 체념한 듯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대는 잔인한 말을 꽤나 쉽게 하는구나."

"……미안하지만 계속하겠습니다. 과거의 학살도, 그리고 이번에 일족들이 다시 노예가 되어 팔려나가게 된 것도, 전부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약해서 그들에게 패했고, 그 대가를 치렀다. 그저 그뿐인 이야기입니다. 당연한 자연의 이치죠. 당신의 싸구려 죄책감이 끼어들 여지가 있습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더냐!"

마을 깊숙한 골목까지 들어오면서, 그녀가 로드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실 끊어진 인형 같던 그녀의 눈에서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묵혀두었던 감정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래! 본녀 하나가 죄책감을 느낀다 한들, 수백 수천의 목숨이 돌아오지 않음은 잘 안다! 하지만 나더러… 더 이상… 어찌하란 말이냐."

그녀의 목소리에 조금씩 떨림이 더해지며 가늘어졌다.

"본녀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힘도……."

"제가 그 힘을 드리겠습니다."

로드가 손을 내밀었다.

"저는 한 나라의 왕입니다. 제가 드리겠습니다. 종족을 보존할 수 있는 힘을, 누구도 업신여기지 못할 권력을, 그리고 학살자들을 멸할 수 있는 군사를."

"……."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티아 그란디네."

티아가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속세에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는가. 그것 또한 스스로를 속였을 뿐이었다.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일족의 보존, 학살의 복수, 그리고……."

그녀의 눈가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빼앗긴 세계수를 되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제게 서약하십시오. 그리고 소망을 이룰 힘을 얻으십시오."

그녀는 덤덤히 로드를 바라보았다. 로드도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 두 사람 간에 침묵이 일었다. 언어가 오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좋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 그러자 몸에서 눈부신 빛이 일며 페어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페어리가 된 그녀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위대한 세계수의 딸이자 모든 페어리들의 여왕, 나 티아 그란디네는 그대, 로드 폴렌티아의 검이 되기를 서약하노라. 나의 지식, 나의 목숨, 나의 심장은 지금 이 순간부터 모두 그대의 것이다."

"모든 무법자들과 낙오자들의 왕이자, 암흑가의 주인이며, 어비스의 군왕인 저 로드 폴렌티아는 지금 이 자리에서 티아 그란디네의 서약을 받아들입니다. 저는 그녀를 보호할 의무가 있으며 그녀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어떤 지원과 노력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으로서, 군주로서, 숨이 다할 때까지 그녀를 존중하고 이끌 것을 엄숙히 서약합니다."

로드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일으켰다. 그녀의 몸집이 작아서 허리를 꽤나 숙여야 했다. 그녀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주공(主公)."

"잘 부탁합니다. 티아."

두 사람의 맞닿은 손을 축하하듯, 로드의 시야 아래로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 티아 그란디네(B)가 소속 가신이 되었습니다.

- 티아 그란디네(B)의 휘하 인재들이 소속 가신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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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티아 그란디네

소속 : 어비스 왕실

직위 : 페어리 퀸

종족 : 페어리

무력등급 : (E)

통솔등급 : (C+)

지략등급 : (B)*

정치등급 : (D)

B급 지략형 클래스 입니다.

고유능력 : 의지의 영역

그녀는 일정 범위의 영역을 설정하고 그곳에 의지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 영역은 정해진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역량을 퍼붓습니다. 빈 땅에 초목이 자라나라고 명령하면, 땅의 지력이 올라오고 씨앗이 퍼트려지며 짧은 시간 내에 식물들이 빠르게 성장합니다.

일단 능력이 발현되면 그 공간 자체가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지만, 조건이 부족하여 시전자의 의도대로 가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티아는 한 번에 하나의 영역만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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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됐다. 종족도 엘프에서 페어리로 바뀌었군.'

처음에 만났을 때 그녀의 종족은 엘프라고 명시되어있었다. 스테이터스 창 정보의 현황마저 바꿔버리는 폴리모프 능력이라니, 사실상 둔갑이나 변신의 수준을 넘어선 '새로운 몸'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했다.

"뭘 그렇게 보고 있는가? 주공."

페어리가 된 티아가 로드의 얼굴 주위를 빙그르르 날아다니며 물었다.

"아, 아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만 더 가면 제 부하들이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병사들이 쫓아오기 전에 어서 약속 장소로 가시죠."

"알겠다. 그리고 주인인 주공이 본녀에게 높임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말을 낮추어라."

"뭐, 그럴까요?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지만… 혹시 나이가 어떻게……?"

"올해로 220살이네만."

"……."

"왜 그러는가?"

"아깐 까불어서 죄송했습니다. 누님."

"음?"

그렇게 로드는 티아에겐 계속 존대를 쓰기로 했다. 존중의 의미도 있었고, 왠지 그녀에겐 반말로 찍찍 명령하는 게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엘프의 모습일 때는 꽤 연장자로 보였으니까.

티아는 다시 엘프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함께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런데 너무 정신없이 달렸는지 잠시 길을 잃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두 사람은 어찌 어찌 시간을 더 소모하여 치엘로가 말한 약속 장소까지 도착했다.

"아, 정말. 로드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요오!"

치엘로가 허리에 손을 얹으며 뺨을 부풀렸다. 이미 마녀들이 워프게이트를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 정신이 없었어."

"으휴, 빨리 타요. 오빠네 어쌔신들도 엘프들을 따돌렸다가 각각 다른 지점의 워프게이트에서 빠져나갈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번엔 티아 쪽을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잘 됐나 보죠? 결국 로드 오빠 쪽으로 가게 됐나 보네요. 오빠가 실패했으면 내가 납치하려 했는데, 아까워라아."

"그렇게 됐다. 그대는 주공의 소속이 아니었던가?"

그녀가 '후훗' 하고 웃으며 머리에 쓴 밀짚모자를 비스듬히 내렸다.

"이래봬도 저도 오빠처럼 한 나라의 군왕이랍니다."

"…흠. 그렇다는 건 켈타인의 여왕인가."

그녀가 마녀들을 보면서 말했다.

"오호호! 정답이에요. 앞으로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잘 부탁해요."

"알겠다. 그대에게도 무운을 빌지."

로드는 먼저 티아를 워프게이트로 보냈다. 치엘로 또한 대기하던 마녀들을 워프게이트로 보냈다. 이제 남은 워프게이트는 두 개였고, 남은 사람도 둘 뿐이었다.

"넌 바로 켈타인으로 갈 거야?"

"네. 이제 우리 계약도 끝났고, 당분간은 자원이 없어서 게이트를 열지 못할 것 같아서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계산하는 듯 손가락을 몇 개 접더니 이내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3천 골드를 받아도 별로 이득이 없다구요오! 당분간은 꼼짝없이 긴축재정이에요."

"아쉬운걸. 저녁이라도 대접하려고 했는데……."

"그럼 먹을 거 말고 보수나 더 줘요!"

그녀가 세뱃돈을 요구하는 아이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뻗으며 말했다. 로드가 머쓱하게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뭔가 따로 보상을 하긴 해야겠는데, 눈치가 있어서 돈은 힘들 것 같고… 이런 건 어때? 우리랑 정기적인 테라 거래 계약을 맺는 거야. 유나이티드 쪽보다 훨씬 싼 값에 팔아줄게."

로드의 그 말에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정말? 정말이죠? 그 약속 꼭 지켜야 해요?"

"그, 그래."

"꺄아아! 고마워요!"

그녀가 달려들어 로드를 가볍게 안았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로드가 무안한 듯 시선을 돌렸다. 가슴에 얼굴을 묻은 치엘로가 슬쩍 고개를 올려 음흉한 웃음소리를 냈다.

"여전히 숙맥."

"……시끄러. 순수하다고 해다오."

두 사람이 동시에 피식 웃었다. 언젠가 한번 주고받았던 대화였던 것 같아서였다.

그녀가 로드에게서 떨어지며 손가락으로 척 가리켰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다음에 적이 되어서 만나도, 서로 원망하기 없기에요?"

"그래."

그녀가 등을 돌려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로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치엘로."

"네에?"

"그럼 우리 관계는 이걸로 끝이야?"

다시 뒤돌아본 그녀가 밀짚모자 챙을 잡아 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로드의 물음을 이해하려는 듯 입술에 손을 올리며 생각했다.

"…에엑?"

언제나 평온했던 그녀의 얼굴이 잠깐이지만 살짝 붉은기가 감돌았다.

"오, 오빠… 설마 지금 저한테?"

"음?"

"우엑, 뭐예요 그게! 한 거예요? 멘트 진짜 구려!"

"……너 또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냐."

그녀의 표정이 바로 정상적인 낯빛으로 돌아왔다. 조금은 싸늘한 느낌으로.

"흐응, 뭐 로드 오빠에게 그런 기대는 하지도 않았지만요."

"……뭔가 말투가 기분 나쁘군. 아무튼, 내 물음에 답이나 해줄래?"

그녀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지금까지 치엘로가 매긴 로드 오빠의 총점은 85점 되시겠습니다!"

"……아직도 그거 하고 있었던 거냐."

"축하해요. 로드 오빠는 커트라인에 아슬아슬 합격이에요! 하지만 지금 오빠와 동맹을 맺으려면 약간의 잡음이 생긴다고나 할까요? 당장은 무리! …라는 게 제가 지금 드릴 수 있는 답변이네요."

"그래, 그렇군."

로드가 홀가분하게 웃었다. 잡음이라,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어비스의 정보력과 켈타인의 기동력, 동맹을 맞는다면 두 나라의 시너지는 가히 우수할 테지만, 그녀가 사정이 있다고 밝힌 상황에서 동맹을 해달라고 때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든지 말해."

로드는 이렇게만 말해두기로 했다. 동맹의 창구는 언제든지 열려있다. 라는 언급을 해놓는 것이었다. 그녀도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치엘로는 이만 가볼게요. 빠빠이!"

그녀가 V자를 옆으로 세우며 워프게이트로 쏙 들어갔다. 시끄러운 여동생이지만. 뭐, 그동안 지루하지는 않았다는 점은 인정해 줘야 할 듯 했다.

'나도 그만 돌아갈까, 언더하임으로."

로드도 옆에 있는 워프게이트로 걸어갔다. 보랏빛 마력의 문 너머로 흐릿하게 언더하임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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