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고민 상담 -->
적적한 저녁.
날이 어두워지며 오늘 하루의 일과도 끝이 났다. 별도 많이 뜨지 않은 밤. 광부들은 고된 몸을 이끌고 휴식을 취하러 귀가했고, 가볍게 한 잔 걸치러 갈 사람들은 따로 모여 주점으로 향했다. 암시장의 상가 천장마다 걸린 홍등은 짙게 내려앉은 어둠을 몰아내며 따뜻한 느낌을 연출했다. 술꾼들은 한 손에는 맥주잔을 든 채 거리를 쏘다니면서 '위하여!'를 외쳐댔다.
그러한 야심한 시각,
한 남자가 성문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나무잔에 든 맥주와 조촐한 쥐고기 육포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남자는 맥주를 들이켰다. 지나가던 누가 보았더라면 젊은이가 밤에서 청승맞게 뭐 하는 짓이냐며 혀를 찼겠지만, 이 남자에게는 엄연히 대화 상대가 있었다.
"문짝아."
그리고 그 남자는 다름아닌 어비스의 국왕 로드였다. 그가 말하자 대답은 성문 몸체에 낙서 같이 생긴 이목구비로부터 돌아왔다.
"넵, 폐하!"
국왕과 성문의 조촐한 술자리. 실로 대륙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조합이었다. 로드는 성문에 등을 기대며 어둠이 주는 포근한 여유를 잠시 만끽했다.
"……내일이면 주말이 끝나고 유니벨이 출근할 텐데,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으음, '어떻게 하면 화를 풀어줄 수 있을까?' 라고 묻는 게 보통 아닌가요?"
"그거나 그거나."
'문짝이'가 언더하임의 명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저 그가 말하는 성문이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언더하임 주민들의 고민 상담자 노릇을 해주고 있었다.
친구 문제, 연예 고민 같은 평범한 것들부터 시작해서 사업, 결혼, 법률, 탈모, 심지어는 노후 대책까지. 그가 다룰 수 있는 상담의 범위는 황당할 정도로 폭넓었다.
이 괴짜 상담가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며 낮에는 그와 상담을 하러 사람들이 줄까지 서서 기다린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잘못을 저지르셨나요? 폐하."
"재정관인 유니벨 몰래 3천골드를 써버렸어."
고해성사를 하듯, 로드가 진중하게 말했다. 문짝이가 '흠?' 하는 신음을 흘렸다.
"거기에 켈타인과의 거래 계약도 내 마음대로 맺어버렸지."
문짝이가 다시 한 번 '흠?'하며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사실은 저번에도 비슷한 경우가 한 번 있었거든? 그때는 내 치명적인 매력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넘어갔지만…"
"……아, 예. 아무튼요."
"네 표정이 무척 거슬리지만 넘어간다. 아무튼 지금은 그때보다 더 상황이 좋지 않아. 3천 골드야. 그때의 수 배에 달하는 돈을 쓴 데다가, 이미 그녀가 한 번 넘어가준 잘못을 다시 저질러버린 셈이야."
문짝이가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정말로 고개가 있어서 저은 건 아니었지만 그런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요. 일주일 전에 폐하께서 사라지시고 나서, 그녀가 외치는 소리를 우연히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로드가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했는데?"
"순화해서 말씀 드릴까요? 아니면 적나라 하게 있는 그대로?"
"……이, 있는 그대로."
"뭐, 시발? 이렇게 돈을 지랄같이 써놓고 휴가? 두개골을 삼중 분해해서 간장에 절여도 박테리아들이 가래를 뱉으며 도피할 과학적으로 병신 같은 새끼! 이 머저리 육시랄 놈이! 돌아오면 뒤졌어. 찹쌀이 인절미가 될 때까지 명인의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조져주마아아아아!"
짙은 어둠 속에서 그의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라고 했습니다."
"……하아아."
로드가 땅을 꺼트릴 기세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 짧은 문생(門生)에서 그토록 살벌한 욕은 처음이었어요.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폐하께서는 매우 엿되셨습니다."
"…말 안 해도 알아. 그러니까 네게 상담하고 있잖아. 어떻게 하면 유니벨의 화를 풀 수 있을까?"
"무척 어려운 문제군요."
문짝이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고민에 빠졌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휴가가 아니라 군사를 구하러 알브헤임에 다녀왔으며, 3천 골드는 알브헤임에 가기 위해 켈타인 측에 지불한 금액이었다. 라고…"
"그건 안 돼."
"어째서요?"
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는 무리하지마.' 카사르와의 전쟁 때 유니벨이 울면서 하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마 사실대로 말하면 유니벨은 더 화를 낼 테니까."
"흐으으음, 그런가요?"
문짝이 곰곰이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휴가 다녀오셨다는 설정이셨죠! 그럼 그녀에게 기념품을 선물하는 건 어떤지요? 마음에 쏙 들어 할만한 걸로요! 여자들은 분위기에 관대하니까요. 휴가 갔어도 유니벨 씨를 생각해 주었다는 어필을 한다면 조금이라도 죄가 경감이 되지 않을까요?"
"오호! 제법인데?"
로드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나름 그럴듯한 방법을 제시해 줄 줄이야.
"그런데 유니벨이 좋아할만한 게 뭐가 있을까?"
"그녀의 또래가 좋아할 만한 거야 많죠. 예를 들면 달콤한 거라던가. 달콤한걸 마다하는 여자애는 없으니까요."
"…걘 별로 먹을걸 밝히는 스타일은 아니야. 요즘은 왕실에서 나오는 밥도 종종 굶더라. 꼴에 다이어트 한다면서."
로드가 육포를 질겅 질겅 씹으며 말했다.
"그렇담 귀여운 곰인형은 어떤가요?"
"이, 인형? 그 난폭하기 그지없는 꼬맹이가 인형? 좋아할 리가 없지."
"그럼 옷! 옷은 어때요?"
"……그 녀석 사이즈도 잘 모르고, 무엇보다 난 유니벨의 의상 취향을 도통 짐작할 수가 없어."
예전이 같이 암시장에 놀러 갔을 때, 화려한 거적때기를 들고 나타난 그녀가 '나 어때?' 하고 묻는 모습을 떠올리며 로드는 삐딱하게 웃었다.
"어렵네요. 선물…… 유니벨 씨가 좋아할만한 선물… 선물이라… 선물? 아! 이런, 내 정신 좀 봐!"
"왜 그래?"
문짝이가 입을 쩍 벌린 채 말했다.
"내일이 바로 유니벨 씨의 생일이잖아요!"
"어, 어어어엉? 저, 정말?"
로드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부하의 생일을 몰랐다는 미안함보다는 살았다! 라는 안도감이 더 컸다. 설마 본인 생일인데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겠는가.
"이걸로 됐네요. 폐하! 생일이니까 케이크와 이벤트로 갑시다!"
"……케이크는 알겠는데 이벤트는 또 뭐냐? 난 그런 분야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해서…"
"이벤트 하면 역시 촛불 아니겠습니까!"
"초, 촛불?"
로드가 몸을 흠칫 떨었다. 갑자기 몹시 불안한 예감이 밀려들었다.
"자자, 이건 제 전문 분야에요! 제게 맡겨주십쇼! 흐흐흐!"
'정말 믿어도 될까…'
저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은 좀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대안이 있는 건 아니었다.
"좋아, 한 번 들어나 보자."
"분명히 통한다니까요!"
*
다음날 아침, 유니벨은 언제나 같이 왕궁으로 출근했다.
정문을 통과해 정원을 걸어가고 있는데 오늘은 뭔가 분위기가 묘했다. 경비병들은 그녀에게 경례를 하며 묘한 미소를 지었고 정원사들 또한 그녀를 보며 쑥덕거렸다.
'…오늘따라 뭐야? 기분 나쁘게.'
그리고 그녀가 왕궁에 도착하는 순간, 그 불안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왕궁 복도에서부터 촛불로 길이 만들어져 있던 것이다.
"……?"
처음엔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 생각했었으나 그 촛불은 그녀가 출근하는 동선 그대로 이어져 있었다. 심지어 중간에 홀을 지날 때는 촛불이 하트모양으로 되어있었다. 메이드들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웃는 모습을 보며 유니벨은 감을 잡았다.
'……이건 대체 무슨 개수작이야?'
마침내 로드의 집무실에 도착한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생일 축하해, 유니벨!"
펑! 펑!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로드와 그의 도우미로 불려온 애니록스가 싸구려 색종이 폭죽을 터뜨리고 있었다.
"……"
머리 위로 색종이를 뒤집어 쓴 그녀가 고개를 돌려보니 테이블 중앙에 3층 생크림 케이크가 놓여있었다. 그 위에는 촛불까지 켜져 있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케이크를 바라보다가 로드를 보았다.
"…야.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하하하! 오늘이 네 생일이라고 들어서……"
그녀는 말없이 허리에 낀 서류철을 내려놓더니 소파에 놓인 쿠션을 들어올렸다.
"내 생일은 저번 달이었거든! 이 등신아!"
"케엑!"
로드가 쿠션에 맞고 나가떨어졌다.
"지금 누구 약 올려? 정작 생일 때는 밤 늦게까지 야근시켰으면서! 그때 집에 가서 얼마나 서러웠는지 알아?"
"……며, 면목 없다."
로드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괜히 안 하던 짓을 했다가 화만 더 키운 격이었다.
"……애니. 옆에 있어?"
로드가 엎어진 채로 조용히 말했다.
"네. 폐하. 그리고 애니록스입니다."
"빌어먹을 그 문짝이 놈, 나중에 눈 코 입 따로 담아서 내게 가져와."
"…아, 예."
"뭐어, 그래도."
그녀가 가뿐한 걸음걸이로 케이크 앞으로 다가가 촛불을 훅 하고 불었다.
"……따, 딱히 너 때문에 한 건 아니고. 안 불면 아깝잖아."
'…오오, 됐다!'
마침 이브가 열린 문으로 배꼼 안을 들여다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가네요."
"하하. 얼른 치우자. 나도 부끄러우니까."
"야, 팬더."
유니벨이 팔짱을 끼며 분위기를 잡았다.
"나 아직 화 풀린 거 아니거든? 3천 골드. 어떻게 된 건지 납득이 되게 말해라?"
"……윽."
로드가 필사적으로 변명을 생각하며 우물쭈물하고 있는 그때, 이브의 옆으로 티아 그란디네가 나타났다.
"다들 좋은 아침이다!"
언제 들어도 청아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니벨의 표정이 물음표를 그렸다. 그녀는 티아를 처음 봤던 것이다.
"…뭐야? 이 거유는?"
"아, 인사해. 앞으로 군사를 맡게 될 티아 그란디네야."
로드의 소개에 유니벨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엉? 구, 군사?"
"아까 두 사람이 하던 이야기를 의도치 않게 엿들어서 미안하다만, 그 3천골드는 본녀의 영입 계약금이었다."
티아가 그렇게 말하며 로드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렇지 않나? 주공."
"티, 티아!"
로드의 눈이 감동으로 그렁그렁해졌다. 과연, 빨래판 유니벨과는 달리 큰 가슴만큼 마음도 넓은 것인가! 저 풍만한 가슴에 돌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금으로 쓴 거였어?"
유니벨이 수상쩍은 표정으로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본녀가 요구했느니라. 3천 골드가 아깝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유니벨이 티아를 눈으로 슥 훑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자신의 텅 빈 가슴 쪽으로도 시선이 갔다. 로드는 '지금 어딜 보는 거냐?' 라고 툭 내뱉을 번 했다. 아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냈으면 지금쯤 정말로 인절미가 되어 바닥에 뒹굴고 있지 않을까.
유니벨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잘 부탁해. 유니벨이야. 곧 때려 칠까 생각도 하고 있지만 일단은 재정관을 맡고 있어."
"티아 그란디네다. 부족한 사람이다만,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노라."
두 사람이 악수했다. 어떻게든 분위기가 풀린 것 같자 로드가 속으로 안도했다.
"자, 그리고…"
유니벨의 싸한 눈빛이 로드로 향했다.
"진짜 이유는 뭘까나?"
'…이 녀석은 귀신이냐.'
그때 이브가 웃는 얼굴로 박수를 짝짝 쳤다.
"자, 자, 그만들 하시고 회의실로 가요. 지각하겠어요."
"그래! 가자!"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자 로드가 제일 먼저 집무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유니벨이 맥이 탁 풀린 표정을 지었다.
"으으, 그 월례 회의 꼭 해야 하는 거야? 어차피 또 '폐하의 신체를 개조합시다!' 같은 바보 같은 안건만 나오잖아."
"조금 귀찮아도 나라 일이니까요. 정기 행사는 꼬박 꼬박 해야 한답니다. 자아, 얼른요. 유니벨."
마치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보채는 마냥 이브가 유니벨의 등을 떠밀었다. 유니벨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능숙하구나, 총무. 연륜이 묻어나는 처세다."
유니벨이 사라지고 티아가 감탄한 듯 말했다. 이브가 훗 하고 웃었다.
"걸어 다니는 폭탄들도 오래 다루다 보면 노하우가 생긴 답니다. 자, 군사님도 가요."
"알겠… 앗, 깜짝 놀랐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언제부터 거기 있었느냐?"
그 말에 애니록스가 발끈하며 얼굴을 붉혔다.
"임시 정보부장 애니록스입니다! 아까부터 있었거든요! 그리고 어제 소개했었잖아요!"
"아, 그랬군. 잘 부탁한다. 애니."
"끄으아아!"
========== 작품 후기 ==========
보너스로 올려보는 그냥 외전! 저의 엄마 생일 선물 산다고 고민하던중 빠르게 써서 올려봅니다.
다음편부터 본스토리 나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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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마신 / ㅠㅠㅠ 감사합니다.
카드보험 / 앞으로도 지켜봐 주세용!
아스라히i / 간만에 훈훈한 마무리로 좀.. 하하
ads123 / 사랑이 충만한 로리에게 어찌 그런 참담한 말을!
MoriyaSuwako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아니 졸지에 인간이 아니게 되버렸어
포닥 / anytime!
Speedwagon / 응? 왜 저를 보시죠? 저도 아닌데요? 아니거든요.
nonononame / 감사합니다 ㅠㅠ 여러분 덕이에요!
ppk12 / 음, 명예로운 칭호(?)이군요.
당신만을위한슬픈렙소 / ��찰 아저씨! 제가 아니에요!
akksi / 히익! 아니거든요!!
火炎無 / 뭐죠? 라리카? 룰루킹? 잘 모르겠네에에..!
SW스윈 / 아ㅠㅠㅠㅠㅠㅠ 한 1분간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웃프구나!
키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님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