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들의 무도회 -->
대륙의 전황은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서남쪽 극단에 위치한 '야수의나라 게노세르크'는 주위의 세력들을 무너뜨리며 9개의 거점 영토를 가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런 게노세르크의 바로 위가 오펙투스와 알브헤임의 영토였으며, 다시 그 위로는 어비스가 위치해 있었다.
막 개척 시대에 진입한 오펙투스-알브헤임 연합은 어비스를 압박하려는 듯 병력을 전진 배치 시키는 움직임을 보였었다. 그 때문에 로드는 하나 남은 거점 영토인 '퍼들스퀘어'의 침공까지 미루고, 병력을 모으기만 한 채 잔뜩 웅크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게노세르크가 대두되면서 오펙투스 연합은 병력을 뒤로 물렸다. 하기야 뒤통수가 간지러웠을 것이다. 지금의 게노세르크는 2:1이라도 쉽게 꺾을 수 없는 강대국임이 분명했으니까.
로드는 여기서 게노세르크가 오펙투스 연합을 상대하기 위해 새로운 '동맹국'을 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벌써부터 게노세르크의 줄을 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오펙투스의 위에 위치한 과학의나라 알란드는 채팅창에서 적극적으로 게노세르크에 러브콜을 던졌으며, 알브헤임의 왼쪽에 위치한 백제 또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떡밥을 뿌리는 중이었다.
물론 어비스 또한 게노세르크의 유력한 동맹 후보 중 하나였다. 로드도 게노세르크라면 마다할 이유는 없었으나, 일단은 중립을 표방하는 입장이라 직접적인 관심을 표하지는 않았다. 물론 게노세르크 쪽에서 먼저 제의한다면 생각해 볼 의사는 있었다.
아무튼 게노세르크와 오펙투스-알브헤임 연합이 서로 견제하거나 싸워준다면 로드야 좋았다. 우선 두 국가의 압박에서 해방된 로드는 미뤄왔던 일을 하기로 했다.
로드는 티아에게 4천명의 병력과 베아트리체, 피닉스, 아란을 붙여주며 퍼들스퀘어를 공략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이 전쟁은 예상보다 싱거운 결말을 맞이했다. 전보다 더 압도적인 어비스군의 병력을 본 흑사회 무리는 수성을 포기하고 줄행랑을 쳐버린 것이다. 이렇게 티아의 첫 출정은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보고를 들은 로드는 혀를 찼다.
'저번에는 끝까지 성에서 버티길래 꽤 근성 있는 놈들인 줄 알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겁을 줘볼걸 그랬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로드는 농업이 가능한 영지인 퍼들스퀘어를 손에 넣으며 총 4개의 거점 영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흑사회의 고립 정책으로 영지 안에서 노예처럼 생활하며 갇혀 지냈던 영지민들도 어비스 왕실의 입성에 환호했다.
로드는 곧바로 적당한 정치형 영웅 하나를 보내 영주로 임명하고, 영지 안정화에 힘썼다. 워낙 잘 정돈되어 있는 영지라서 운영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흑사회를 잡아서 후환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 점은 찜찜하긴 했지만, 일단은 달리 신경 쓸 것이 많아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렇게 바쁘지만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 되었다.
로드는 언제나처럼 집무실 책상에 앉아 지휘관 창을 끄적거리고 있었다. 집무실에 놀러 온 티아는 소파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이브가 과제로 내준 두꺼운 군사 서적이었다.
"저기, 티아."
로드가 지휘관 창에서 눈을 때며 말했다.
"왜 그러는가? 주공."
"그냥 갑자기 든 생각인데요, 왜 계속 엘프의 모습으로 지내는 거예요? 페어리의 모습이 더 편하지 않아요?"
로드의 물음에 그녀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주공은 꽤나 실례되는 말을 하는군."
"…시, 실례였습니까?"
"본녀가 이런 설명을 하는 것도 우습다만, 폴리모프를 익힌 성인 페어리들은 남에게 원래 모습을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네."
그 말에 로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왜 그런 거죠? 이해가 잘 안 되는데…"
"그럼 하나 묻지. 어째서 인간들은 알몸이 더 편함에도 불구하고, 실내에서도 옷을 입고 지내는가? 따뜻한 실내에서는 딱히 의복의 온도 조절 기능이 필요 없지 않은가?"
"……아, 알몸이랑 동급이라는 겁니까."
로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페어리들마다 성향은 다르겠으나, 본녀는 오랜 세월 동안 이 모습으로 은거 생활을 해왔느니라. 페어리의 모습을 들키면 더 이상 루트에서 살아갈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오랜 시간 지내다 보니…"
"페어리의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게 더 부끄러워졌다는 거군요."
로드는 수긍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페어리의 모습을 노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성향에,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는 압박까지 합쳐지며 일종의 공포증처럼 된 모양이었다.
그때 티아의 얼굴이 뺨에 옅은 홍조가 띄었다.
"루트에서 서약을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지만, 음. 그때 본녀는 좀 창피했도다."
로드가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인간으로 친다면 대낮에 밖에서 나체로 무릎을 꿇린 격이 아닌가.
"……그, 그때는 죄송하게 됐습니다."
"괜찮다."
티아가 씩 웃으며 말했다.
"본녀의 부끄러운 자태를 봐버렸으니, 주공 또한 제대로 된 사내라면 책임져주겠지."
"……네? 뭔 책임요?"
"알아서 해석하거라."
"아니, 잠깐! 뭐요!"
티아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수다를 즐기고 있는 가운데.
'어?'
갑자기 로드의 시야 앞에 알림창이 떡하니 떠올랐다.
그 알림창은 '날 좀 봐주시오' 라고 말하듯 그의 시야를 정면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이런 형태의 불편한 알림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 곧 다른 공간으로 소환될 예정이오니, 계약자 여러분들은 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느, 느닷없이 무슨 소리야?'
"왜 그러는가? 주공?"
티아가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
로드는 말을 멈췄다. 갑자기 입술이 굳어져 버리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내 몸 전체가 물에 젖은 듯 묵직해지며 멈추어 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뿐만이 아니었다. 티아도 멈춰있었다. 아니, 이곳의 시간 전체가 멈춰지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 소환을 시작합니다.
화아아악! 그의 시야가 새까만 어둠으로 뒤덮이더니, 난데없이 발 밑이 쑥 꺼져버렸다. 곧이어 아찔한 추락감과 함께 그의 몸이 시커먼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 우아아아아악!'
로드는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손과 발의 감각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리와 엉덩이에 바닥의 감촉이 닿아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은 시야가 사라지며, 서서히 주위가 분간이 되기 시작했다.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로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긴……?'
어딘가의 연회장 같았다. 처음 주신전을 치르게 됐을 때의 연회장과는 다른 곳이었지만, 구조는 거의 비슷했다. 로드뿐만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 모두 로드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Yo! 어서 오십시오! 계약자 여러분들!"
그들의 정면에 있는 무대에, 광이 번쩍 나는 검정 가죽옷을 입은 남자가 손가락을 치켜 들고 소리쳤다.
"하하하! 저는 최고신 중 하나이자! 우주 최고의 DJ! 오딘입니다! Yeah!!"
'……저 양반이 또 왜?'
다들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오딘을 올려다 보았다.
"Yo! 이제 주신전도 중반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동안 주신전을 치르느라 고생하신 계약자 분들을 위해 작은 연회를 준비했으니 모쪼록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아, 물론 에덴과는 별개의 차원이기 때문에 그쪽 세계의 시간이 흐를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야말로 홀리데이!"
'아하, 그런 건가…'
이제 진정이 된 로드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카오스월드의 베타 테스트 때도 이런 식으로 게이머들을 오프라인으로 불러내 휴식을 취하게 하며 동시에 외교 분쟁들을 유도했는데, 아마 주신전도 그러한 일정을 똑같이 따라가려는 듯 했다.
"그런데 다른 신 분들은요?"
"아테네 님을 불러주세요!"
"오시리스 님!"
플레이어들이 자기 담당 신을 찾자 오딘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죄송하지만 이번 연회 때는 담당 신들을 만날 수 없습니다. 아직 16개국이나 남아 있기 때문이죠. 담당 신들은 차차 때가 되면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이번 연회는 어떤 전략적 요소가 있는 게 아닌, 단순한 휴식을 위한 자리입니다!"
몇몇 플레이어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로드도 마찬가지였다.
'간만에 이시스님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로드는 잠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금발이었다. 하진성이 아니라 로드의 몸 그대로인 듯 했다.
"자! 이 시간 동안은 폭력과 절도 행위를 제외하고는, 무엇을 하든지 자유입니다! 홀에 다양한 편의시설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각 방의 열쇠는 지금 드리지요."
오딘이 허공에 손을 가볍게 휘젓자 플레이어들의 눈 앞으로 황금빛 열쇠가 나타났다. 로드가 그것을 잡았다. 키 몸체에 15라는 숫자가 파여있었다.
"이 세계의 시간으로 18시에는 오찬과 무도회가 있으니 꼭 이 중앙홀로 와주십시오! 달리 다른 일정은 없습니다!"
오딘은 '그럼, 해산…' 이라고 말하려다 뭔가 생각난 듯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 깜박할 번 했군요. 무도회 파트너를 정해드려야죠!"
"……"
로드가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파트너는 또 무슨 놈의 파트너란 말인가. 오딘이 팔을 휘두르자 플레이어들의 이름이 적힌 카드가 나타나 공중에서 화려하게 섞였다. 그가 말했다.
"남녀 비율이 딱 맞지 않으므로 남자 파트너끼리 걸릴 수 있는 부분은 좀 양해를 좀 부탁드립니다! Yeah!"
'Yeah는 무슨! 그냥 하지 마요!'
모두의 무언의 항의를 무시한 채, 오딘은 각자의 카드를 플레이어들 앞으로 소환시켰다. 로드는 한숨을 쉬며 카드를 받았다. 무도회라면 춤을 춰야 할 텐데 춤은 로드의 인생에서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카오스월드를 따라 할 거면 이런 건 좀 빼주지.'
로드가 투덜거리며 카드를 뒤집어 보았다.
- 세레스티나 윈슬렛.
"자, 그럼 모두들 편안히 즐기시길!"
플레이어들은 처음에 당황했던 것과는 달리 빠르게 상황에 적응했다.
홀 중앙의 진열대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과 음료가 놓여 있었고, 신화 속에서 나올법한 요정들이 잔잔한 음악을 연주했다. 플레이어들은 여러 테이블을 오가며 다른 플레이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올라가야겠다."
"저도요. 먼저 들어갑니다."
"같이 2층에 가볼래?"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홀에 남아 수다를 떠는 사람들, 식사를 하는 사람들, 시설을 둘러보겠다는 사람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 등으로 나누어졌다.
로드는 역시 방으로 올라가려는 쪽이었다. 그는 가볍게 플레이어들과 인사만 나누고는, 빠져 나왔다. 이런 사교 분위기는 영 체질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또 저녁에 연회를 한다니까, 기왕 휴식이라고 했으니 간만에 푹 쉬어야겠다.'
로드는 개인 방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 그가 배정받은 15번 방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방은 중세 형태가 아닌, 지구에서 보던 현대식 호텔방처럼 되어있었다. 화장실도 널찍했고 고급스러운 외형의 욕조, 세면 도구도 빠짐없이 갖춰져 있었다. TV는 없었지만 침대나 에어컨, 냉장고 등 모두 지구의 것과 동일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물과 시원한 맥주, 과일과 먹거리들이 잔뜩 채워져 있었다.
'오오, 바이네켄!'
로드는 간만에 맛보는 지구의 맥주를 한 캔 따서 원샷하고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극세사 이불의 아늑한 감촉에 몸이 나른해졌다.
'역시 문명이 최고야.'
로드는 눕자마자 금방 눈꺼풀이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 작품 후기 ==========
푸른물결2 / 히익!?
Leessa / 사실 외전이라 보너스였습니다 ㅎㅎ;
SW스윈 / 다른건 그렇다 치고 제 성향을 그대로 드러낸다니.. 저기욧!
낙지팡 / 가, 감사합니다... ㅠㅠ
블라토 / 암살의 필수 조건인 은폐 기술의 수준이 상당히...!
ppk12 / 나라 이름을 바꿔야 겠어요 ㅠㅠ
Xedrions / 주륵 ㅠㅠㅠ 애니야 지못미
Speedwagon / 로리 거유가 아니라 그냥 거유거든요! 빼액! ㅠㅠ
ads123 / 나는 정상인이다
ghost0590 / ㅊㄷㄹ는 훌륭한 속성입니다. ��!
@신천홍 / 오옷, 새로우신분 감사합니다! 연참 못해드려서 죄송해요 엉엉
@MoriyaSuwako / 응? 어떤 결말이길래요?;
@로리콤MK / 오오! 맞아요! 로리는 사랑! 로리는 아껴줘야 하는 겁니다!!
@한계지점돌파 / ㅠㅠ 힘들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