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들의 무도회 -->
무도회 시각이 다 되었다. 로드는 본인이 설정해둔 적 없는 의문의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버텨보려고 했으나 결국 알람의 소음 폭격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났다. 그가 상체를 일으키자 약 올리듯 알람 소리가 뚝 끊겼다.
로드는 잠시 멍하니 침대에 앉은 채로 있었다.
'와, 내가 정말 카오스월드를 했었던가?'
현대의 환경에 둘러싸여있으려니 현실감이 묘하게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에덴에서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뺨을 탁탁 두들기며 상념에서 깨어난 로드는 화장실에서 간단히 씻고 나와 방 구석에 있는 옷장문을 열었다.
"하아…"
아주 값비싸 보이는 정장들의 향연이 펼쳐져 있었다. 대놓고 무도회 복장들 밖에 없었다. 로드는 그나마 덜 화려해 보이는 검정 정장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웅성거리는 말소리와 감미로운 연주 음악이 들렸다. 이미 많은 플레이어들이 홀의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심지어는 아직도 이곳에 도착했던 복장 그대로인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제서야 자기 방으로 돌아가 무도회 복장으로 갈아입으려고 하는 듯 했다.
'하하, 그렇게도 할 말이 많나?'
로드는 기지개를 쭉 펴며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이렇게 제대로 자본 적이 얼마 만이었던가? 몸에 쌓여있던 피로가 말끔히 풀린 것 같았다. 로드는 홀로 내려오며 아는 얼굴이 있는지 주위를 가볍게 훑어보았다.
가이아의 요한 라티나, 에브게니아의 스콧 줄리아가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분명 치고 박고 싸우던 원수지간일텐데, 하필이면 파트너가 된 모양이었다. 요한의 느끼한 목소리가 들렸다.
"Ms. 스콧! 자. 일어나요! 저와 함께 Stage로 가시죠!"
"좀 꺼져요."
로드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아크가 보였다. 역시나 인기남. 아크 또한 아직 동맹이 없으니, 주위는 그와 동맹을 맺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얍!"
뺨에 닿은 손가락이 느껴졌다. 로드가 옆을 슥 노려보자 치엘로가 배시시 웃으며 서 있었다.
"잘 지냈어요? 생각보다 금방 또 만나게 됐네요."
로드가 그녀의 손가락을 붙들어 내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다. 난데없이 플레이어 집합이라니…"
"귀찮게 생각하지 말아요. 동맹국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요? 이제 주신전의 중반부터는 개인전보다는 팀전! 아군을 잘 만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요."
"그렇지, 뭐."
"아, 로드 오빠 파트너는 누구예요?"
로드는 오딘에게서 받은 카드를 들어올렸다. '세레스티나 윈슬렛.' 주신전을 치르면서 거의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흐응, 아르곤의 플레이어네요."
"네가 예전에 조심하라고 했던 그 사람 맞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요! 그런데 이 사람, 그동안 모습도 안 비추고, 채팅창에는 말 한마디 안하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지경으로 존재감이 없었죠."
"줄곧 섬에 틀어 박혀 지냈으니까."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아요?"
치엘로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렇긴 한데……"
로드가 수상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결정! 그럼 어서 가서 레이디를 에스코트 해 오라고요!"
치엘로가 로드의 등짝을 탁 치며 말했다.
"찾아서 어쩌라고… 난 왈츠 같은 거 전혀 못 춰."
"에이, 춤을 추지 않더라도 일단은 오늘의 파트너니까, 찾아가서 인사는 하고 오는 게 예의잖아요!"
"…내 파트너의 일인데 네가 왜 이렇게 적극적이냐?"
"혹시 파트너에 대해 알게 되는 게 있으면 저도 좀 알려달라구요. 헤헤."
'……역시 그런 속셈이군.'
하지만 로드도 호기심이 생기는 건 사실이었기에, 파트너인 그녀를 찾아나서 보기로 했다.
'어디에 있으려나.'
20분 정도 홀 주위를 돌아다녀봤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면 무도회에 나올 의사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아직도 방에 있나? 그게 아니라면……'
로드는 홀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복도를 가로질러 쭉 걸어가자 달빛이 들어오는 야외 테라스가 보였다.
'보통 이런 자리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밖으로 자주 나오더라.'
물론 정보의 소스는 로드 본인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밤공기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은하수와 별들이 빼곡하게 박힌 밤하늘이 펼쳐졌다. 확실히 지구와는 다른 세계라는 사실을 이 밤하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별이 너무나 많고 밝아서, 잠시만 쳐다보아도 눈이 피로해지는 기분이었다. 한 밤중에도 조명이 따로 필요 없을 만큼 주위를 분간하기도 수월했다.
로드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긋하게 야외 테라스를 거닐었다.
'아.'
그리고 찾아냈다.
하얗게 샌듯한 백발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테라스의 난간에 몸을 기댄채 상념에 빠져있었다.
"안녕하세요? 세레스티나 님 되시는지요?"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유니벨의 진홍색 눈동자보다도 더 진한, 피처럼 새빨건 적안이 로드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는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메두사의 눈을 바라본 것처럼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
그녀가 한 번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아까의 물음에 대한 답인 듯 했다. 로드는 이제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
"…하하하, 안녕하세요. 파트너가 된 로드 폴렌티아라고 합니다."
그녀는 아예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바라보며, 고개를 다시 한 번 끄덕인다.
로드는 비로소 그녀를 살필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가슴 시릴듯한 새하얀 백발과, 피처럼 붉은 적안. 아름다운 얼굴. 여자치고는 큰 키와 육감적인 몸매. 그러나 이러한 신체적 특징들은 그녀의 묘한 분위기에 묻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거리감. 애당초 '차원'이 다른 존재인 것 같은, 그런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부분이 오히려 더 로드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섬에 박혀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은 채 잠적해있는 플레이어. 그녀는 어떤 성향일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지구에서의 행적 또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로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도회가 시작됐는데… 같이 홀로 돌아가시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딱 물음에 대한 최소한의 반응만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자신의 시간을 방해한 로드를 귀찮게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흠, 그렇다면 흥미가 생기도록 어필을 해볼까.'
로드는 잠시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저도 2차 픽 때 아르곤을 선택했었죠."
반응이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붉은 눈동자를 움직여 로드를 바라본 것이다. 일단 관심을 사는데 성공한 듯 했다.
"깜짝 놀랐습니다. 설마 2차 픽으로 아르곤을 가져갈 생각을 한 사람이 또 있었다니… 더군다나 그 플레이어는 저랑 똑같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죠. 발전 방향은 '드래곤 마스터리', 국가 운영은 지리적 이점을 살려 섬에 틀어박힌 채 발전에만 집중. 무슨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니까요."
로드는 팔짱을 끼며 느린 걸음으로 테라스를 돌아다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시선 또한 함께 움직였다.
"물론 발전만 하기에는 옆 동네의 해양국가, 다이달로스가 거슬리죠. 저라면 가이아나 에브게니아를 교묘하게 끌어들여 그들을 무너뜨릴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이아가 다이달로스를 잡았더군요. 제 이상과 너무 똑같이 흘러가고 있어서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이렇게 제 생각이 계속 맞아 떨어진다면……"
로드가 걸음을 멈추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지금쯤 당신은 '문화 시대'를 넘보고 있겠네요. 그렇죠?"
"……"
로드를 빤히 응시하고 있던 그녀가 사뿐한 걸음으로 난관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로드의 옆을 걸어가며 손가락으로 손짓했다. 따라오라는 제스처였다.
'성공이군.'
로드는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와 계단을 올라갔다. 이곳은 지구의 시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는데 실내 수영장, 헬스장, 사우나 등 없는 게 없었다. 두 사람은 2층의 비어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조명이 바의 분위기를 연상케 했다. 안에 사람은 없었지만 각종 술과 음료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로드가 의자에 앉자, 테이블에 놓인 양초에서 은은한 촛불이 일어났다. 어떤 구조로 작동하는 건지 잠시 궁금해졌다.
"마실 건?"
그녀의 첫마디였다.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그녀는 진열대에서 고급스러운 외형의 레드 와인을 하나 꺼냈다. 조리되어 접시에 담겨있는 음식들 중에서는 샐러드와 치즈 카나페를 선택해 테이블로 가져왔다.
그녀는 로드의 옆에 서서 잔을 내려놓고 와인병을 잡았다. 그 모습에는 진지함을 넘어서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그녀는 부드러운 손길로 코르크 마개를 제거하여 자신의 코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와인 향을 맡아본 그녀는 아무 이상이 없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코르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병을 손에 쥐고 잔 위에 병의 각도를 서서히 낮추었다. 색감 가득한 레드 와인이 잔으로 흘러 들어왔다.
잔에 와인이 조금 차오르자 그녀는 와인 잔을 들어올려 보고는 다시 테이블에 두었다. 다 된 건가? 로드는 그 잔을 집었다.
"그건 디켄터야."
그녀가 말했다. 전문 용어가 불쑥 튀어나와서 당황했지만, 말투에서 '건들지 마.' 라는 느낌이 들어서 로드는 재빨리 손에서 잔을 놓았다.
그녀는 한 손엔 와인병을, 다른 한 손엔 새로운 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잔을 눕혀 한 손으로 천천히 돌리며 와인을 따랐다. 그녀의 눈동자처럼 붉고 진한 액체가 흘러나와 잔의 모든 면을 훑고 지나가며 빈 속을 채워나갔다.
"왜 그렇게 잔을 돌리는 건가요?"
로드가 물었다.
"향을 맡기가 더 수월해져서."
그녀는 그렇게 로드의 잔에 와인을 따른 후 자신에 잔에도 따랐다.
갑자기 부담스러운 고급 레스토랑에 온 기분이었다. 로드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한 번 까닥하고는 와인잔을 들었다. 과연, 들어서 살짝 팔을 기울였을 뿐인데 풍부한 와인 향이 코끝으로 전해졌다. 로드는 와인을 입에 가져다 댔다.
"……!"
생동감 넘치는 과실의 풍미가 입안 가득. 그 후에는 섬세하게 이어지는 세련된 여운이 몸을 타고 흘렀다. 와인을 잘 모르는 로드가 맛보아도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맛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세레스티나는 눈을 감고 와인을 음미하는 중이었다. 로드는 그녀의 여운이 깨지 않도록 천천히 와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래서, 왜 저를 여기로 데려온 거죠?"
그녀는 잔을 흔들며 출렁거리는 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파트너, 라면서."
"…그, 그런가요."
로드는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막상 마주하니 딱히 나눌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어야 하는 상황이건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편했다. 침묵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어색한 경우도 있고, 편안한 경우도 있는데, 아마 그녀와의 술자리는 후자인 모양이었다. 그때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게임 할래?"
여기 와서도 게임이라니… 조금 뜬금없긴 했지만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온 게임 도전은 마다하지 않는다는 게 게임폐인으로서의 신조였으니까.
그녀는 구석 선반에 놓여있는 보드게임들이 가득한 곳으로 향했다. 가상 현실 게임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였지만, 가끔 저런 아날로그 스타일도 나쁘지 않았다. 체스도 좋았고, 로드는 특히 바둑이 하고 싶었다. 그녀는 프랑스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바둑을 알고 있으려나?
"이걸로."
그녀가 상자에 담긴 게임을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부루마블.'
로드는 와인을 뿜었다.
"쿨럭! 쿨럭! 컥! 아니 갑자기 무슨 부루마블이에요?"
온갖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다 연출해놓고 난데없이 부루마블이라니! 이 소름끼치는 괴리감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 게임, 알아?"
"당연히 알죠! 그럼 무슨 게임인지 모르고 선택했다는 거예요? 왜 이걸 고른 거예요?"
그녀가 게임 포장지에 그려진 우주선 그림을 가리켰다.
"우주선이 재미있어 보여서."
"퍽이나!"
그녀는 로드의 항의는 깨끗이 무시한 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더니 게임 케이스를 벗겼다. 세상에, 정말로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런 곳까지 와서 부루마블이라니! 치엘로가 알았다면 배를 잡고 끅끅 거리며 웃었으리라.
그녀는 주사위와 가짜 지폐를 들어 이리저리 살피더니 말했다.
"룰, 가르쳐줘."
"……하아아."
이상한 밤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Leessa / ㅠㅠ 기다리셨다니 죄송합니다.
ads123 / 무슨 말씀을! 저는 본능에 떳떳합니다! 물론 양심에도 떳떳하구요.
Digimon0002 / 넵. 이 분도 주요 인물입니다.
블라토 / 맞아요. 용의나라 아르곤의 플레이어입니다.
신천홍 / 크으 ㅠㅠ 감사합니다!
Speedwagon / 성인이시다! 치엘로와 컨셉이 반대라고 생각하심 됩니다. 허허.
ppk12 / 실버 브레이슬릿!
무꾸914 / 헉.. 영웅으로 참여하면 너무 사기..!
Xedrions / 맥주는 파울라너어어!
SW스윈 / 아니 잠깐만요, 다 좋은데 제가 무슨 마스터라구요?
Mr윤 / 헉 감사합니다! ;ㅅ;
@빛과하늘 / 역시 저의 꾸준함을 알아주시.... (퍽!)
@로리콤MK / 올 하일 로리 x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