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들의 무도회 -->
신들이 개최한 무도회가 한참 진행 중인 밤. 모두가 춤을 추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때, 아이러니하게도 로드와 세레스티나 두 사람은 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첫 게임은 로드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녀는 룰을 알아가며 이런저런 실험을 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두 번째 판으로 넘어가자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미, 미친!'
이번에도 그녀의 주사위는 둘 다 6눈금이 나왔다.
그녀의 말은 빠르게 앞서나가 땅을 선점하기 시작했고 로드는 후발 주자로 움직이다가 그녀가 구매한 땅을 연달아 밟으며 통행료를 지불했다. 그렇게 로드는 게임 내내 끌려 다니며 승부를 뒤집지 못하고 패했다. 반전을 꾀할 틈도 없었다. 그녀는 단 한번도 로드의 땅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졌습니다."
간간히 땅을 팔아 연명하던 로드가 결국은 파산을 선언했다. 세레스티나가 '음. 음.'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즐거워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왠지 분했다.
"…유치하지만 재밌네."
그녀의 감상이었다.
"쳇, 이기기만 하면 가위바위보도 재밌어요."
"하지만 이 게임,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뭔데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보드판의 땅을 가리켰다.
"어째서 파리와 로마의 땅값이 같은 거야? 인정할 수 없어. 파리의 땅값은 평당 8만 유로는 되는 반면……"
"그런 세세한 것까지 따지면 게임 못해요! 제작사에 문의하시던가!"
버럭한 로드가 이내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턱을 괴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왜 계속 초면부터 반말입니까?"
"게임에서 졌다고 화풀이 하지 말아줬음 해. 패한 개는 말이 없는 법."
"이봐!"
게임 한번 졌다고 취급이 사람에서 개로 급락해 버렸다.
"그쪽도 편하게 말해. 격식 때문에 말을 더 길게 늘이는 건 열량 낭비."
"…젠장, 그래. 갈 때까지 가 보자고."
로드가 부루마블 지폐를 정리하며 말했다.
이번엔 로드의 선공이었다.
'당신이 주사위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동일한 손목 스냅의 힘으로 던지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나도 꼼수로 맞수다!'
주사위를 쥔 로드의 주먹이 꿈틀거렸다. 두 주사위 모두 눈금 1이 손바닥에 향하도록 한 다음, 위로 던지는 게 아닌, 손바닥을 펼치며 가볍게 아래로 떨군다. 완벽할 경우, 주사위는 정확히 바닥에서 네 번 구르게 되어 있으며, 그 결과.
'나왔다! 주사위 둘 다 6!'
로드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12칸 앞으로 옮겼다. 맞은편의 그녀가 냉랭한 얼굴로 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후, 왜 그러지?"
그녀는 시선을 거두어 보드판을 바라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툭 말했다.
"……좀생이."
"그쪽이 그럴 말 할 처지냐!"
행운에 웃고 우는, 캐주얼하게 즐기는 보드 게임이 두 사기꾼에 의해 변질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정교한 주사위 컨트롤을 뽐냈으며, 실수한 쪽이 패배하게 되는, 행운이 아닌 손기술 싸움이 되어 버렸다.
"언제까지 섬에 박혀있을 생각이야? 대륙 진출은 언제?"
로드가 자신의 땅에 건물을 연달아 세우며 말했다.
"당분간은 쭉."
그녀가 그렇게 대답하며 주사위를 굴렸다. 3, 3이 나왔다. 그녀의 말은 로드 소유의 땅들을 모두 지나친 채 무인도로 숨어버렸다. 로드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다이달로스가 무너진 것도 당신이 꾸민 짓이지?"
"7할 정도는. 가이아는 순전히 자기 힘으로 한 줄 알겠지만."
이번엔 로드가 주사위를 굴렸다. 12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만 11이 나와버렸고 그녀가 호텔을 잔뜩 사둔 뉴욕에 안착했다. 로드는 땅을 매각하여 만든 200만원을 그녀에게 지불하며 말했다.
"외교 활동은 안 해?"
"에너지 낭비."
그녀가 간단히 답했다.
"어차피 외교는 힘의 논리로 돌아가. 대륙 진출을 하면 필요한 나라와 협상하겠지만, 지금은 상관없어."
그녀가 주사위를 굴렸다. 두 주사위가 같은 눈금으로 나오지 않았으므로 세레스티나의 말은 안전한 무인도에 계속 남아있다. 그녀를 잡기 위해 설치해둔 로드의 덫들이 무의미해진다.
"햐, 섬나라는 부럽구만. 누구는 6개국에 둘러싸여서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는데…"
"각자의 장단이 있는 법. 섬은 거점 영지가 두 개밖에 없어서 운영이 힘들어."
로드의 말이 다시 그녀의 땅에 들어왔다. 로드는 다시 보유한 땅을 매각하며 그녀에게 백만원을 지불했다. 이것으로 패색이 짙어졌다.
결국 세 번째 판 또한 로드의 패배였다.
부루마블에 이어서 다음에 한 게임은 체스. 이번에도 세레스티나가 선택한 게임이었지만 로드도 자신이 있는 장르였다. 두 사람의 실력은 어느 정도 백중세를 이루었고 플레이 시간은 꽤나 길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흑과 백 모두 로드의 패배였다. 철저한 수와 계산 싸움에서 조금의 빈틈도 나오지 않는 세레스티나를 이길 수 없었다.
다음은 로드가 하고 싶어했던 바둑이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그녀를 위해 로드가 규칙을 알려주었고, 그녀는 가르치는 사람이 공포감을 느낄 만큼 빠르게 받아들였다.
연습 게임이 끝나고, 곧바로 본 게임이 시작되었다. 세레스티나는 두터운 포석을 기반으로 끝내기에서 승부를 보는 기풍이었다. 반면 로드는 빠르고 공격적이며, 상식적이지 않은 변칙수를 마구 섞어 판을 어지럽히는 데 능했다.
두 사람은 밤이 새도록 게임을 했다.
로드는 연속으로 4승을 거머쥐었다. 아직 그녀가 가진 내공으로는 로드의 신묘한 변칙수에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5번째 게임에서는 흑을 잡은 세레스티나가 끝내 승리를 거뒀다. 초반에는 로드에게 정신 없이 휘둘렸지만 종래에 큰 승리를 따내 전황을 뒤집은 것이다. 로드는 혀를 내둘렀다
'…진짜 괴물이라니까.'
어느새 밤을 새고도 시간이 한참을 지나 있었다. 5번째 판을 끝내는 순간, 로드는 격한 피로감을 느꼈다. 쉬러 왔는데 오히려 더 머리를 혹사시킨 느낌이었다.
"오늘은 이만하자."
로드의 말에 세레스티나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막 재미있어졌는데."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나중에 또 기회가 있겠지."
로드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대체 몇 시간이나 한 걸까? 계속 앉아 있어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했다.
"어울려줘서 고마웠어."
그녀가 웬일인지 감사의 표시를 했다.
"별 말씀을."
"로드 폴렌티아. 당신이 있어서 이 게임에 조금은 더 흥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주신전을 말하는 거야?"
그녀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했다.
"이 게임의 결말은 정해져 있어."
"…물론 네 승리로 끝나는 결말이겠지? 그런 소리는 누구나 하는 거잖아."
"정해진 결말은 바꿀 수도 없고, 플레이어라는 자들도 바꾸려는 의지가 없어. 정해진 결말이란 건 그저 비극, 재미없는 유희."
로드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지만 그녀는 무척 진지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마치 예언을 하는 것처럼. 로드는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느꼈던 그 묘한 거리감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너의 발버둥은 그 맛이 조금 각별했어."
"1승 4패 주제에 말이 많군."
로드의 그 말에 그녀가 '흡' 하고 아주 잠깐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바둑만으로 따지는 건 옳지 못해."
그녀가 빠르게 반박했다.
"오늘 하루 10게임을 했고, 전적은 정확히 5:5야. 그리고 다음판부터는 계속 나의 승리가 됐을 거고."
"아직 하지도 않은 게임의 승부를 따져봐야 무슨 소용이야. 마지막 승부는 주신전에서 내는 걸로 하자. 세레나."
"……세레나?"
그녀가 로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물었다.
"아, 음. 그냥 한 번 불러본 애칭이야. 세레스티나는 너무 길잖아. 싫어?"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름을 부르는데 불필요한 에너지를 아낄 수 있으니, 효율적이라서 좋아."
"거기서도 효율을 따지고 있냐…"
로드가 문을 열고 나가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기대하고 있어. 언젠가 네가 그리는 그림에도 시원하게 바람 구멍을 뚫어줄 테니까."
세레스티나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기대하지."
*
로드는 돌아가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가 다시 의문의 알람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을 때는 어느덧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휴식을 취하러 왔는데 생활 패턴이 더 불규칙해진 느낌이었다.
로드는 가볍게 샤워를 마친 후 겉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결국 여기 와서도 한 건 게임뿐이구나.'
로드가 하품을 하며 홀로 내려왔다.
"로드님!"
계단을 다 내려오자마자 로드의 앞을 백제의 플레이어 선광이 가로 막았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한쪽 눈을 가린 그의 흑단 같은 앞머리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노, 놀래라. 갑자기 왜 그러세요?"
"잠시 저랑 이야기 좀 합시다."
선광은 중앙 홀에서 조금 떨어진 기둥 뒤로 로드를 데리고 갔다. 자무카 사건 이후 말 한번 붙이지 않던 선광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로드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몇몇 플레이어들의 시선을 느꼈다.
심상치 않은 공기가 홀에 감돌고 있었다.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고 계셨던 겁니까?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단 말입니다!"
"무슨 일 있었나요?"
선광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게노세르크의 동맹이 정해졌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거야 쭉 화제 거리였으니까요."
선광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백제가 동맹으로 선택 받은 것은 아닌 듯 했다. 로드 본인도 제안을 받지 못했으니까, 알란드가 선택된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나라? 로드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선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3자 동맹입니다. 오펙투스-알브헤임 연합이 게노세르크와 동맹을 맺었어요!"
"뭐, 뭐라구요?"
로드의 동공이 급격히 커졌다. 지금 잘못 들은 건가? 머리가 텅 비어지는 기분이었다.
"망할! 상황이 정말 복잡해졌습니다."
서남쪽 극단에 거대한 영토를 보유하게 된 게노세르크가 진출할 수 있는 방향은 딱 두 군데였다. 그의 앞을 우산처럼 넓게 가로막고 있는 오펙투스?알브헤임 연합의 영토, 그 외에는 동쪽의 위치한 이카루스의 영토뿐이었다. 나머지 두 면은 바다였다.
동쪽의 이카루스 쪽으로 뻗어나가게 되면 영토가 가로로 길게 늘어지게 된다. 패도적인 성향을 가진 게노세르크의 플레이어라면 당연히 동맹을 구해서 앞을 가로막고 있는 두 국가와 정면 승부할 것이라고 로드를 비롯한 모두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다른 곳에서 동맹을 찾는 게 아닌, 오히려 이 세 국가가 동맹을 맺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게노세르크의 병력은 남쪽의 이카루스, 그리고 이카루스의 위에 위치한 백제로 향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또한 오펙투스와 알브헤임은 이제 뒤통수 걱정이 없어졌으니, 자신들 바로 근처에 위치한 알란드와 어비스를 마음껏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우와아, 이런 수는 생각 못했다. 서부 동맹인가… 아주 대대적인 공세가 이어지겠군.'
"알아야 할 정보가 하나 더 있습니다."
로드의 머릿속이 복잡해 지고 있는데 선광이 새로운 소식을 하나 더 던졌다.
"이카루스는 이미 게노세르크에 굴복했습니다."
"…네? 그게 무슨!"
"협의가 있었습니다. 이카루스는 자신의 거점 영토를 하나 떼어주는 것을 대가로 게노세르크에게 정전협정을 제안했습니다. 게노세르크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으니, 게임으로 돌아가면 두 국가는 바로 공식적으로 협정을 맺게 될 겁니다."
"그, 그러면……"
"이제 게노세르크가 공격할 곳은 하나밖에 없죠."
이카루스의 윗동네, 바로 백제의 영토였다. 정확히는 전 아로게쓰의 영토였으나 이제는 백제가 접수한 땅이었다. 물론 로드의 플랫랜치도 있는 지점이었다. 게노세르크는 그 땅을 발판 삼아 대륙 전체로 뻗어나갈 생각일 것이다.
"결국 저는 게노세르크를 상대해야겠죠. 물론 로드님도 마찬가지로 그의 동맹국들을 상대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그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아래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두 사람이 움찔 놀라며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들 하고 있나?"
언제 왔는지, 3미터 가까이 될 것 같은 거대한 신장의 남자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갑자기 부루마블이 하고 싶어지는 밤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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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리아 / 치엘로와 컨셉이 반대라고 보시면 됩니당 ;ㅁ;
블라토 / 역시 와인과 함께하는 부루마블!
ads123 / 후후.
알테니아 / 아니, 언제부터 로리 하렘이었죠! ㅠㅠ
칼레이어드 / ㅋㅋㅋㅋㅋㅋ 덕분에 새로운 지식을 얻고 가는군요! 모든땅을 다사야 비로소 게임이 시작된다니 이 무슨;;
벌레 / 잘들어. 통행료를 낼때마다 옷을 벗...
Speedwagon / 엉엉 ㅠㅠ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저는 파워 건전인이라니까요
SW스윈 / 후후후후�o후 노 코맨트 하겠습니다..
akksi / ?!! 대체 그분에게 무슨일이 있었던거지
@로리콤MK / 어멋? 결말이 몹시 바람직하군요.
@Digimon0002 / 그게 뭔지도 모릅니다..
@Lgb / ㅠㅠㅠㅠ 왜 할말이 없어용 ㅠ
@Mr윤 / 지구의 모습은 비슷하다고 보심 되겠네요! 저는 가이드만 제시하고, 캐릭터의 외모는 독자님들의 상상에 맡깁니다!
@빛과하늘 / 당신이 섣불리 던진 팩트, 남에겐 폭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