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90화 (90/296)

<-- 왕들의 무도회 -->

"……말렉."

선광의 얼굴에 적대감이 드러났다. 로드 또한 긴장했다. 듣던 대로, 게노세르크의 플레이어는 인간이 아닌 '호인족'의 몸을 하고 있었다.

흑갈색 머리카락은 머리 아래로 늘어뜨렸으며, 다섯 개의 발톱이 긋고 지나간 흉터가 눈 주위로 크게 나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특이한 것은, '범'의 머리라는 점이었다. 의인화가 진행되어 인간과 범을 반반 섞어 놓은 듯 꽤나 자연스러운 얼굴이었으나 날카로운 이빨과 얼굴 주변에 나 있는 검은 줄무늬는 맹수의 그것이 확실해 보였다.

"이거 미안하군, 선광. 내가 급히 어비스에 할 말이 있어서 그러니 잠시 비켜주지 않겠나?"

울림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선광은 말렉을 노려보았지만, 그와 맞설 엄두는 내지 못하는 듯 했다. 그는 시선을 움직여 로드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는, 등을 돌려 자리를 떴다.

"으하하! 가란다고 정말 가냐? 하여간 자존심도 없는 새끼."

말렉이 기둥에 등을 기대며 웃어댔다.

"제겐 무슨 볼일입니까?"

로드가 물었다.

"선광 저 놈이 동맹을 제안했지? 나한테 찍혀서 다른 녀석들도 슬슬 피하니깐, 공공의 위협을 미끼로 만만한 네놈에게 들이대는 거야. 아무튼, 나도 네놈에게 제안 하나 하겠다."

"…무슨 제안이죠?"

거대한 범의 머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내 속국이 되라. 어비스."

"……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너도 알고 있겠지? 지금 항복하면 살려는 주마."

로드가 슬며시 웃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제안이 아니라 협박이네요."

"좋을 대로 받아들여."

말렉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에게나 속국 제의를 하는 건 아니다. 선광 놈은 그럴 기회조차 없이 멸망 보너스로 산화될 테니까. 내가 어비스의 정보력을 높게 평가해서 연명할 기회를 얻는 줄 알아."

그가 대단한 선심을 쓴 마냥 거들먹거렸다.

"자, 그럼 이제 대답을 들어볼까? 로드 폴렌티아."

"……"

로드가 대답하려는 찰나, 갑자기 그의 목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로드의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안녕! 로드 군."

"…아, 아크?"

아크가 로드의 목에 팔을 두른 채 생긋 웃어 보였다.

"뭐냐? 아크! 먼저 이야기하고 있는 거 안보이나? 방해하지 마라!"

말렉이 불쾌한 듯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미안, 미안. 로드 군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마안? 이거 하나는 알아둬. 로드 군은……"

그가 엄지손가락을 척 세워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내 거야."

"……"

"……"

로드는 본인의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설마 그건가? 프로포즈를 받은 건가?

"어이, 돌았냐? 지금 그게 무슨 소리지?"

말렉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아크는 계속해서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말했다.

"말렉 군도 참 말 길을 못 알아 처먹는다니깐! 로드 군은 내가 찜한 사냥감이니까, 함부로 건들지 말라는 소리야."

발언의 강도가 제법 셌다. 말렉의 눈썹이 위아래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알겠다, 이 새끼야. 정녕 나랑 찐하게 한 판 붙어보고 싶다. 이거구만?"

야수의 송곳니가 번뜩이며 숨막히는 투기가 흘러나왔다.

아크 또한 로드에게 두른 팔을 풀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3미터의 거구 앞에서도 그의 몸은 조금도 주눅드는 기세가 없었다.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생글생글하던 아크의 눈매가 사나워지며 입꼬리가 기이하게 올라갔다. 나왔다, 저 표정.

"그 전에 피차 해둘 일이 있잖아?"

"……뭐?"

아크는 등을 빙글 돌리며 고뇌하는 듯한 표정을 꾸며냈다.

"이 대륙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건, 아마 우리 둘이 되겠지. 난 말렉 군을 둘도 없는 라이벌로 인정하고 있어."

그 말에 말렉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말렉 군의 말대로 언젠가 우린 크게 한판 붙어야 할 운명이야. 신들도 극찬할 멋진 피날레가 되겠지.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우리가 누구 좋으라고 지금 바로 싸워야 하는데? 저길 봐."

아크가 그렇게 말하며 홀에 모여있는 플레이어들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말렉의 시선 또한 그 쪽으로 향했다.

"잔챙이들이 우리가 싸우다가 나가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어."

"…큭."

아크는 단숨에 둘 사이의 묘한 소속감을 형성하고, 외부로 적대감의 눈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아크의 혓바닥이 다시 뱀처럼 놀려지며 듣기 좋은 달콤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일단은 서로의 사냥감을 먼저 처리하자고. 우리가 승부를 낼 때는 모든 대륙이 평정되었을 때야. 그런 클라이맥스가 좋지 않을까?"

"……"

로드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아크를 보고 있었다. 설마 저런 헛웃음만 나오는 감언이설에 속아넘어갈 사람이 어디 있겠……

"크하하하하하! 그래, 네놈이 뭘 좀 아는 구나! 그런 배짱으로 나와야지! 역시 내가 유일하게 인정한 놈다워!"

말렉이 큰 소리로 웃어대며 아크의 등을 마구 두들겼다. 아크가 '말렉 군! 아파아!' 하면서 칭얼거렸지만 그 목소리는 말렉의 웃음 소리에 묻혀버렸다.

"좋아, 좋아. 그런 거라면 인정해 줘야지! 어비스는 네게 주도록 하마."

로드가 노려보았다. 이것들이 누구 마음대로 물건 취급이야?

"고마워, 말렉 군. 이해해줄 줄 알았어."

"하하하하! 내가 좀 마음이 넓지!"

두 사람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홀로 돌아갔다. 아크가 말렉을 데리고 가는 도중 뒤를 돌아보며 로드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흥, 꼴에 도움을 줬다고 뻐기는 건가.'

다른 플레이어들도 멀찌감치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얼굴은 선광이었는데, 그는 말 그대로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아, 어쨌건 나는 살아남은 건가.'

이 순간 드는 솔직한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로드도 터덜터덜 홀 쪽으로 걸어가는데 요한이 그를 보고는 팔을 흔들며 아는 척 했다.

"Mr. 로드! 축하합니다. 살았군요!"

로드가 머쓱하게 웃으며 '예.' 하고 대답했다.

이제 오딘이 돌아올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다. 이번 저녁 연회를 끝으로 다시 주신전이 시작될 것이다.

진열대에 음식들이 보였지만 로드는 별로 입맛이 없었다. 그는 테이블에 앉아서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었다. 로드는 에덴의 대륙 지도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서부 3국 동맹이 체결되었고, 그 여파가 미치는 국가는 알란드, 어비스, 백제, 이카루스. 이렇게 네 곳이었다. 그러나 이 중 이카루스는 자신의 영토를 넘겨주는 대가로 게노세르크에 정전을 요청했고 말렉은 이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공격 대상은 알란드, 어비스, 백제 세 곳으로 줄었다.

그리고 여기서, 대륙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아크가 찾아와 로드를 자신의 라인으로 취급하며 말렉을 구슬렸다. 이로서 어비스도 제외, 남은 국가는 알란드와 백제 둘 뿐이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 두 국가는 전력상 서부 3국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로드처럼 '빽'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주위에 달리 손을 내밀어줄 나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외교 싸움에서 밀려난 대가로, 두 국가는 지도에서 지워져 버릴 일만 남은 것이다. 국제정세란 것은 언제나 그랬지만, 잔혹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로드는 이마를 짚으며 새로운 의문을 떠올렸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어비스는 살아남을 것이다. 일단 살아남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은? 이 포지션을 계속 유지해도 괜찮을까?

로드는 두 국가가 멸망 당한 후를 상정해보았다. 지도가 훨씬 간단해진다. 게노세르크가 백제를 접수하면, 대륙 어디든지 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오펙투스?알브헤임 연합이 뻗어나갈 방향은?

애매했다.

카사르, 어비스, 게노세르크.

이 세 개국의 영토가 주위를 완전히 틀어막고 있는 형국이었다.

오펙투스-알브헤임 연합은 '기원 시대'일 때는 완전히 손 놓고 있었으니, '개척 시대'때 어떻게든 재미를 보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고작 알란드의 영토를 둘이서 나눠먹고 만족할 수 있을 리 없다.

사실상 남아있는 길은 카사르와 싸우는 것 밖에 없었지만, 아크는 강력한 우승 후보였고, 카사르는 부담스러운 강대국이다. 누가 봐도 어비스가 가장 만만했다. 먹음직스러운 어비스를 내버려두고 카사르와 싸워야 할 이유는 그들에겐 없었다.

물론 말렉은 아크에게 어비스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오펙투스 연합이 영토 진출이 막혔다는 것을 이유를 들면, 말렉은 그들을 막을 명분이 없다. 아니, 막아줄 이유도 없었다. 결국 알란드와 백제가 멸망하면, 다음은 어비스의 차례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로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가장 강성할 때의 오펙투스와 알브헤임을 2:1로 막을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힘들다. 로드는 아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다. 여우 같은 아크는 또 지원을 핑계로 이런저런 요구를 할 것이고 로드는 어떤 요구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굴욕적인 속국 제안일지라도.

국가의 안위가 로드 본인의 힘만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주도권도 모조리 아크에게로 넘어가 버린다.

만약 아크가 로드에게 '동맹'을 제의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아크는 로드에게 '내 것', '내 사냥감' 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썼다.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는 어비스가 카사르의 라인에 들어간 것처럼 비춰지겠지만, 정작 동맹을 맺어준 것은 아니다.

아크는 그런 애매한 포지션의 어비스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아, 역시 방심할 수 없는 녀석이야.'

아크가 말렉으로부터 로드를 구해준 것도 그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한 '계산'에 불과했을 것이다. 로드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럼 다른 방법은 없을까?'

서부 동맹에 붙는다는 선택지도 불가능하다. 카오스월드에는 4개국 동맹은 금지라는 강력한 불문율이 있었다. 그들이 어비스를 얻겠답시고 나머지 전 국가를 적으로 돌릴 이유는 없다. 어비스는 속국으로 숙이고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 그들에게 이용당하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멸망 당할 것이다.

이제 쟁점은 명확했다.

타국에게 국방의 주도권이 넘어가도 좋은가?

그저 타국의 상황에 의존하기만 할 것인가?

로드의 대답은 NO였다. 그렇다면 아크가 쳐둔 그물을 벗어 던지고 생각해 본다.

'답이 나왔군.'

로드는 깨달았다.

알란드와 백제는 '운명 공동체'였던 것이다.

불현듯, 세레스티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어차피 외교는 힘의 논리로 돌아가.'

그녀의 목소리를 되새기는 과정에서, 로드는 더욱 확신이 섰다. 허울에 불과한 중립국 컨셉은 이제 벗어 던질 때가 됐다.

로드의 시선이 큰 소리로 웃고 있는 말렉에게로 향했다. 그는 이번 무도회로 결성한 새로운 동맹인 오펙투스의 콜린, 알브헤임의 플로라와 함께 술잔을 들며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그때 마침 로드의 테이블로 선광이 걸어왔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더 이상 자신의 요구를 강요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선광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해달라고 하는 것은 같이 나락으로 떨어져 달라는 요구나 진배없었기에. 선택권은 로드에게 있었다.

로드가 다시 시선을 움직였다. 뺑뺑이 안경을 쓴 남자가 홀로 칵테일을 홀짝이며 이따금씩 이쪽을 힐끔 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알란드의 플레이어인 '올리버'였다. 그도 이제 멸망을 기다리고 있는 신세였다.

로드는 그에게 이리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올리버는 잠시 멀뚱히 있다가 그 손짓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고 다가왔다.

알란드, 백제, 어비스가 한 테이블에 모였다. 이 움직임에 몇몇 플레이어들의 시선은 벌써부터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올리버가 도착하며 셋이 모이자 로드가 외쳤다.

"말렉!"

현재 대륙에서 가장 강성할지도 모르는 플레이어의 이름을 로드는 외쳤다.

그 순간, 홀의 모든 목소리가 멎어 들며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정적이 내려 앉았다. 거구의 말렉이 뒤를 돌아보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뭐냐?"

모두들 숨을 죽였다. 많은 시선들이 로드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치엘로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고.

아크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거칠게 해치고 나와 눈을 부릅떴다.

2층의 세레스티나는 팔짱을 낀 채 흥미로운 눈으로 로드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세상일이 너희들 뜻대로만 돌아가면 얼마나 재미 없겠냐?"

로드가 피식 웃으며 선광과 올리버의 목을 팔로 둘렀다. 안락을 가장한 목줄을, 스스로 뜯고 올라선다.

"3:3으로, 한판 제대로 붙어보자아아!"

그리고 대륙에 새로운 변수를 만들어낸다.

========== 작품 후기 ==========

다음편부터 본격적으로 진도 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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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 ??! 무슨 의미의 칫이죠?!

KeinHoof / 크으으 ㅠㅠ 감사합니다!

책읽는고래 / 세이브 원고가 없어용 ㅠㅠ 흑흑 쌓아야 되는데

llSongOfBladell / 다음편 부터는 빨라질 겁니다

Speedwagon / 파워 건전인이 저라구요!

알테니아 / 주인공 : 이렇게 된 이상 알란드와 백제를 끌고간다! (망함)

lineata / 맞는말씀입니다 변수를 만들기 위해선 일단 생존부터!

Digimon0002 / 갓갓칠무산이 등판할 때인가;

로리콤MK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말렉 : (시무룩)

빛과하늘 / 팩트는 그 자체로도 폭력성을 띠고 있습니다 흑흑

@ROK1198 / 넵. 전체적으로 조금 보안했습니다 ^^; 전작을 아시는 분을 뵈니 기쁘군요!

@Mr윤 /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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