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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전 문명게임-103화 (103/296)

<-- 언더하임 공성전 -->

날이 저물자, 알브헤임군은 공세를 멈추고 물러났다.

이번엔 작정하고 공격을 해서인지 피해가 제법 컸다. 성벽과 방호벽 곳곳이 박살이 나 굴러다녔고 성벽은 아군의 피로 흥건해져서 밟을 때 마다 쩍쩍 달라붙었다. 티아는 전투가 끝났어도 쉴새 없이 성벽을 돌아다니며 시설들의 상태를 점검해야 했다.

티아가 주요 포인트를 다 돌아본 뒤에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녀는 잠시 성벽 끝에 쪼그려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휴식을 취한다는 게 앉자마자 견딜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결국 그녀는 무릎에 머리를 놓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야."

그러다가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티아는 눈을 떴다. 유니벨이 팔짱을 낀 채 성벽에 등을 기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장군이었나."

"청승맞게 거기서 뭐하냐? 자려면 안에 들어가서 자던가."

"…음, 본녀는 아직 할 일이 있다. 잠시 졸았던 것뿐이니라."

티아가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유니벨이 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런 데서 홀로 주무시면 위험하네요, 바보 군사님. 여기가 어비스인 거 있었어? 병사들이 지나가면서 힐끔 힐끔 쳐다보더라.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있으면 가끔 눈 돌아가는 새끼들이 있으니까 주의해. 적이든 아군이든 남자 새끼들은 다 똑같으니깐."

"……장군은 상냥하구나."

그 말에 유니벨이 불의의 일격이라도 맞은 듯 흠칫했다.

"낮에는 도와줘서 고마웠다. 장군."

"…에엑?"

잠시 당황했지만 빠르게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가 차갑게 대꾸했다.

"네 목숨을 구해줬으니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설마 그런 감사 표시 하나로 우리의 냉전 상태가 풀릴 거라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

"음,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느냐?"

유니벨이 '하.' 하고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을 장기 말 취급하는데, 당연한 인사한 것 가지고 풀린다면 그건 또 무슨 호구 새끼냐? 엿먹어. 엘프. 난 네가 싫어."

"…유감이로구나. 하지만 장군의 미움을 받는 것도 군사로서 본녀의 숙명.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흥. 착한 척은 자기가 다해요."

유니벨이 툴툴거렸다.

"그리고 장군, 한 가지 꼭 사과하고 싶은 게 있었다."

티아가 고개를 깊게 숙이며 말했다. 유니벨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의 뒷말을 기대했다.

"그대의 납작 가슴에 대해 왈가왈부한 것은 본녀의 잘못이 확실하……"

"지금 뭘 사과하는 거야아!"

귀까지 새빨개진 유니벨이 빽 소리질렀다.

"꺼져! 꺼져! 거유 엘프. 싫어! 난 네가 정말 싫어어!"

"이런, 유감이군. 역린을 건드린 건가."

"…으으."

너무 흥분한것 같았다. 유니벨은 잠시 열을 식히고는 말했다.

"너 말이야. 전부터 계속 가슴 좀 크다고 사람을 깔보듯 말하는데, 난 아직 '성.장.기'거든? 그리고 나중에 나이가 들면 큰 가슴은 오히려……"

그 말에 티아가 눈을 치켜 뜨며 벌떡 일어났다.

"지금 나이가 많다고 본녀를 무시하는 것이더냐!"

"……뭐, 뭐야? 갑자기."

"그 발언에 대해서는 본녀도 반드시 사과를 들어야겠노라."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데!"

두 여자가 으르렁 거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녀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고 있던 애니록스가 '뭐 이런 바보들이 있나.' 하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는 싸움이 날것 같아 그가 입을 열어 존재감을 드러냈다.

"두분 다 진정하세…"

"꺄악! 시발!"

"헛!"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에이씨, 뭐야. 변태 가르마였잖아."

유니벨이 괜히 놀랐다는 듯 짜게 식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티아도 덧붙여 말했다.

"정보부장. 이쯤 되면 그대가 자꾸 기척없이 나타나 여성들을 놀라게 하는 그 행위 자체에 대해 성적 흥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본녀는 안타깝도다. 그대가 길거리의 코트 벗는 노출증 환자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아니! 본인들 멋대로 놀라놓고선 무슨 헛소리에요!"

그가 온 얼굴 근육을 동원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늘도 고통 받는 애니록스였다.

"쯧. 흥 다 식었네. 난 가본다."

유니벨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새침하게 걸어갔다.

남겨진 두 사람은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화해는 했습니까?"

애니록스가 물었다.

"아직인 것 같군."

"하하……"

"그건 그렇고, 본녀가 부탁한 것은 가져왔느냐?"

"아, 여기요. 전에 말씀하신 알브헤임군 야영지의 배치도."

"고맙다."

티아가 지도를 펼쳐 바닥에 놓았다. 옆에서 애니록스가 잘 보이도록 횃불로 비춰주었다. 그녀는 말없이 계속 지도를 보기만 했다.

"적 야영지를 살핀다는 것은…… 야습을 거실 생각인 겁니까?"

"오, 이제 정보부장도 제법 예리해졌군. 수성전이라 버티고만 있지만, 사실 본녀의 지휘 스타일은 이런 흔들기 쪽이니라."

"그, 그런데 야습을 걸기엔 우리 쪽 병력이 너무 적은 게 아닐까요?"

애니록스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리 대단한 걸 생각하는 게 아니다. 이 계획은 암살단원들만 나서 주어도 충분하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지도를 탁 내리치며 말했다.

"본녀의 목표는 적병의 수를 줄이는 게 아니니까."

*

늦은 밤,

알브헤임 진형.

"후아아아아암."

"피곤해 죽겠다."

짙은 어둠속, 초소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는 인간 병사 두 명이 늘어지게 하품을 해댔다.

"아오, 짜증나. 왜 우리만 계속 불침번을 서야 하는 거야?"

"엘프들이 돕질 않으니까."

그의 동료가 형식적으로 주위를 살피며 대꾸했다. 병사는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라고오? 불침번? 우리 신성한 숲의 일족이 어찌 그런 저급한 짓거리를!"

"푸하하하하!"

전력을 다한 성대모사에 동료가 깔깔깔 웃어댔다.

"대체 엘프들이 하는 게 뭐가 있는데? 멀리서 화살만 쏴댈 뿐이잖아. 걔네 보병들도 우리가 화살받이 해가면서 길을 만들어놔야지 뛰어들고, 퇴각하는 건 또 그 새끼들이 제일 빠르더라."

"…말도 마. 짜증나니까."

적적한 밤에 한번 터진 두 사람의 푸념은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귀족놈들이 싫어서 루트로 넘어왔는데, 엘프들은 더 하다니깐. 얘네들은 피부만 맞닿아도 미천한 것, 하천한 것, 하며 질겁을 하니……"

그 말에 동료가 손사래를 쳤다.

"야, 야, 차라리 엘프가 낫지. 우리 입장에선 차라리 그런 대우가 편해. 엘프들이 귀족들처럼 집요하게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잖아? 귀족 놈들은 진짜 벼룩의 간도 쪽쪽 빨아먹을 놈들이라고."

"그런가? 그래도 귀족들은 적어도 같은 동족 취급은 해주잖아."

"어리구만! 자네가 라이덴 영지 출신이랬나? 진짜 못된 귀족들을 못 겪어봐서 하는 소리야."

"아, 됐어! 이 논쟁은 그만하자고.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이잖아."

"크크. 하긴 그 말이 맞네. 대륙 어디에 살든 백성들만 죽어나는 거지 뭐."

그때 병사가 움찔했다.

"왜 그래?"

"음, 아무것도 아냐. 갑자기 오한이 느껴져서."

"감이 좋군."

"…응?"

서걱! 두 남자의 목에 동시에 핏줄기가 그어졌다. 그들은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을 뒤집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시체를 처리한 후, 암살단원 한 명이 계속 가자는 수신호를 보냈다. 나머지 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기민한 동작으로 보초들의 감시망을 피해 움직였다. 피할 수 없다면 신속하게 잠입하여 소리 없이 보초들을 암살했다. 결국 그들은 목표로 하는 군량고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암살단원들은 하나씩 들고 온 통에 담긴 기름을 쌓여있는 식량에 뿌렸다.

그리고 한 명이 성냥에 불을 붙이고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바빠 보이네. 린이 도와줄까?"

"……!"

쿠우우웅! 갑자기 나타난 쌍둥이 자매 린이 암살단원의 얼굴을 붙잡아 바닥에 메다꽂았다. 그가 쥔 성냥이 바닥에 툭 떨어져 꺼졌다.

"젠장!"

또 다른 단원이 빠른 동작으로 새로운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이고 팔을 뻗으려는 순간.

슈콰악!

마력 화살이 그의 팔이 꿰뚫고 지나갔다.

"어림없어."

린이 활을 든 채로 말했다. 팔이 날아간 단원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흘렸다.

"……!"

옆에서 기척을 느낀 린이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아까 바닥에 쓰러졌던 암살 단원이 단검을 휘두른 것이다.

"어쭈, 해보잔 거야?"

암살단원이 이판사판으로 달려들어 단검을 재차 휘둘렀다. 그녀는 몸을 빙글 돌리면서 활을 떨어뜨리고는 등 뒤의 단검을 잡았다. 채앵! 포켓에서 뽑혀나간 나이프가 한줄기 섬광이 되어 한 일자를 그었다.

후우웅!

'어라?'

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암살단원이 다리를 구부리며 피해낸 것이다. 설마 이걸 피할 정도로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다.

암살단원이 구부린 다리를 펴며 단검을 세로로 휘둘렀다.

"꺅!"

린의 어깨에 얕은 검상이 생겼다.

"이 천한 게! 감히!"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진 린이 분노하여 달려들었다. 채앵! 챙! 챙! 세 네 번 검격을 섞자 바로 힘의 차이가 드러났다. 가슴을 베인 암살자가 피를 뿌리며 비틀거렸고, 린이 그대로 뛰어올라 그의 안면을 날아찼다. 쿵! 그가 바닥에 쓰려지자마자 달려온 린이 단원의 얼굴을 콱! 콱! 밟았다.

"미천한 게 감히 내 몸에 상처를 내? 감히! 감히! 감히!"

린이 그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팔이 날아간 암살자가 등을 돌려 어둠속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어어어? 야! 야! 거기 안 서?"

푸욱! 뒤에서 날아온 화살이 도망치는 암살자의 등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가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린. 괜찮니?"

르네가 활을 내리며 물었다. 린이 울먹이며 그녀에게 달려왔다.

"우앙! 언니이이! 저 천한 게 내 몸에 상처를 냈어! 아직 시집도 못갔는데에에!"

르네는 그런 린의 칭얼거림을 받아주는 듯 하다가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앗! 아파아아!"

"린. 언니가 방심하지 말라고 했지? 그러니까 자꾸 다치는 거야."

"우으으…"

르네가 앞으로 걸어 나와 주위를 살폈다. 린이 쓰러트린 한 명과 자신이 쏘아 죽인 두 명. 고작 세 명에 의해 여기까지 뚫리다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식량 창고 쪽이다!"

"군량고가 공격받고 있다!"

뒤늦게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늦은 밤 적습을 알리는 외침이 야영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옆에서 린이 '하여간 느리다니까.' 하며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의 말씀이 맞았군.'

어비스에서 일발 역전이 가능한 방법이 있다면 바로 군량자체를 태워버리는 것. 음식이 없으면 병사들은 싸울 수 없다. 혁명군이 길목을 차단해버림으로써 보급이 완전히 끊긴 상태라 더더욱 타격이 클 것이다.

플로라는 분명히 어비스에서 식량을 노릴 것이라 장담했고, 린과 르네를 보내 지키게 할 정도로 군량고의 방비를 강화시켜둔 것이다.

"저건 또 뭐야?"

"불인가?"

'…뭐라고?'

병사들의 웅성거림을 들은 르네의 시선이 빠르게 뒤로 돌아갔다. 반대편에서 불이 타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양동…?'

가슴이 철렁했다.

"어라라? 르네 언니. 저 방향은 무기 창고 쪽 아냐?"

"무기 창고라고?"

르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푸하하! 바보들! 식량은 여기 있는데 무기를 태워서 뭐 어쩌겠다는 거야? 화풀이라도 하나?"

"……아니."

르네가 다급히 고개를 들어 외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무기 창고로 가라!"

"예, 옛!"

르네의 표정은 무척 심각했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한 린이 언니의 눈치를 보았다.

"르, 르네 언니. 왜 그렇게 화내는 거야? 무기는 다들 개인적으로 들고 있으니까 예비 무기 좀 잃어버리는 건 괜찮잖아."

"…그런 문제가 아냐."

르네는 말을 하고 있을 시간도 없다는 듯 빠르게 달려나갔다.

'이건 함정이야. 저들의 목표는 처음부터……'

두 사람은 한 발 늦게 도착했다. 그리고 그녀들이 본 것은…

화르르르륵!

무기들 가운데 불길에 휩싸여 있는 화살 더미였다.

'……저들의 목표는 처음부터 화살이었나.'

허를 찔렀다. 보급로가 끊겨버린 상황에서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식량. 하지만 너무 군량고에만 신경을 쏟느라 상대적으로 무기 창고의 방비가 약해져 있었다. 거기에 군량고 쪽에 소란이 일고 병력들이 그쪽으로만 뛰어들어 간 것도 문제였다.

"빨리 불을 꺼라!"

"물을 가져와!"

불붙은 화살에서 역한 연기가 나오는 광경을 르네는 허망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감히…!'

그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Xedrions / 추천 2다! 추천 2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火炎無 / 갓지스탕스...!

...(-1)... / 매력 발산 평화주의자 컨셉은 좀 많아서 바꿔봤습니다. 오만한 귀족 컨셉으로 ㅎㅎ

Leessa / 100화 기념으로 시간 좀 쏟아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로리콤MK / 시마다 일족이 또...!

Polrais / 히익?;

즐을가암요 / 삼연참은 무리오!

spadel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답이네요

ads123 / 샌드위치 각이 나와야 할터인데요!

무꾸914 / ㅠㅠㅠㅠ 베아트리체도 없으니 유니벨 혼자서 정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다닙니다. 흑

llSongOfBladell / 린조 ㅋㅋㅋㅋㅋ 오늘의 드립왕이다!

Mr윤 / 옙,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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