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더하임 공성전 -->
티아의 첫 야습은 더할 나위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어비스 측에서 식량을 노릴 것이라 생각한 플로라는 군량고의 방어를 강화했지만, 티아는 오히려 그 점을 역이용했다. 그녀가 알브헤임 진형의 배치도를 살펴보니 군량곡 창고와 무기 창고는 서로 반대편에 떨어져있었고, 상대적으로 무기 창고 쪽은 방비가 부족한 게 눈에 띄었다.
티아는 늦은 밤 군량고 쪽으로 암살단원들을 먼저 보내 알브헤임군의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게 했다. 병사들은 현재 보유한 식량이 전부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이러한 위기 의식을 공유하고 있던 차였다. 갑작스런 야습 소식에 전 엘프들이 소란스럽게 군량고로 몰려든 틈을 타, 암살단원 스무 명이 동시에 무기 창고로 난입하였고, 경비들을 제거한 다음 화살들을 불태우는 데 성공했다. 모든 화살을 태울 수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전체 보유량의 절반 이상을 없앤 것은 실로 큰 성과였다.
알브헤임 측이 화살 방비에 다소 방심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에겐 화살이 너무나도 흔하디 흔한 자원이기 때문이었다. 숲에 지천에 널려있는 나무 몇 채를 뽑아다가 엘프 장인들에게 맡기면 순식간에 화살 몇 뭉치가 뚝딱 만들어진다. 엘프들은 화살은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물건이라는 인식이 뇌리에 박혀 있었고, 엘프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난 티아는 바로 이 점을 노렸다.
소란에 잠에서 깨어난 플로라는 벌어진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곤란하군요. 정말 곤란해요."
플로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으아아앙! 플로라 언니! 아파아아!"
그리고 그녀의 무릎 위에는 여지없이 린이 엉덩이 체벌 자세로 놓여 있었다. 린이 고개를 돌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소리쳤다.
"화살 조금 탄 것 정도는 괜찮잖아! 그 정도는 금방 구하잖아!"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린."
어비스의 영토는 엘프의 숲과는 달리 튼실한 나무 한 채 찾기 힘든 황량한 황무지였다. 거기에 혁명군에 의해 보급로도 끊겼으니 식량은 물론 화살의 추가 보충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현재 있는 화살로만 싸워야 했다.
"…이건 앞으로의 공성에 중대한 차질을 빚을 문제랍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린의 엉덩이를 짝 하고 때렸다.
"으아앙! 플로라 언니 바보오! 언니도 린이랑 르네 언니한테 군량고를 지키라고 했으면서!"
"어머, 어머. 린. 지금 제게 말대꾸 하는 건가요?"
플로라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걸렸다.
"그, 그게 아니라! 아얏! 아파아!"
"저는 군량고의 방비를 강화하라고 말했지. 화살의 방비를 소홀히 하라고 말한 적은 없답니다."
"아얏! 으아앙! 린이 잘못했어요!"
플로라는 계속해서 린의 엉덩이를 때렸다. 옆에서 공손히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르네는 동생인 린이 맞을 때마다 움찔 움찔 놀랐다.
'하아, 이제 좀 화가 가라앉네요.'
그녀는 린과 르네를 뒤처리를 위해 보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뭔가 수를 써야겠어요.'
그저 공성을 성공시키면 되는 것이 아닌 시간 제한이 있는 싸움이었다. 초조한 마음이 일었다. 플로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지휘관 창을 열었다.
그렇게 날이 밝아 오며 5일차 공성이 시작되었다.
야습의 효과는 바로 드러났다.
엘프 궁병대가 화살을 아껴서 사용하는 게 체감이 될 정도로, 화살이 날아오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특히 알브헤임 최대 전력이라 할 수 있는 '포쳐'들의 활동이 줄었다는 점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그들의 시간당 화살 사용량은 엄청났기에, 플로라도 활용을 제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총 병력에서 궁병들이 삼분의 일을 차지하는 알브헤임군에 '화살 부족'이란 것은 식량 부족만큼이나 치명적으로 작용했고, 엘프들은 뒤늦게 화살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고 있었다.
바로 어제는 성벽을 무너뜨리고, 방호벽을 여러 군데 박살냈으며 성벽 위의 어비스군의 수를 줄인 것 물론, 심지어는 총사령관인 티아의 목숨까지 노리는 등 눈에 띄는 성과를 여럿 거두었지만 오늘은 지지부진했다. 모두 화살 부족으로 파생된 나비 효과 때문이었다.
반면 어비스군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알브헤임과의 전쟁은 그야말로 화살과의 싸움이었다. 잠시만 한 눈 팔아도 언제 어디서 화살이 날아와 두개골이 박살 날지 몰랐다. 그것은 공포였고, 병사들은 하나같이 화살 노이로제를 호소했다. 아군의 화살 소리만 들어도 깜짝 깜짝 놀랐으며, 휙휙 하는 바람소리만 들려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적들의 화살 공격 빈도가 눈에 띄게 줄자 병사들은 살판이 났다. 병사들은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준 티아의 전략을 칭송했다.
"이 대륙에서 덜렁거리는 게 달린 채로 태어난 이상 전쟁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여. 기왕 전쟁을 할 때 하더라도 윗사람이 좋아야 하는 법이제!"
"고럼 고럼."
"윗사람 잘못 만나서 개죽음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 우린 다행이지."
병사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마침 성벽 회의가 끝나고 티아와 애니록스, 유니벨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티아를 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군사님! 거 야습 좋았소!"
"캬, 역시 아름답다니까."
"음. 아름답지."
"머리가 좋은 만큼 아름다워."
티아는 못들은 척 지나쳤다. 그러나 그녀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군사님. 왜 그러십니까?"
애니록스가 물었다.
"절세미녀로 살아가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로다."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애니록스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힐끔 유니벨의 눈치를 보았다. 유니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늘게 뜬 눈, 입가에 걸린 억지스러운 미소, 안면 근육 하나하나가 '어이 없음.' 이라는 단어를 전력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티아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청아한 음성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본녀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업적을 세우던 본녀의 빛나는 외모에 전부 묻혀버릴 뿐이니, 조금은 허망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병사들도 자기들의 사령관의 이야기를 하다가도 결국은 외모 이야기로 종결이 될 뿐이지 않는가. 아름다운 것도 고충이 많으니라."
"…으아아! 짜증! 짜증나! 재수없어!"
결국 참지 못한 유니벨이 본인의 빨간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야 이 새끼들아!"
유니벨이 병사들 쪽을 바라보며 버럭 소리질렀다. 그들이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경비 중에 잡담하게 되어있냐? 앙? 전쟁이 장난이야? 잠깐 공격이 느슨해졌답시고 빠져가지고! 내 밑으로 다 뒈질 줄 알아! 이 새끼들아!"
병사들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장군."
티아가 유니벨을 부르자 그녀가 홱 돌아보았다.
"아, 뭐! 뭐! 병사들 갈구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해?"
"군율을 세우고 군의 기강을 바로 잡는 것은 마땅히 필요하다. 허나 이 상황에서 갑자기 병사들에게 뭐라고 하는 것은 오해를 살 염려가 있지 않겠는가?"
그 말에 유니벨이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애니록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픽' 하는 소리를 냈다.
"……"
얼음장 같이 차가운 유니벨의 시선이 애니록스에게로 향했다.
"변태 가르마, 너어……"
'허억!'
애니록스는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파악했다. 잡담하다 잘못 걸린 병사들은 이미 도망쳐버렸고, 그녀의 모든 분노는 온전히 자신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분노를 풀풀 날려대던 유니벨이 갑자기 생긋 웃는 표정을 지었다.
"애니."
웬일로 이름, 아니 호칭을 달달하게 불러주는 유니벨이었다.
"잠깐 나 좀 볼래?"
"……네? 아, 아니. 제가 좀 바빠서! 군사님이 시키신 일도 있고……"
그렇게 말하며 애니록스가 티아에게 구원이 필요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티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응? 본녀가 오늘 지시 내린 일은 없었지 않나. 곧 바빠질 것이니 편히 쉬어두거라."
"아, 군사니임!"
"자아ㅡ 어서."
유니벨이 사뿐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애니록스의 소매를 붙잡고 흔들었다. 동작 하나하나가 청순함 그 자체였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성벽을 내려가는 계단을 가리켰다.
"……크, 크흑."
애니록스는 눈물을 삼키며 따라갔다.
그리고 그날, 애니록스는 개 맞듯이 맞는다는 게 어떤 건지 몸소 체험했다.
*
5일차 공성은 전반적으로 수월하게 끝이 났다. 다들 소중한 하루를 쉽게 버텨냈다는 데에 고무되어 있었고, 영리한 티아는 이때다 싶었는지 술과 고기를 풀어 병사들의 사기를 더 증진시켰다.
낮에 이어 밤 또한 평화롭게 지나갔다. 알브헤임에서는 가끔 수비병들의 컨디션을 망가뜨리는 차원에서 공격해오곤 했지만, 이날 밤은 그런 야습도 없었다. 병사들은 간만에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어김없이 동이 텄다.
"적병이 움직인다!"
"정렬하라!"
초병의 외침에 모든 수비병들이 성벽으로 몰려들었다.
"어, 어라?"
"갑자기 뭐야?"
"뭔가 수가 늘어난 것 같지 않수?"
병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마침 티아와 유니벨, 애니록스 또한 성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오, 아침부터 왜 이렇게 산만해?"
아직 잠이 덜 깬 유니벨이 투덜거렸다.
티아는 계단을 오르면서 웅성거리는 병사들의 이야기를 귀에 담고 있었다. 그리고는 뭔가 심상치않음을 느끼고 전속력으로 뛰어나갔다. 숨을 헐떡이며 성벽 끝까지 도착한 그녀가 성벽을 짚고 고개를 내밀어 적진을 바라보았다.
"……!"
그녀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구, 군사님!"
"야! 갑자기 왜 그래?"
뒤따라 달려온 애니록스와 유니벨도 같은 표정이 되었다.
"…마, 말도 안 돼."
병력이 더 늘어있었다.
기존의 알브헤임 병력 옆으로 새로운 군대가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경악스러운 것은 그 군대의 정체였다.
"어째서 저들이 여기에……"
티아의 허망한 독백이 이어졌다. 바람에 휘날리는 황색 배경에 동방어가 적힌 깃발.
다름아닌 백제의 군대였다.
========== 작품 후기 ==========
이것저것 출판 준비를 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ㅅ; 힘들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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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을가암요 / 그러합니다. 화살없는 궁병은 무쓸이죠!
Mr윤 / ㅠㅠ 제가 할 일을 대신 해주시는군요! 덕분에 평소보다 추천이 더 많았습니다.
Digimon0002 / 닭 대신 돌격!
Xedrions / 굿굿
무꾸914 / 알브헤임 알란드 모두 B급이 정치형 같이 다른쪽에 쏠려있고 B급 무력형 영웅은 없다는 설정입니다. 알브헤임은 B급 한명 보다 더 좋은 자매가 있구요.
MoriyaSuwako / 넵, 맞습니다!
Speedwagon / 로드가 저랑 닮았다뇨? 저는 그런 ㄹㄹㅋ 모릅니다
시크병장 / 정확히 기억하시네요!
육식곰 / 감사합니다. 자꾸 틀리는 오타네요 ㅠㅠ 수정했습니다
로리콤MK / 화살이 없으면 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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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어여쁜 엘프들만 있는게 아니죠 ㅋㅋ 그리고 본처의 길을 열어두는 겁니다 후후(?)
@빛과하늘 / 기대해 주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