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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전 문명게임-105화 (105/296)

<-- 언더하임 공성전 -->

하루 전.

게노세르크에게 허무하게 스미스타운을 빼앗긴 선광은 고심 끝에 승부수를 두기로 했다.

천혜의 요새인 플랫랜치에서 병력을 주둔시켜 버틴다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플랫랜치는 분명 우수한 방어력을 가진 요새였지만 배수의 진, 즉 아군이 퇴각할 길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선광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안정보다는 모험을 걸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름 신경 써서 수성을 준비한 스미스타운이 간단히 뚫렸을 때, 선광은 불현듯 나머지 요새들도 수성과 퇴각을 반복하다가 무난히 밀릴 것만 같은, 그런 위기감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이 결심은 로드의 실버시타델 섬멸전에 자극 받은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선광은 생각했다.

'아로게쓰 놈들은 호전적인 성향이라 좋은 요새를 두고도 패배했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라면 진득하게 버틸 수 있어.'

물론 마냥 버틴다는 계획만 세워둔 것은 아니었다. 플랫랜치의 6천 병력 외에도, 선광은 수도의 자원을 쥐어짜내어 2천의 병력을 추가로 만들어냈다. 게노세르크군이 플랫랜치의 요새를 공격하는 동안 이 2천의 병력들이 그들의 뒤를 치는 것이 선광의 계획이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비월과 플랫랜치라면 며칠 정도는 가뿐히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선광은 왕궁에서 초조하게 풋힐랜치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 ‘말렉’님이 ‘선광’님께 1:1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뭐?"

놀랍게도 상대 플레이어의 대화 신청이었다. 선광은 머릿속에서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

"간만이군."

스크린 창에 거대한 호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몇 번을 보아도 좀처럼 적응이 안 되는 흉악한 인상이었다. 선광이 마음을 가다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입니까? 말렉."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알겠나?"

대면하자마자 대뜸 수수께끼인가? 선광은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주위를 훑었다. 실내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전장 한복판에서 실내라니? 천막의 내부도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설마……!'

"크흐흐, 눈치챘군."

말렉의 입가가 씰룩였다.

"여기가 바로 풋힐랜치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선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말렉이 풋힐랜치에 들어가 있다는 말은 자신의 군대가 패했다는 뜻이었다. 그는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며 말했다.

"그 말을 저더러 믿으란 말입니까? 그렇게 빨리 풋힐랜치를 점령하는 건 불가능 합니다."

"병신."

그가 툭 내뱉듯 말했다.

"정 못 믿겠으면 네놈의 국가 정보 창을 확인해보면 될 거 아냐? 게이머 출신 맞냐?"

"……"

선광은 즉시 국가 정보창을 열어 보았다. 창을 내려가던 그의 시선이 우뚝 멈췄다. 영토의 수가 '3'으로 나와있었다.

'……큭, 사실이란 말인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만약 풋힐랜치가 아직도 버티고 있다면 영토의 수는 '4'로 나와야 할 것이었다.

"표정이 꽤나 볼만한걸. 크하하하하!"

선광은 굴욕과 분노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래서 뭡니까? 패자를 농락이라도 하려고 연락했습니까? 볼일 없으면 끊겠습니다."

"워, 워, 그렇게 열 내지 말라구. 정말 이대로 연락을 끊어도 괜찮겠나? 이 상황에 대해 궁금한 게 있을 텐데."

선광이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반대로 말렉은 여유롭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크흐흐! 기분이다. 특별히 질문을 할 기회를 주지. 기회는 한번뿐이니까 신중하게 물어보도록."

선광은 눈을 감았다. 대화가 말리고 있다. 주도권이 넘어가 완전히 저쪽의 페이스였다.

질문할 기회를 준다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다. 스스로가 판단해도 지금 자신의 상태는 정신적으로 벼랑 끝에 몰려 있었고, 여기서는 바로 1:1대화창을 닫는 게 정답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게 있었다.

선광은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말을 몇 번이고 다시 삼켰으나, 결국은 처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비월은 어떻게 됐습니까?"

"오, 그래. 그래. 그게 궁금했군."

말렉이 히죽 웃었다.

"그녀는 아직 살아있다. 내가 붙잡아 뒀지."

"……!"

그 말을 듣는 순간 선광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안도해야 하는가? 아니면 분노해야 하는가? 하지만 지금 그의 가슴을 지배하고 있는 감정은, 분하지만 안도감이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선광이 너덜너덜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래. 원하는 거 말이지. 사실 내가 이번 풋힐랜치 공략에 좀 무리를 했거든. 더럽게 까다로운 요새더라구. 그래서 난…… 수인들을 폭주시켜 요새에 투입시켰다."

선광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도 게노세르크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었다. 폭주라 함은, 야생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밖엔 난리도 아니야."

말렉이 어깨를 으쓱하며 남 말하듯 말했다.

"눈이 돌아가서 자기들끼리 물어 뜯고 죽이고, 네놈 병사들의 시체로 포식하고 있지. 이젠 내 얼굴도 못 알아보더라고."

"……제정신이 아니군요. 강제 폭주의 리스크가 얼마나 큰지는 당신도 베타 테스트 때의 영상을 봐서 알고 있었을 텐데요."

"크흐흐. 뭐 어때? 그 말도 안 되는 요새를 뚫고 들어가는데 소모되는 병력이나, 깔끔하게 요새를 함락시키고 자기들끼리 물어 죽이면서 나오는 피해나, 비슷비슷할걸? 네놈이 꼼수를 쓰는 바람에 좀 서둘렀을 뿐이야."

선광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말렉은 후방으로 보낸 2천 병력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요새 점령을 서두르려 한 건가? 정황이 맞아떨어졌다.

"아무튼."

그가 손가락을 뻗었다.

"내가 지금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니, 네가 대신 책임을 져줘야겠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선광은 불안한 얼굴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 대신 네가 지원군으로 언더하임에 가라."

"……!"

선광이 입이 쩍 벌어졌다. 말렉은 '나 대신'이라고 했다. 그 말은 어비스를 배신하고, 알브헤임을 도와 언더하임을 함락시키는 뜻이었다.

"귀찮게스리, 플로라 이 년이 생각보다 고전하고 있는 듯 하더라고. 내게 연락해서 도와달라고 얼마나 찡찡대던지."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요! 아무리 주신전이라 해도 상식 선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선광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 제안은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오, 그래. 정말 그래도 괜찮겠나?"

말렉이 시선을 옆으로 돌리더니, 큰 소리로 들어오라고 외쳤다.

절그럭!

사슬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선광은 온 몸의 털이 삐쭉 곤두서는 듯 했다. 불길한 예감이 몸을 타고 흘렀다.

화면으로 한 수인이 쇠사슬을 붙들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쇠사슬은 한 인간의 목에 찬 목걸이에 걸려있었다.

선광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비월!"

두 팔이 구속된 비월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끌려오고 있었다. 수인은 쇠사슬을 잡아당겨 그녀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곤 말렉에게 경례를 하며 문을 닫고 나갔다.

"비월!"

선광이 다시 소리쳤다.

"비월! 괜찮나? 비월! 비월!"

그러나 같은 플레이어나 신관이 아니면 지휘관 창을 볼 수도, 그 곳에서 나오는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선광의 처절한 부르짖음은 비월에게 닿지 않았다. 말렉이 쓰러진 비월의 몸 위로 자신의 발을 툭 올리며 말했다.

"황홀했지."

말렉이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맛이 각별하더군."

"이 씹어 죽일 새끼가아아아아!"

콰앙! 선광이 달려들어 지휘관 창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눈이 분노로 혈관 하나하나가 보일 정도로 시뻘개졌다.

"죽인다! 주신전이고 뭐고! 네놈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인다!"

"크흐흐흐."

말렉이 삐딱하게 웃었다.

"내가 게이머 출신은 아니다만, 하나는 제대로 알고 있지. 날 뽑은 신이 얼마나 강조하던지."

그가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절대로 영웅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것."

"……"

"우리가 싸우러 왔지. 쿵짝쿵짝 연애 사업이나 하러 왔나? 더럽게 한심한 새끼들. 베타 때도 영웅이랑 정분이 났다가 나라 말아먹은 새끼들이 어디 한 둘 이냐고."

하지만 말렉의 목소리는 선광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죽인다.', '죽인다.'를 반복해서 읊조리고 있었다.

"쯧쯔, 완전히 맛이 갔구만. 아무래도 좋아. 그래서 어떻게 할 텐가? 내 말에 따를 텐가?"

"……"

선광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내가 선택을 도와주지."

그가 목줄을 잡고 비월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의 안대를 벗겼다. 찡그리고 있던 그녀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곤 눈동자를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말소리가 들리기에 말렉이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방안에 아무도 없어서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이봐, 비월. 네 왕에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나?"

"……"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렉을 쏘아보았다.

"……그만 하시지요."

목소리에 힘은 없었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호오."

"…대체 얼마나 소녀를 욕보일 생각이십니까? 소녀의 바램은 하나뿐이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이 상황에 선광을 들먹이자 오히려 화를 산 모양이었다.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말렉이 좋은 생각이 났는지 씩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래. 사실은 포로 교환 문제로 선광에게 서신을 보낼 거거든. 거기에 쓸 말이 있으면 지금 하라는 거야. 혹시 아나?"

말렉이 지휘관 창을 슬쩍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 녀석이 널 구하러 힘을 써 줄지도."

"……"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전쟁에서 진 패장이 무슨 낯으로 그 분께 도움을 구하겠습니까. 소녀는 할 말이 없사옵니다."

"헹, 재미 없구만!"

"……그저."

그녀가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방향은 공교롭게도, 선광이 바라보고 있는 지휘관 창이 있는 곳이었다.

"부디 소녀 때문에 대업을 그르치지 말아 주시라. 그 말 정도는 남기고 싶사옵니다."

"크하하하하! 이거 걸작이군! 걸작이야!"

말렉이 자신의 허벅지를 탕탕 치며 요란하게 웃어댔다.

선광은 지독한 감정의 파문이 밀려들어와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나왔다. 말렉의 거친 웃음 소리도 선광의 귀에는 변조된 목소리처럼 느릿하게 '꺽' '꺽' 하고 들렸다.

한바탕 크게 웃고 난 말렉이 다시 문 밖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봐, 다시 데려가!"

그 수인이 돌아와서 비월의 쇠사슬을 붙들고 방을 나섰다. 말렉이 다시 지휘관 창을 바라보았다.

"크흐흐… 너무 날 원망하지 말라고. 이 모든 계획이나 연출은 플로라의 머릿속에서 나온 거니까."

"……플로라."

"그래, 도우러 가지 못하겠다니깐 대안을 줄줄 늘어놓더군. 그 년은 말하지 말랬지만, 배후가 누군지도 모르고 당하면 얼마나 비참하겠냐? 아, 그런 그녀를 도우러 가야 한다는 게 더 비참한가? 크하하하!"

"……"

한바탕 껄껄 웃던 말렉이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자, 장난은 여기까지 하지. 어떻게 할건가? 선광."

"……"

"나를 따를 텐가, 아니면."

말렉의 눈에 흉흉한 야수의 안광이 흘러나왔다.

"짐승에게 먹히고 남은 그녀의 시체를 서신으로 받아볼 텐가."

========== 작품 후기 ==========

kailce / 백제!

복지국가 / 네, 백제.

하렌트 / 음..

死神降臨 / 그러합니다.

kaley / 이번편에 밝혀졌네요

KeinHoof / 과연?!

로리콤MK / 그녀는 여기 없습니다요.

akksi / 히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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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병장 / 좋은 추측이었지만, 전자였네요. 아, 그리고 카사르-〉게노세르크 이빈다!

@빛과하늘 / 다음편 여기 있습니다!

니알라토텝 / Correct!

@Speedwagon / 경찰서 잘다녀 오세요! 그리고 티아는 공주병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공주병인듯. 사실 그 나름의 힘든 사연은 있는듯 하지만 남이 보기엔 그냥 공주병일뿐..

@레거노프 / 공공 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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