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더하임 공성전 -->
"……죄송합니다."
1:1 대화창 화면의 선광이 로드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납득이나 이해를 구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마지막으로, 사과를 드리고 싶어서 연락했습니다."
"……음."
자초지종을 들은 로드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일방적인 결별 통보에는 조금 화가 나긴 했지만, 그를 비방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로드는 우선 이렇게 말했다.
"비월의 일은 안됐습니다."
"……"
선광이 천장을 올려다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수십 년은 더 늙은 것 같은 그의 얼굴에서 짙은 감정의 파문이 느껴졌다.
"그럼 이제 백제는……"
"네. 4국 동맹은 불가능하니, 제가 게노세르크의 속국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렇군요."
동맹국을 배신하고 대뜸 적국에 붙는다니. 동맹국의 입장에서 서운한 걸 떠나서, 백제의 평판은 끝장이었다. 앞으로 누가 백제와 손을 잡으려 하겠는가? 사실상의 주신전 포기 선언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만약 천운이 따라 게노세르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날이 온다고 해도, 백제는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외면당한 채 영원히 대륙에서 고립될 것이다.
'……이것 참.'
로드는 선광을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와는 참 동맹으로서 인연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편으로는 순수하게 놀랐다.
'……선광이라는 플레이어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이야.'
아로게쓰 공략 때, 로드의 면전 앞에서 대놓고 '자무카를 죽이는 건 우리 백제입니다.'를 외치던 사람이었다. 모든 행동에서 계산이 철저하고,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 했던 그가 지금, 이번 주신전에서 가장 멍청하고 손해 보는 선택을 저지르려 하고 있었다.
동맹국으로서 그의 선택을 막아야 했다. 로드는 진중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말렉이 부탁을 들어주면 비월을 풀어주겠다고 명확히 약속했습니까?"
"아뇨."
"모든 플레이어가 보는 앞에서 공표한 3:3 전쟁입니다. 이런 짓을 하면 타국의 누구도 백제와 손을 잡지 않을 겁니다. 그 상황도 염두하시고 내리는 결정입니까?
"네."
선광은 묵묵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반응이 없다. 조금 더 세게 나가볼까?'
로드가 마음을 굳게 먹고 말했다.
"만약 이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말렉은 계속해서 비월의 목숨을 담보로 무리한 요구를 할 겁니다. 정말로 그녀를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정말로 말렉이 자신의 속국에게 에이스 영웅을 되돌려주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할까요? 그것은 당신의 바램이고, 망상일 뿐입니다! 비월은 그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죄송하지만."
그가 괴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그랬을 겁니다."
선광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내린 결정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무능한 왕 탓에, 한 나라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자신을 후원하는 신 또한 주신 경쟁에서 밀려날 것이다. 영겁의 세월로 공허에 정신이 잠식되기 직전인 그의 담당 신은 몇 번이고 최고신들에게 자신의 소멸을 요청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그래서 더더욱 주신 자리에 목을 메고 있는 자였다. 선광은 이 모두를 볼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선택을 되돌릴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녀의 죽음을 자신이 결정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로드는 선광의 결심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광은 기본적으로 영리하고 약삭빠른 플레이어였다. 수지타산을 모두 고려하고 몇 번이고 심사숙고를 한 뒤에도 그가 내린 결정을 번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 한다고 해서 결심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선광 님."
결국, 로드는 백제를 포기하기로 했다.
선광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잠시 가만히 있다가, 너덜너덜한 목소리로 짧게 한마디 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대화를 종료했다는 알림과 함께, 선광의 얼굴이 사라졌다.
"……"
여운이 길었다.
로드는 잠시 멍하니 지휘관 창 화면이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쓰러지듯 간이 침대에 몸을 맡겼다.
"……으아아아! 미치겠네, 진짜!"
때는 늦은 새벽, 천막 안이었다. 세상 모르고 잘 자고 있던 와중에 선광이 결정타를 날려주고 갔다. 잠은 다 날아갔다.
'……백제가 이탈해서 서부 동맹에 붙는다니……'
갑자기 2:4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
기껏 그림을 다 만들어놨더니 이렇게 상황이 꼬여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세상 만사 생각한 대로 돌아가는 법이 없었다.
좀처럼 멘탈이 회복이 되지 않아 멍해 있는 그때.
부스럭.
어디선가 기척이 느껴졌다.
'무슨 소리지?'
처음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갈수록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로드의 머리는 상황을 분석한답시고 핑핑 돌아갔다. 지금 야영하고 있는 지역의 이름은 통곡의 숲. 로드가 여기서 야영을 하자고 하니 부관들이 '헉, 정말 여기서요?' 하며 놀라는 얼굴이 떠올랐다. 종종 하급 언데드들이 출몰한다는 장소라고 했다.
상황 분석 결과.
무섭다.
'끙, 괜히 혼자 있겠답시고 피닉스를 내보냈나?'
부스럭.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로드가 재빨리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는 순간,
천막을 뚫고 하얀 머리카락의 여성이 훅하고 들어왔다.
"우아아아악! 귀, 귀신!"
"…?"
그런데 귀신치고는 고개를 갸웃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로드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깜박거린 다음, 다시 앞을 보았다.
"주인님…"
다름아닌 베아트리체였다. 그녀가 눈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노, 놀래라. 베아였구나. 그런데 여긴 왜…?"
"……주인님 천막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그리고……"
그녀가 부끄러운 듯 두 손을 쪼물딱거렸다.
"혼자 있으니 잠이 잘 안 와서……"
세상에, 하프 밴시가 귀신을 무서워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다.
"난 괜찮으니까 여기서 자고가. "
"…정말요?"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로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쪼르르 달려와 침대에 콩 하고 누웠다.
'귀여워라.'
로드도 옆에 누워서 그녀에게 팔베개를 내주었다. 그녀는 몇 번 사양했지만 결국 로드의 팔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몸을 태아처럼 웅크린 그녀가 잠시 몸을 뒤척이더니 이내 편안한 자세를 찾은 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크윽!'
정말이지 치명적인 귀여움이었다. 로드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오동통한 뺨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그녀가 '우우웅.' 하며 그러지 말라는 앙탈을 부렸다. 환장하겠다. 요 예쁜 것! 대체 요 예쁜 것이 대체 어디서 나왔을꼬!
"……"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던 로드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알고 있다.
가신들에게 정을 주는 게 금기라는 것 정도는.
왕은 고독한 존재다.
대업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우조차 희생양으로 밟고 올라갈 수 있어야 한다. 왕의 결정은 무게가 다르다. 그 어깨에는 수많은 목숨이 걸려있기에, 결코 개인적인 감정으로 대사를 그르치는 행동은 해서는 아니 된다.
하지만 만약에 말렉이 베아트리체를 붙잡고 협박했다면,
자신은 선광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눈 앞에서 베아트리체가 새근새근 잠이 드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답을 낼 수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깊게 하는 것조차도 싫었다.
지금은 그런 상황이 닥치지 않게 위해서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선광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그런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지금 닥친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하아.'
로드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
6일차 공성은 어비스군 입장에선 그 어느 때보다 가혹하고 고달팠다.
2천명 가량의 백제군 합류가 특히 크게 작용했던 점은, 그들이 화살을 다량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알브헤임에서 쓰는 것과는 규격이 달랐지만, 장인은 도구를 따지지 않는다는 말도 있듯 엘프 궁병들은 새로운 화살에 빠르게 적응하였다. 게다가 잦은 공성으로 보병이 크게 줄어들어 고민이던 알브헤임군에 보병이 주력인 백제군의 합류는 큰 시너지 효과를 낳는 격이 되었다.
전쟁은 동이 트는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플로라는 기세를 몰아 총력전을 지시했다. 북문을 공략하던 병사들까지 전부 동문으로 합류하게 하여, 한 방향에서 병력의 우위를 통한 맹공을 퍼부었다.
요새의 바로 아래는 적병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으며, 하늘에서는 화살비가 빼곡히 내려왔다. 알브헤임의 궁병들은 화살을 제대로 쏘지 못했던 한을 푸는 마냥 퍼부어댔고, 그 엄청난 화력에 방호벽은 걸레짝이 되어 온전한 부분이 없었다. 성벽 위 병사들은 엄폐물이 없이 그대로 화살에 노출되었다.
거기에 숲의 수호자들이 성벽에 붙기라도 하면 그 지점은 피바람이 불었다. 알브헤임의 화살 세례 때문에 어비스 측 공병들이나 궁병들이 제대로 수호자를 견제할 수도 없었다.
에고 게이트인 문짝이가 예상 이상으로 잘 버텨주고는 있었지만 일주일 가까이 공성 무기에 두드려 맞아 그 또한 내구력이 한계에 다다랐다.
몇 번이고 성벽이 적에게 넘어갈 위기가 닥쳐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티아는 의연하게 대처했고, 오뚜기처럼 버티고 또 버텼다.
마침내 밤이 되어서야 알브헤임과 백제 연합이 물러났다.
야간 공성은 주력 공격 수단인 화살의 적중률이 떨어지는 문제도 있었고, 로드의 본군과도 싸워야 했기 때문에 체력을 안배하기 위함인 듯 했다.
하루치 공성이 끝나고 성을 지켜냈지만, 어비스 진형에 승리 분위기는 감돌지 않았다. 병사들의 사기와 체력은 바닥이었다. 그간 다섯 번의 공성을 모두 합쳐도 이 한번의 공성에 의한 피해가 더 큰 것 같았다.
"……하아. 하아."
티아는 바닥에 엎드린 자세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너무 지쳤다.
온전히 지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눈 앞에서 칼이 휘둘러지고, 옆의 병사가 화살에 맞아 죽는 등 총사령관인 그녀가 생명의 위협을 수없이 받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끝까지 인내하며 버텨냈다.
"……그 포즈는 뭐야? 거유 엘프."
퀭한 얼굴의 유니벨이 입꼬리를 올려보았으나 힘이 없어 보였다.
"한심하긴, 야간 경비는 병사들한테 맡기고 들어가서……"
털썩.
유니벨이 돌연 바닥에 쓰러졌다.
"장군! 정신 차리거라! 장군!"
티아가 고개를 번쩍 들어 엉금엉금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른 병사들도 그 모습을 보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군의를 불러라!"
"들것 좀 가져와!"
마침 근처에 있던 군의가 유니벨의 상태를 살피고는 탈진한 것뿐이니 쉬면 상태가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언더하임을 지키는 어비스군의 유일한 B급 영웅인 유니벨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린과 르네 자매를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유니벨 뿐이었고, 그녀의 광범위 폭격이 절실히 필요한 지점도 수도 없이 많았다.
'……전부 본녀가 부족한 탓이다.'
성벽이 언제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티아는 유니벨에게 자주 의지할 수 밖에 없었고, 유니벨 또한 티아의 요구에 군말 없이 따랐다. 그러다 결국 탈진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티아는 확신했다.
내일 공성이 시작되면, 틀림없이 언더하임은 뚫린다.
티아가 예상한 로드의 복귀 시일은 아무리 빨라도 8일차였고, 9일, 10일 혹은 그 이상 정도 걸릴 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내일까지 버티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결단을 내려야 하는가.'
========== 작품 후기 ==========
고등학교 두개 중학교 두개 있는 동네 시험기간에 도서관은 올게 못 된다는걸 깨달았습니다. 크흡.
도서관에 감독 선생님 파견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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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s123 / 세상에...! 포기하지 않는척 하는게 포인트군요. 그런데 보복의 상태가?
하렌트 / 플로라를 일단 확실히 조져야 할텐데요.. 흠.
kaley / 본인이 우주 최강 멍청이라는 사실을 가장 자각하고 있을듯. 아 참고로 백제왕은 지금 수도에 있습니다.
알테니아 / 동물색히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월은... 흑흑 ㅠㅠ
sj8077 / 시체 서신 받는순간 선광은...
무꾸914 / 로드 : (흐뭇)
빛과하늘 / 여자 〈 게임 인것인가..
시크병장 / 오오, 그러네요! 본대가 게노세르크로 바로 가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spadel / 말렉이 대신 해주었습.. (퍽!)
@...(-1)... / 잠시만요! 그 렉이 아닐텐데!
@Speedwagon / 스피드웨건님은 멘붕각인가!;
@로아리아 / 이분... 신사력이 하늘을 찌르다 못해 우주로 갈 기세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