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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전 문명게임-107화 (107/296)

<-- 섬멸전 -->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어라?"

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어?라라?' 하는 소리를 냈다.

"플로라 언니! 뭔가 이상해!"

"……그렇군요."

플로라도 린과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성벽 위에 요새를 지켜야 할 병사들이 없었던 것이다.

"쟤네들 다 어디간 거야? 항복이라도 하는 거야? 뭐야?"

"……으음."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플로라가 지시를 내렸다.

"적의 함정일지도 모르니 평소대로 공성을 진행하겠습니다."

숲의 수호자들이 성벽에 달라 붙고 병사들이 그들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병사들이 성벽에 다가오는 데도 화살 하나 날아오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도 없습니다! 텅 비었습니다!"

성벽에 올라간 부관이 '이상 없음'을 외쳤다. 마침 성문 쪽도 작업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끄아아아아악! 사람, 아니 성문 살려!"

공성 병기가 한 번 내려쳐질 때 마다 문짝이가 요란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이 나라는 성문이 뭐 이래?"

"시끄럽구만."

콰직!

결국 공성 병기의 힘을 못 이기고 문짝이가 반쯤 박살이 나며 성문이 벌컥 열렸다. 그의 찢어질듯한 비명 소리도 멎어 들었다.

"…이제 안 들린다. 죽은 건가?"

"그런가 보군."

알브헤임?백제 연합군은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영내로 들어왔다. 6일간의 치열한 공성이 무색할 정도로 허무한 결말이었다.

"……아무도 없군요."

성문을 통과한 플로라가 상업지구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싸한 분위기에 정적이 흐르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여기저기서 긴장이 풀린 듯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요새를 버리고 도망쳤군."

"루트 때도 그렇고 어비스 이것들은 야반 도주가 특기인가 봐?"

"푸하하하하!"

"떠돌이들다운 결말이로군요."

병사들은 거의 승리를 확실시 하고 있었다. 하지만 플로라는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아직 방심할 때가 아니에요. 예전에 아로게쓰가 쳐들어 왔을 땐 시가전을 펼쳤던 적도 있었습니다. 적병이 매복해 있을 지도 모릅니다."

플로라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신중한 걸음걸이로 주위를 살피며 상업지구를 통과했다. 그러나 상업지구가 끝나고 왕궁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

마침내 왕궁까지 들어왔다. 그 내부 또한 텅 비어있었다.

"우리가 이겼다!"

"오오오!"

왕궁에 도착하자 병사들이 함성을 부르짖으며 승리를 자축했다.

"우와! 우와! 여기가 미천한 인간들의 왕궁인 거야? 미천한 것들 주제에 나름 잘 만들었네!"

"린. 뛰어다니면 안돼요."

"나 2층 올라갔다 올게!"

린이 꺄르르 웃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폐하."

주위의 동태를 살피고 온 르네가 플로라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병사들, 그리고 왕실과 관련된 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영지에 남아있는 자들은 일반 평민들뿐입니다. 그들을 상대로 조사해보니 늦은 밤 북문을 통과하여 병사들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야간 정찰 임무를 맡고 있던 저희 쪽 병사들의 말과 일치합니다."

"이상하군요…… 정말 이게 끝인 걸까요? 이렇게 쉽게 수도를 내어주다니."

플로라는 국가 정보창을 열어 확인해 보았다. 영토의 수는 '3'. 원래라면 루트와 드러그팜이 혁명군의 손에 떨어졌으므로 영토의 수는 '2'로 나와있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 언더하임에 진입하면서 현황 정보가 '3'으로 갱신된 것이다.

'지휘관 창의 현황이 그렇다면 확실하군요. 후훗.'

플로라는 상황을 추정해보았다. 총사령관인 티아 그란디네가 더 이상의 수성은 무의미하다고 판단, 살아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언더하임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로드가 이끄는 본군과 힘을 합쳐 다시 수도를 탈환하려는 계획일 것이다.

'티아 그란디네. 지금까지 잘 버텨놓고선 끝맺음이 좋지 못하군요.'

왕궁이 있는 수도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핵심 도시. 그곳을 빼앗긴다는 것은 큰 의미였다. 에덴에서는 국적과는 관계없이 영지를 차지한 자가 지배자가 되며, 영지민을 보살필 의무를 가진다. 한 나라의 수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 수도와 왕궁을 빼앗긴 왕은 지지율과 국민들에 대한 지배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현저하게 떨어지게 된다. 왕으로서의 상징성 자체가 흐려지는 것이다. 국민들은 서서히 로드에게 등을 돌리게 될 것이며 로드가 이끄는 병력 또한 더 이상 왕국군이 아닌, 일개 도망자의 군대가 되어간다. 이 모든 상황에 핸디캡 룰이 적용되어, 권능으로 인한 보정 효과를 받는 것이라 예외는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도만큼은 지키려고 하는 게 플레이어들의 성향이었다.

'로드 본인의 생각은 아닌 것 같군요. 그렇다면 아마도 티아 그란디네의 독단. 결사항전 대신 병사들의 보존을 선택했겠죠.'

로드는 틀림없이 언더하임을 되찾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이 뒤바뀌게 된다. 이제는 알브헤임 쪽에서 언더하임을 지키는 입장이 되고, 공성을 거는 쪽이 어비스가 된다.

플로라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자신들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번의 공성으로 요새의 상태가 썩 좋지 않긴 했지만, 수성측의 병력이 더 많다. 게다가 이쪽은 게노세르크의 지원군도 기대할 수도 있었다.

'좋군요. 아주 좋아요.'

그제서야 플로라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티아 그란디네가 화살을 불태웠을 때는 아찔한 기분이었지만, 이제야 상황이 제대로 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전을 선언하고 언더하임의 통치를 시작하겠습니다. 제장들과 도시의 대표들을 불러모으도록 하세요."

*

언더하임 점령 이후 다음날.

알브헤임-백제 연합군은 승리 분위기에 취할 새도 없이 수성 준비에 들어갔다.

자신들이 무너뜨렸던 성벽과 시설들을 다시 보수했으며, 성문을 교체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기에 기존의 성문에 자재를 덧붙여서 사용하기로 했다.

시설 보수 책임자는 언제나 그랬듯 르네가 도맡아서 했다.

"석재는 성벽으로 나르도록. 북문은 보수가 크게 필요 없으니 동문으로 가져가도록 하라."

르네는 병사들을 진두 지휘하면서 손에 든 서류판을 살펴보았다. 골치 아팠다. 한 나라의 수도에 목재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목재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이런 곳에 나라가 들어설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르네 장군!"

전령이 그녀에게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폐하께서? 알겠다. 어디에 계신가?"

전령이 르네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어비스 왕궁의 지하실입니다."

"알았다. 곧 가지."

르네는 잠시 다른 부관들에게 지휘를 맡기고 왕궁의 지하실로 향했다.

왕궁의 계단은 지하 깊은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왕궁의 바로 밑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점에 의아함을 가지던 찰나,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건……'

피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현기증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조금 진정이 되자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어서 와요, 르네."

이곳은 지하 감옥이었다. 르네가 도착하자 의자에 앉아있는 플로라가 손을 살랑 살랑 흔들어 보였다.

그녀의 앞에는 네 명의 남자들이 나무 의자에 앉아 손이 구속된 채 피범벅이 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르네가 놀라서 물었다.

"폐, 폐하. 이 사람들은……?"

"아, 이곳의 영지민들이에요."

그들 모두 입에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넝마가 되어 버린 그들의 모습에 르네는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고문을 지시하신 겁니까?"

"그래요. 아직 뭐랄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서요."

"티아 그란디네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 말입니까? 그건 이미 진술들이 들어 맞지 않았습니까?"

"전 확실한걸 좋아해서요."

플로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인간을 극한의 상황에 몰아 놓으면 다양한 말을 들을 수 있거든요. 그들이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것까지, 뇌가 생존 본능에 의거하여 강제로 수면 위로 끄집어내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을의 우두머리 급들을 붙잡아서 이야기해보았는데, 아무래도 결백한가 봐요. 괜한 주책이었던 것 같네요."

"쿨럭! 쿨럭!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어머, 아직도 말 할 수 있네요?"

그녀가 손짓하자 엘프 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괴이한 고문 도구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왔다.

"아, 아니! 대체 왜 그러시오! 내가 무슨 잘못을 했… 끄, 끄아아아악!"

"수다스러운 남자는 싫어요."

플로라가 웃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튼 이제 찜찜한 생각 없이 마음 놓고 싸울 수 있겠네요. 요새 보수 작업은 어때요? 르네."

"……북문은 거의 완벽하지만, 동문 쪽은, ……훼손 상태가 커서, 완전히 보수하는 데는… 시간이 촉박할 듯, 합니다."

"괜찮아요. 요새 상황이 나빠도 우리 쪽 병력이 더 많으니까 선택지는 많아요. 상황을 지켜보다가 출성해도 되니까요. 그런데 르네. 왜 그러죠? 낯빛도 어둡고 식은땀이 그렇게……"

"끄윽… 죄, 죄송합……"

르네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피부 위로 검은 무늬 같은 것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입을 닫았지만 이빨 사이로 참을 수 없는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어머, 이런. 한동안 괜찮다 싶었는데 또 도진 건가요? 그 병."

"……죄송합니다. 곧 있으면 나아질 것… 크윽!"

"언더하임에 들어온 뒤로 벌써 세 번째로군요. 흐음……"

르네가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라앉히자 조금씩 검은 무늬가 사라져갔다.

"돌아가세요. 르네. 전쟁 전에 조금 휴식을 취해야겠네요."

"……감사합니다. 폐하."

그녀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

로드가 이끄는 어비스의 본군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하루 후, 즉 언더하임 공성이 끝나고 이틀이 지난 뒤였다.

기나긴 행군을 마치고 복귀한 어비스군의 병력들이 요새 앞에 멈추어 섰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언더하임."

드레이크를 타고 앞으로 나온 로드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요새에는 알브헤임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영지의 새로운 주인이 된 알브헤임 측의 병사들이 성벽 위에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그들의 활은 언제든 침입자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정면을 향해있었다.

'……흐흐, 열이 뻗치는 걸.'

역시 고향이 적에게 함락당한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나란히 옆에 말을 몰고 있는 베아트리체는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적이 장악한 언더하임의 모습이 꽤 충격인 듯 했다. 로드가 팔을 쭉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베아."

"……주인님."

"내가 반드시 돌려받을게."

그녀가 신뢰감 어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했다. 로드는 시선을 돌려 성벽 위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가장 중앙에 병사들에게 둘러싸여있는 백금발의 엘프, 플로라의 모습이 보였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득의 양양한 표정이 상상이 되는 듯 했다.

'기분 좋겠지. 자신의 활약 덕에 서로의 득실을 비슷하게 맞추었으니까.'

로드의 시선이 성벽에서 조금 더 올라갔다.

황혼으로 물든 언더하임의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 하늘에, 권능으로 구성된 하얀 나비의 문양이 구름처럼 나타나 있었다. 나비의 크기는 언더하임의 하늘을 전부 다 뒤덮을 정도로 거대했다.

장관이었다. 어비스의 플레이어인 로드의 눈에만 보이는 광경.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지 못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로드는 뭉친 양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고, 목을 좌우로 당기며 긴장된 근육을 풀었다. 그리고 팔을 쭉 뻗었다.

'잘 보고 있어라, 플로라.'

앞으로 나아가던 로드의 손가락이 허공에 맞닿았다.

하얀 나비의 문양이 날개를 크게 펼치는 형상으로 바뀌며, 생동감 넘치는 푸른 빛으로 색채감이 드러났다.

'지금부터 어비스의 싸움을 보여주마.'

========== 작품 후기 ==========

Speedwagon / 아, 아하... 제가 오해했습니다

Dick In a Box / 히익! 내 허리춤의 박스를 열어보렴!

llSongOfBladell / 좋은 지적입니다만... 사실상 로드는 베아트리체를 주력 선봉장으로 사용하고 있죠. 만약 전면에 나설 영웅들이 빵빵하다면야 베아트리체는 암살자 포지션을 맡아 숨어서 적을 암살할 기회를 노리는게 맞지만, 현 로드의 영웅진엔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그녀가 암살자로서 후방에서 움직이면 그 시간동안 가장 강력한 전력을 낭비하는 꼴이니까요.

ads123 / 아뇨, 보복의 상태를 뭐라하는게 아니라 그냥 잔혹하다구요 ㅋㅋ 드립입니다.

Xedrions / 받아아라라라라 추천은 준비해 왔겠지??

알테니아 / 후후후. 정체성의 혼란이 오셨군요. 도덕적 잣대를 잠시만 옆으로 비켜두면 신세계가 보일... 아닙니다

빛과하늘 / 히익; 근거없는 오해입니다! 떡 1호는 나중에 등장할듯하네용

ppk12 / ㄹㄹㄹㄹㄹㄹㄹ!

...(-1)... / 로리만 아끼지 않아요 ㅠㅠ 다른 캐릭터들도 좋아한다구욧!

@火炎無 / ;ㅅ; 아니에요..

@로리콤MK / 납치하는건 좋은데 왜 옆에 '쿵떡떡'이 들어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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