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멸전 -->
알브헤임-백제 연합군은 어떻게든 힘으로 밀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이 와중에 꼬리에 들러붙은 기마병의 공격으로 상당수의 병력을 잃었다.
하지만 기마병보다 더 까다로운 것은 혁명군이었다. 아무리 봐도 갑옷도 없는 일반 주민들이었지만, 이들 모두가 병사들 못지않은 전력을 뽐내고 있었다. 연합군 병사들은 하나같은 혀를 내둘렀다. 이 나라의 인간들은 전원이 무인이라도 된단 말인가?
"죽여라!"
"어딜 도망가느냐!"
"동료의 복수!"
혁명군은 부족한 훈련량과 장비를 기세와 의지로 때우고 있었다. 옆 사람이 칼에 맞아 쓰러지면 겁먹고 물러나야 할 민간인들이 오히려 눈이 뒤집어지고, 괴성을 내지르며, 분노에 몸을 맡긴 채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은 야차를 연상케 했다. 언더하임은 광기의 각축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아재들한테 밀릴 수는 없지!"
"가자!"
혁명군의 분전은 일반 병사들에게까지 자극을 주었다. 기세에 밀린 연합군 병사들은 이제 반격보다는 퇴각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 적을 찔러 죽일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뒤로 빠지고 싶어 했다. 기세가 꺾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알브헤임의 영웅들이 길을 뚫고 있는 최전방은 상황이 나았다. 그들은 기어이 북문까지 도달해 성문을 열어젖혔지만, 그곳에는 피닉스가 이끄는 어비스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흐흐흐, 오래 기다렸다!"
연합군 병사들의 절망 어린 표정을 감상하며 피닉스와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안에는 좀비처럼 달려드는 혁명군이, 밖에는 훈련된 정규군이 틀어막았다. 포위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린과 르네 자매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건가요!"
플로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병사들 사이에 파묻혀 있다시피 한 그녀는 답답함과 짜증이 폭발해 있었다.
"폐하!"
마침 부관이 다가와 보고했다.
"린 장군만 정신을 잃은 채로 복귀했고, 르네 장군은 소식이 없습니다!"
'……서, 설마 당한건가요? 그 두 사람이?'
플로라는 현기증이 일었다. 전황은 가히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잘못됐을까? 적의 동맹 중 한 축인 백제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으며, 수도인 언더하임까지 함락했다. 거기에 혁명군도 제대로 대비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대처는 거의 완벽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 대비책에 구멍을 뚫어낸 건 역시.
'……티아 그란디네.'
플로라의 시선이 움직였다. 엘프로서의 그녀의 눈은 멀리 떨어진 티아의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지붕위로 올라가 병사들을 지휘하는 중이었다.
플로라가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전부 그녀 때문이었다. 플레이어도 아닌 주제에 자신을 농락하다니! 이 빚은 몇 배로 되돌려줄 것이라 다짐했다. 그때 티아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능을 펼칠 터이니 본녀를 지키거라."
"예! 군사!"
주거지에서 내려온 티아가 최전방 가까이로 걸어갔다. 혁명군들의 전투가 바로 보이는 지점이었다.
‘이쯤이면 되겠지.’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그녀의 전면을 가로막았다. 안전이 확보되자, 티아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땅에 손바닥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 의지의 영역.
우우우우우웅!
그녀의 손바닥으로부터 시작된 찬란한 황금빛 원이 주위로 넓게 퍼져나갔다. 그 범위는 아군과 적군 진형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영역은 지금부터 본녀의 것."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본녀가 이 땅에 심는 것은 ‘광기’, 영역의 땅을 밟는 모든 만물이여, 규칙에 따르라."
화아아악! 티아의 손바닥에서 황금빛 마력이 터져 나왔다.
1인 한정으로 때와 상황에 관계없이 엄청난 감정의 파도를 불러일으키는 로드의 고유능력과는 달리, 티아의 힘은 영토를 밟은 모든 생명체에 그러한 감정과 상태를 느끼도록 부추기는 힘이었다.
그리고 이때 티아가 설정한 키워드는 ‘광기’. 이 효과는 영토 위에 있다면 적아를 구분하지 않지만, 감정을 받아들이는 양측 진형의 상황은 달랐다. 이미 〈혁명의 바람〉효과로 광분 상태에 돌입한 어비스의 혁명군에게는 ‘광기’가 더해져 더욱 강력한 공세를 취하도록 한다. 반대로 적들에게 둘러싸여 일방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연합군에게 ‘광기’는 다른 의미였다. 사기와 자신감이 극도로 떨어져 있고, 시도 때도 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 광기는 분투로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병사들에게 패닉상태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진형이 붕괴되며, 고통의 아우성이 울려 퍼졌다. 효과는 느리지만 서서히, 그리고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었다.
‘역시 티아야.’
로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티아의 고유 능력은 어비스 진형 전체에서도 단연 최고의 권능이었다.
‘그럼 마지막.’
로드가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웃차!"
"움직여! 움직여!"
좁은 호리병의 목이라고 할 수 있는 북문의 통로를 앞에 두고 연합군의 병력들이 잔뜩 몰려있는 있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이 틈을 타서 성벽위로 걸어오고 있는 한 무리의 부대가 있었다.
그들은 알란드의 주력 특화병종인 ‘캐논슈터’ 부대였다. 그들을 호위하기 위한 붉은 망치단도 있었다.
"자, 대열을 맞추어라!"
붉은 망치단이 성벽 앞에 서서 방패를 세우는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리그 그들의 뒤로 캐논슈터들이 포신을 성벽 아래로 겨누었다.
"크으으! 아주 예쁘게 모여있구만!"
한 드워프가 신이 나서 중얼거렸다.
캐논슈터들의 화력은 우수하나, 언제나 짧은 사거리가 단점이었다. 하지만 성벽 위에서 직사로 쏘는 것에 사거리는 상관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완벽한 그림이었다.
뒤늦게 자신들의 머리 위를 겨누는 포신을 발견한 연합군 측의 화살들이 날아왔지만 붉은 망치단의 방패를 뚫지 못했다. 게다가 화살이 날아오는 빈도도 적었다. 수성 준비를 하던 궁병들이 성벽을 내려와 급하게 기동하는 바람에 화살을 넉넉하게 챙길 여유가 없었고, 적의 포위를 뚫느라 화살을 남발했기에 거의 다 소진된 상태였다. 로드는 일부러 캐논슈터들을 한발 늦게 보낸 것이다.
"자! 과학, 그리고 드워프들의 힘을 보여주자!"
"쏴라!"
펑! 퍼버벙!
포신이 일제히 불꽃을 뿜었다. 새까만 포탄들이 잔뜩 밀집한 알브헤임 병사들의 위로 떨어졌다. 방패병은 전부 기병을 막느라 최후방에 있었다. 저항할 수단은 없었다.
콰쾅! 콰쾅! 콰콰콰콰콰쾅!
밀집 진형에 떨어지는 포탄은 재앙 그 자체였다. 이미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라 진형을 넓게 펼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드워프들이 재장전을 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캬! 좋다!"
"실버스타델에서 당한 게 절로 힐링 되는 걸?"
"전 언더하임에는 처음 와보는데, 잊지 못할 추억을 안고 가는군요!"
"쏴! 쏴! 전탄을 퍼부어줘라!"
연합군의 진형에서 검은 연기가 끊임없이 올라왔다.
뒤에는 혁명군과 성벽, 정면에는 정규군. 위에서는 포격, 땅에서는 ‘광기’의 감정.
단어 그대로의 섬멸전이었다.
*
시간이 흘러, 알브헤임-백제 연합군은 기어이 북문의 포위망을 뚫고 언더하임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로 인해 지불한 대가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수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었다.
어비스군은 그동안의 강행군으로 쌓인 피로와, 영내를 멀리 벗어나면 전력이 떨어지는 혁명군의 특성상 추격은 따로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알브헤임군 오천 중 삼천 전사, 오백 항복, 천오백 귀환.
백제군 이천 중 일천 전사, 오백 항복, 오백 귀환.
영웅 '르네' 생포.
말이 필요 없는 대승이었다.
"와아아아아아!"
"또 해냈다!"
"어비스 만세!"
"국왕 폐하 만세!"
언더하임 곳곳에서 축포가 쏘아 올려졌다.
승전과 귀환을 환호하는 국민들 사이로, 로드와 그의 가신들이 왕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열기는 어느 때보다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특히 혁명군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번 전투에서 발휘한 자신의 놀라운 힘에 대해 무용담들을 줄줄 늘어놓았다.
"나 자신이 미친 줄 알았다니깐! 무기가 부러졌지만 맨손으로 엘프 두 명을 한꺼번에 팍!"
'……댁들 힘이 좋은 것 이전에 권능에 의한 보정 효과지만요.'
지나가면서 그 이야기를 들은 로드가 속으로 피식했다.
"어서 오세요, 폐하."
마중 나온 이브가 공손히 인사했다.
"아, 이브! 보급 업무 고생 많았어. 특히 언더하임으로 내려오는 중에 네가 드러그팜에서 보내도록 한 보급품은 정말 절묘했다니깐!"
"고생은 폐하나 다른 분들이 더 많이 하셨죠. 내정담당이 할 수 있는 일이래야 이정도 뿐인걸요. 자, 어서 들어가요."
"응."
이브는 베아트리체와 피닉스와도 정답게 인사를 나눈 후 함께 왕궁 정원으로 들어갔다. 카펫은 왕궁 건물 안까지 쭉 깔려있었다.
"정말로 우리가 이긴 거죠?"
나란히 걸어가던 이브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로드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당연하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 아뇨. 뭐랄까 실감이 안 난다고 할까요? 마틴이 있을 때만 해도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든 나라였는데…… 어느새 다른 나라와 맞붙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점이 조금은 새롭게 느껴져서요."
"후후, 밀리지 않은 정도가 아니지."
로드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정정했다.
"카사르를 제외하면 우리와 붙었던 3개국 모두 박살났으니까."
"그러네요."
"앞으로는 익숙해질 거야. 어비스는 계속 강해질 테니까."
왕궁에 도착하니, 건물 앞에서 가신들과 왕실 식구들이 마중 나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로드는 그들 하나하나와 악수를 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내 사람들을 보니 이제야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여러 사람들을 거쳐, 줄의 가장 마지막에 서있는 유니벨과도 대면했다.
"와, 왔냐? 팬더."
그녀는 얼굴에 홍조를 띤 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로드도 무안한 듯 웃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발길질부터 해대던 애가 왜 또 어색하게 이럴까?
"어라?"
로드가 한 발짝 물러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니벨 너……."
"으, 응?"
"못 본 사이에 키 좀 컸다?"
"무, 무슨 헛소리야! 한 달도 안됐는데 컸을리가!"
"너 원래는 베아랑 비슷했었잖아."
로드가 빵조각을 물고 있는 베아트리체를 데려다가 옆에 세워보았다. 과연, 베아트리체보다 키가 조금 더 컸다.
"음, 그러네?"
유니벨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던 눈치였다. 로드가 덧붙여 말했다.
"어떤 곳은 전혀 성장하지 못했지만."
"재회 기념으로 허리 반대로 돌아가기 싫으면 입 다물어라?"
"…하하."
로드는 뒤늦게 그녀의 차림이 눈에 띄었다. 본인 머리색과 같은 빨간 로브를 걸친 모습이었다. 갑자기 웬 로브? 로드가 그런 의문을 가지며 그녀의 로브자락을 붙잡아 살짝 젖혀보았다.
‘…역시나.’
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전투복에 구멍이 숭숭 뚫려 살색이 다 비치고 있었다.
"무슨 짓이야!"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몸을 감쌌다. 로드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좀 조신하게 싸울 수는 없나?"
"흥, 싸움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고 봐야지."
"그렇긴 하네."
그녀가 입을 다물어 버리는 바람에 다시 대화가 끊겼다. 그녀는 말없이 바닥을 보고 있다가 천처히 운을땠다.
"야, 팬더. 너 말이야……."
"주고오오옹!"
와락! 왕궁으로 따라 들어온 티아가 예고 없이 달려들어 로드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현장에 남아 병사들을 해산시켰고, 이제 막 복귀한 듯 했다.
몸에 닿는 몰캉한 느낌에 놀라는 것도 잠시, 로드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정말 대단했어요, 티아."
"…주공, 본녀는 힘들었다. 열심히 했다."
"네에, 네에."
훈훈한 장면이었으나, 갑자기 옆구리 쪽에서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로드가 '아얏!' 소리를 내며 바라보니 그의 옆구리를 한 번 세게 꼬집은 유니벨이 콧방귀를 뀌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무, 물론 유니벨도 고생 많았어."
"……."
"너 탈진해서 쓰러졌었다며? 몸은 괜찮아?"
"……."
그녀는 대답 없이 팔짱을 낀 채 있더니 이내 쌩하니 등을 보이며 왕궁으로 들어가 버렸다.
"……갑자기 왜 저래?"
로드가 티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자 이브가 훗 하고 웃으며 말했다.
"유니벨도 숙녀가 다 됐네요. 자, 자, 밖에만 있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그래. 이제 제발 좀 쉬어보자."
야영은 정말로 지긋지긋했다. 로드는 품에 엉겨 붙은 티아를 데리고 왕궁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전쟁은 끝난 게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늘어지게 쉴 생각이었다.
========== 작품 후기 ==========
복지국가 / 짤막한 1등 인증 코멘 ㅋㅋ
벌레 / 경찰 아조씨! 요기에요!
dsklfjkjfkls / 위에 루템님이 잘 설명해주셨네용. 완전 면역은 아니라고 본문에 있어요 ㅎㅎ;
알테니아 / 산을 바라보니 단풍이 어여쁘군요. 아, 이 계절이 아닌가?
Xedrions / 빼박 철컹각
슈톨라 / 완전 면역은 아니죠. 유니벨도 피해를 입습니다. 데미지가 경감될뿐!
로리콤MK / 화가 거듭될 수록 경찰 아저씨가 바빠지시겠군요 ㅠㅠ
ZzeRoN / 는 베아와 유니벨에게 정리 됐습니다 ㅠㅠ
니알라토텝 / (납득)
火炎無 / 건전 작가라 불러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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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잠시만요! 조교가 그 조교가 아닐텐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ㅇㅈㅂㅇㅂ / 건전지 보다 더 건전한 건전작가입니다. (엄근진)
@로아리아 / 타락당하는 엘프 여인. jpg
@Speedwagon / 누구죠 저 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