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메라 -->
“으휴, 아침부터 나르시시즘 엘프의 헛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기분 쭉 빠진다.”
유니벨이 소파에 걸터앉아 베아트리체 전용 바구니에 담긴 과자를 힘주어 와그작와그작 씹었다.
“유감이로군.”
옷장에서 사뿐히 내려온 티아가 금빛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본녀는 대화할 때 섬세함이 다소 부족하여 타인의 자격지심까지는 고려하지 못하노라.”
와작! 과자를 씹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유니벨이 발끈한 표정으로 눈을 치켜떴다.
“지금 뭐라고? 나이만 더럽게 많은 엘프 할멈주제에!”
“어, 어째서 거기서 나이가 나오느냐!”
어린애를 상대하듯 여유롭던 티아였으나, 유니벨의 그 한마디에 일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유니벨은 대답대신 혀를 삐쭉 내밀었다.
“그러는 넌 전쟁도 끝났는데 왜 자꾸 날 장군이라고 부르는 건데?”
“아직 게노세르크가 남아있고 전시 상황은 풀리지 않았노라. 즉 장군은 여전히 본녀의 휘하이니라.”
“흥이네요! 짬밥도 없는 낙하산 주제에 휘하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너 어비스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냐? 앙?”
“짬밥이라, 먼저 주공에게 합류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타인을 본인의 아래에 두려고 하는 초라한 심리로군.”
“뭐, 뭐라고오? 먼저 아래에 둔 게 누군데!”
두 사람이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 원래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습니까?”
로드가 눈을 깜빡거리며 묻자 그녀들이 홱 돌아보았다.
“자꾸 사람 신체적 특징가지고 싸가지 없게 말하잖아!”
“하지 말라고 해도 자꾸만 나이를 들먹이지 않는가!”
“…….”
로드가 무안한 미소를 지었다. 군사와 장군 사이라서 그런지, 이 둘은 친해지기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어휴, 또 싸우는 거예요?”
마침 로드의 구세주인 이브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돌아갔다.
“이브으!”
유니벨이 먼저 달려와 이브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내 말 좀 들어봐! 글쎄, 저 거유 엘프가 나한테 뭐라고 했냐면……!”
“그 전에.”
이브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시킨 일은 다 했나요? 유니벨.”
“어, 으응?”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로키 상회의 목재 매입 건이요.”
“아, 안 그래도 팬더 집무실에 들렸다가… 이제 막 올라가서 처리하려고…….”
“오늘 오전까지는 결재를 받아야 해요. 서둘러 주시겠어요?”
“무, 물론이지!”
유니벨이 도망치듯 집무실에서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본 티아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앉았다.
“음, 재정관으로서의 업무를 망각한 것인가. 그녀의 능력이 우수한 건 사실이나 연륜이 다소 부족하여 중책은 힘들…….”
“군사님?”
그녀가 유니벨에게 지어보였던 미소를 그대로 재현하며 말했다.
“의무 물자 보급책 3항.”
그 말을 듣는 순간 우아하게 앉아있던 티아가 등을 꼿꼿이 폈다. 어느새 이마에는 땀이 맺히고 있었다.
“……으, 으음. 군무 담당자는 각 영지에 의무 보급품을 필수적으로 비치해야 하며, 그 수량과 사용기간의 경우에는… 음…….”
“어머, 아.직.도 못 외우셨나보네요.”
그녀의 생긋 웃는 얼굴에서 눈썹이 가운데로 모아졌다.
“혹시 제 말이 우습게 들리시는 걸까요?”
사색이 된 티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 미안하다! 총무! 다시 외워오겠다아!”
티아 또한 도망치듯 방에서 나갔다. 떠들썩했던 집무실이 이내 조용해졌다. 이브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서류를 꺼내고 허공에 지휘관 창을 띄웠다.
“이걸로 됐죠? 폐하.”
“……대단해. 그냥 네가 왕 해라.”
“후훗, 반역죄는 싫어요.”
로드는 피식 웃으며 눈치 보지 않고 지휘관 창을 열었다.
“아란은?”
“이제 막 출발했어요.”
“그 녀석이 고생 많네.”
로드는 다음 전장으로 아로게쓰 출신들이 대거 살고 있는 거점영지, 플랫랜치를 생각해 두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연이은 전쟁의 여파로 언더하임의 요새의 상태가 무척 나빠졌기 때문인데, 사실상 수성 자체가 불가능 할 정도로 심각했다. 그나마 플랫랜치는 성벽도 높고 요새의 상태도 괜찮았다.
말렉이 본토로 내려갔다지만 혹여나 게노세르크군이 올 것을 대비하여, 로드는 이번 전투에서 체력을 안배했던 아란에게 2000명의 병력을 주어 플랫랜치에서 대비하도록 했다. 아란 또한 아로게쓰 출신이라 흔쾌히 그 명을 받아들였다. 나머지 병력들은 언더하임에서 재정비를 하면서 말렉의 움직임에 맞추어 내려갈 계획이었다.
‘전반전은 판정승으로 끝냈지만, 이 다음이 무엇보다 중요해.’
지휘관 창의 지도를 보는 로드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아직 가장 강력한 적인 게노세르크가 남아있었다.
분명 힘든 싸움이 되겠지만, 만약 이 전쟁에서 이길 경우에는 본래의 보상에 더해 추가적인 보너스가 들어온다. 바로 알브헤임의 거점영지 두 곳이다.
플로라가 죽은 뒤 엘프들은 위그드라실에 숨어 지내고 있었다. 플레이어를 잃어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는 토착세력이었지만, 로드를 포함하여 알브헤임 영토에 인접한 콜린, 말렉도 공략을 서두르지 않았다. 큰 전쟁을 앞두고 괜히 병력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동맹전쟁의 승자가 알브헤임의 영토까지 가져가게 될 것이다.
‘후으으, 어쨌거나 당분간은 좀 쉬었으면 좋겠다.’
로드가 지휘관 창을 종료하며 기지개를 켰다.
“폐하. 오늘 저녁에 승전 기념 축하 파티가 있다는데 가실 거죠?”
“가야지.”
로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날에 내가 안마시면 누가 마시겠어?”
* *
게노세르크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어느 날 아침, 로드에게는 무척 설레는 아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토록 기다리고 있던 알림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키메라 연구〉가 완료되었습니다.
드디어 새로운 특화병종 연구가 완료된 것이다. 조금 더 서두른다면 게노세르크와의 전쟁에서 이 신병기를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무실에 출근하여 이브와 인사를 주고받은 로드는 지휘관 창으로 각국의 상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복도에서 연신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컥.
“폐에?하아아아!”
하버트가 감격의 눈물을 흩뿌리며 들이닥쳤다. 이브가 눈살을 찌푸리며 조용히 해달라는 제스쳐를 취했지만 하버트는 격한 감정에 빠져 모르고 있었다.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하버트.”
“폐하! 드디어, 드디어 제가 해냈습니다! 실로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키메라 연구?”
로드의 툭 내뱉는 말에 하버트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우뚝 멈췄다.
“……폐, 폐하께서 그걸 어떻게? ……분명 연구소 대외비였을 텐데!”
“그냥 감으로.”
“크흡! 폐하, 당신이라는 사람은 대체……!”
부담스러운 존경의 눈빛이 꽂혔다.
“……오버하지 말고 보고나 해.”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가서 보시죠!”
하버트는 끝끝내 로드와 이브를 자신의 연구소로 데려왔다. 세 사람은 상업지구를 거쳐 어두컴컴한 지하 계단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요, 하버트 소장. 폐하께서 명하신 작물 연구는 어쩌고 뜬금없이 생체 병기 개발인가요?”
이브의 물음에 하버트가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저희 연구소는 다양한 연구를 동시 병행해서 진행하고 있지요! 물론 작물 연구도 진행 중입니다만, 갑자기 여러 행운이 겹쳐서 이쪽 연구 개발이 확 앞당겨져서 말이지요!”
로드는 속으로 웃었다. 하버트가 말하는 것은 ‘지휘관 창 연구’의 효과 덕분이었다.
지휘관 창으로 수행하는 연구와 나라의 기술자들이 수행하는 연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예를 들어 지금의 경우처럼 로드가 지휘관 창으로 ‘키메라 연구’를 완료할 경우, 현재 나라에서 개발 중이었던 기술이 권능 보정의 효과로 빠르게 완성된다. 반대로 기술자들이 새로운 작물 품종 개량에 성공한다고 하면, 지휘관 창 연구 목록에 있던 ‘농업 수확량 증진 연구’가 완료 상태로 바뀌는 식이다.
“그런데 키메라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요?”
이브가 물었다.
“저희 신체 개조팀이 개발한 새로운 생체 병기입니다!”
“생체 병기……?”
이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혹시 사자의 얼굴에 말의 몸통이 달리고 독수리의 날개가 붙는 그런 거 말인가요?
“오호홋! 그런 것들은 연금술의 영역! 저희 과학자들은 그런 저급한 건 취급하지 않습니다! 신체개조라는 건 훨씬 더 엘레강스한 학문이죠.”
로드와 이브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불안해지는데.”
“저도 그래요. 소장이 엘레강스라는 표현을 쓰다니…….”
두 상관이 영 못미덥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하버트는 자신만 믿으라며 큰소리를 뻥뻥 쳤다.
“그럼 가는 길에 설명이나 해주실래요? 키메라를 어떻게 만들었다는 건지.”
“그러죠.”
하버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테라광산 지하에 있는 ‘던전’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음, 그냥 모험가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곳? 그리고 밤이 되면 던전의 몬스터가 광산으로 나와서 광부일을 중단해야한다는 것 정도?”
“오호홋! 상식 수준의 지식이군요. 사실 언더하임의 지하 던전은 대륙 최고의 미스터리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드는 하버트의 설명을 들었다.
언더하임의 지하던전.
인간의 발걸음이 닿는 곳은 지하 1층뿐, 지하 2층부터는 몬스터들이 너무 강력하여 아예 출입자체가 통제되어 있는 미지의 공간이다. 한때 어비스 왕실에서 군대를 동원해 던전 공략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어마어마한 피해만 입은 채 실패로 끝났다. 그 이후로는 완전한 난공불락의 장소로 알려져 있었다. 이 던전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얼마나 깊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이곳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는 대륙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몬스터들이었다. 하나같이 머리 부근에 뿔이 달렸으며 박쥐 날개 같은 것이 등 뒤에 돋아나있는, 마치 ‘마족’을 연상케 하는 외형의 괴물들.
언더하임의 모험가들은 던전 1층에서 몬스터를 쓰러트리고 얻은 부산물들을 암시장에 내다 파는데, 이것들은 에덴 대륙 전역에서도 볼 수 없는 기형적인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이쪽 세계의 물건이 아닌 것 같은, 완전히 이형의 물건이라고 학자들은 입을 모았다.
“어째서 그런 신비한 몬스터들이 언더하임의 지하에서 나타나고, 또 던전을 지키고 있는가는 아무도 밝혀내지 못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라면 그 이형의 몬스터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죠! 키메라 연구도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된 겁니다!”
========== 작품 후기 ==========
프리워커 / 기어여!
Leessa / 감사합니다 ^^
Speedwagon / 후후...! 역시 위대하군요
알테니아 / 엉엉 ㅠㅠ 이분 일편단심 비월... 힘든 팬심을 타셨어.
retty / 페어리 종특은 귀여움!
llSongOfBladell / 엘프 페어리적 생각 못하다!
EXYE / ...?!
그랑엘베르 / 그렇게 되면 후반에 10개, 20개 되는 멸망보너스 보유국가가 나와서 나라의 컨셉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멸망한 나라의 멸망보너스 + 그 나라가 무너뜨린 나라만큼의 플러스 알파 정도의 효과만 받습니다.
Mr윤 / ㅋㅋㅋㅋ 다행이네요. 연참은 제 글 속도가 너무 느려서 아직 계획이 없지만 ㅠㅠ 최선을 다해 써보겠습니다.
빛과하늘 / 아 ㅎㅎ; 그렇군요. 그때 제가 밖이라서 예약 등록해서 그런가 봅니다 ㅎㅎ;
---
@로리콤MK / 역시! 로리콤님의 안목은...!
@SW스윈 / 오래간만이네요! 제목이랑 표지는 플랫폼 업뎃과 같이할지 노블레스만 빠르게 바꿀지 고민중이에요 ㅠㅠ 표지는 거의 완성됐네요. 그리고 로리오브로리는 참아줘�Dㅋㅋㅋ 정성가득 코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