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메라 -->
하버트가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지다가 유리병에 담긴 약품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자, 봐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저의 과학자 커리어 최대의 역작! 바로 키메라를 만들어내는 시약입니다!”
“……!”
그 시약은 서로 섞이지 않는 검정색과 흰색의 액체가 찰랑거리는 모습이었다.
“던전 몬스터의 피를 정제하여 만든 성분이 주원료이구요. 거기에 ‘테라’보다 더욱 희귀한! 언더하임 던전에서만 발견되는 광석인 ‘아이트라’의 성분에 더해 성장 촉진제를 섞어 만들었습니다.”
“……그걸 생명체의 몸에다 주입한다는 거야?”
“네, 바로 그겁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실험실에 도착했다.
내부로 들어가자, 실험액체관 안에 들어있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복도를 따라 쭉 진열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듣도 보도 못한 괴이한 형상의 몬스터들 때문인지 어쩐지 으스스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들은 하버트를 따라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동물이나 몬스터를 써서 하는 실험은 벌써 실패했습니다.”
“…음?”
로드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설마 동물이나 몬스터는 실패했으니, 바로 인간에다가 투입했단 소린 아니겠지?”
“역시나 폐하! 바로 그겁니다!”
하버트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호홋, 너무 그런 표정으로 보시면 곤란합니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이 ‘키메라 시약’은 완벽합니다. 그저 약품과 맞는 생명체와, 맞지 않는 생명체가 있을 뿐이죠. 그리고 연구 결과, 이 시약에 가장 안정도 반응이 높은 생명체는 다름 아닌 인간이었습니다!”
하버트가 심취한 표정으로 양 팔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무려 50%의 반응입니다! 동물은 10%, 몬스터는 20%를 넘지 못했어요! 하지만 인간은 그 두 배 이상 우수하죠! 저희 연구소는 병에 걸린 환자들이나 포로들 중에서 석방과 자금을 조건으로 실험 대상자를 구했습니다. 시술은 끝났고, 이제 그들을 액체관에서 꺼내기만 하면 됩니다.”
“……아직 완성된 게 아냐?”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죠! 그 위대한 장면을 보여드리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두 분을 모셔 온 것 아니겠습니까?”
키메라가 준비된 실험액체관은 복도의 가장 끝에 위치해 있었다. 하버트의 센스인 듯, 와인색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역사의 현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가 신사처럼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보인 후, 커튼의 한 자락을 쥐었다.
“자, 그럼 공개합니다! 어비스의 새로운 전쟁 병종! 키메라입니다!”
펄럭! 커튼이 벗겨지며 액체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로드가 작게 감탄성을 흘린 후, 하버트 쪽을 흘긋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으잉?”
그 말 대로였다. 세 개 액체관 모두 텅 비어 있었다. 당황한 하버트가 지나가던 연구원에게 물었다.
“이, 이보게! 여기 있던 키메라 시술자들은?”
연구원이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아, 실패해서 전부 치웠습니다. 시약을 주입한 후에 생체 반응에 문제가 생겨서요. 아무래도 50%로도 충분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 그럴 수가!”
하버트가 얼굴을 쥐어뜯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과학이! 나의 위대한 성과가!”
“…하버트 소장.”
이브가 특유의 ‘화가 난 웃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잠시 저 좀 볼까요?”
“크, 크흑!”
이브가 하버트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있는 도중, 로드는 생각에 잠겼다. 하버트가 개발한 저 시약은 분명 제대로 된 ‘완성품’일 것이다. 지휘관 창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그런데도 실패했다.
하버트의 시약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뭔가 실패한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버트. 그 안정도 반응인가 뭔가 하는 거, 50%로도 부족하다는 거지?”
“……그,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신체가 약품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군요.”
하버트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흐음.”
나름대로 상황을 짜 맞추어 보려고 했지만, 아직은 단서가 부족했다. 로드가 입을 열었다.
“뭐든 좋으니까 던전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없어? 소문 같은 거라도 괜찮아.”
“아, 지하 던전의 전설에 대해서라면 어릴 때 들은 적이 있어요.”
“이브님! 위대한 과학을 논하는 이 자리에서 전설이라니! 이 무슨…….”
이브가 돌아보자 하버트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오, 전설이라고?”
반면 게임폐인 출신인 로드는 호기심이 동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퀘스트 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이야기 해줄래? 혹시 힌트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 음… 잠시만요. 저도 어릴 때 어른들께 들은 거라 조금만 기억을 더듬어 볼게요.”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득히 까마득한 시절.
‘악마’가 있었다.
악마는 천상전쟁에서 패배하여 지상으로 추락했고, 신들의 눈을 피해 지하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악마의 마력은 지상의 공기와 결합하여 ‘테라’가 되어 동굴에 맺혔다. 악마가 숨은 곳은 던전이 되었으며, 악마의 피가 흐른 곳에서는 몬스터가 나타났다.
“그 악마가 숨은 곳이 바로 지금의 테라 광산이라는 거예요.”
이브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의 이름은 사마엘, 권능은 타락, 지금도 사마엘은 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던전에서 잠이 든 채 힘을 비축하는 중이라 전해지고 있죠.”
“……악마라.”
“사실 던전에서 나오는 이형의 몬스터도 미스터리지만, 테라광산 전체가 의문투성이에요. 그 거대한 규모의 지하 광산은 현재의 기술력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으니까요.”
“확실히…….”
테라광산은 티아의 군대가 통째로 들어가 숨을 수 있을 만큼 드넓고 깊었다. 어비스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00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만한 광산을 만들어 낼만한 채굴 기술은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서 알려진 것은 그저 ‘강대국들이 버려둔 쓸모없는 황무지에 갈 곳 없는 사람이 모여들었는데, 신들의 선물처럼 테라가 나오는 광산이 발견되었다.’ 정도였다.
“오호홋!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하버트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 악마라는 존재가 산맥에 내려와서 테라광산이 만들어졌다는 겁니까? 몬스터도 그 악마의 부산물일 뿐이구요? 그런 허무맹랑하고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이야기는 논의할 가치도 없지요!”
“…전설은 전설일 뿐이지만, 여기서 과학이 잘난 척 할 입장은 아니지 않을까요?”
이브가 가뿐하게 받아쳤다.
“과학도 테라 광산과 몬스터에 대해 밝혀낸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저 ‘이형의 존재’, ‘이형의 물건’이라고만 이름붙일 뿐이죠.”
“크, 크윽.”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로드가 이브를 보며 물었다.
“그 사마엘이라는 악마는 어떻게 생겼어?”
“글쎄요, 사람들의 상상력이 거기서 거기인지 그냥 동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악마의 모습이라고 들었어요. 뿔이 달려있고, 날개가 있고, 아름다운 외모로 다른 남신들을 홀려서 타락시켰다고 해요.”
로드가 멈칫했다.
“…설마 여성체야?”
“네.”
조금이나마 감이 왔다. 로드가 고개를 돌려 하버트에게 말했다.
“하버트, 여성 실험자로 시도해 보는 건 어때?”
하버트는 반신반의한 표정이었다.
“흐음, 정말 전설을 믿으시는 건가요? 몬스터들은 수컷이나 암컷이나 안정도에는 큰 차이가 없었는데…….”
“밑져야 본전이잖아. 다른 뾰족한 수 있어?”
“알겠습니다. 하지만 여성 지원자는 찾는 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하며 건너편의 이브를 바라보는 하버트였다.
“어떻습니까? 이브 님! 대륙 최초! 명예 1호 키메라가 되어 보시는 건……!”
“싫어요.”
*
견학을 마치고 연구소에서 나온 로드와 이브는 상업 지구를 거쳐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상업지구 전체가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 있나?”
로드가 외출할 때 마다 사먹는 전갈 꼬치를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저기 사람들이 모여 있네요.”
“가보자.”
두 사람은 구경꾼들이 가득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놔! 놓으란 말야!”
그곳에는 한 무리의 병사들이 있었는데, 선두 병사는 어깨에 여자아이를 짐짝처럼 짊어진 채 걸어가고 있었다. 양 팔이 뒤로 묶인 그녀는 다리를 버둥거리며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놓으라고오!”
퍽! 소녀가 있는 힘껏 병사의 등을 찼다.
“끄악!”
병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그녀 또한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엉덩방아를 찍었지만 아픈 기색도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돌려줘! 제발… 돌려 달라구!”
애처로운 울림이었지만 병사들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잠깐, 왠지 눈에 익은데?’
엉망으로 헝클어진 주홍빛 머리카락 사이로 뾰족한 귀가 보였다. 분명히 엘프였다. 로드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이 쪼끄만 엘프 년이 정말!”
“잡아라!”
병사들이 다시 그녀를 붙잡으러 우르르 달려들었다.
소녀는 양 팔이 묶인 상태에서도 날렵한 움직임을 보였다. 바닥을 대굴대굴 굴러 병사들의 손길에서 벗어나며 발길질로 자빠트렸다. 성인 장정 몇 명이 달려들어도 좀처럼 소녀 하나를 제압하지 못했다.
“돌려달란 말이야아아!”
“잡았다! 요년!”
뒤에서 달려든 병사 하나가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세게 내팽개쳤다. 머리를 땅에 부딪쳐 충격이 큰지 소녀는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이봐, 엘프 꼬마.”
병사 하나가 서슬 퍼런 눈빛을 하며 다가왔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하는 것 같은데, 더 이상 저항하면 그냥 여기서 죽여 버린다?”
“…돌려…줘.”
소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병사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침을 탁 뱉었다.
“내 참을성을 시험하지 마라, 엘프. 너희 자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는지 알아? 임무고 뭐고, 당장이라도 목을 베고 싶은 심정이다.”
“맞아! 맞아!”
“증오스러운 엘프년들!”
병사들이 으스스한 살기를 풍겨댔다.
“이보게들, 아직 위에 보고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때 눈이 쭉 찢어진 병사가 걸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들어올렸다.
“아, 아파아!”
“이대로 몸 성한 채로 그녀를 넘겨줄 텐가? 응? 왕궁에 처분을 맡겼는데 포로 교환 명목으로 풀려나기라도 하면 재미없지. 어떤가? 보고하기 전에 재미 좀 보면서 동료들의 넋을 달래는 것이?”
“으흐흐,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어휴, 변태들아. 저런 꼬맹이를 붙들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렇게 생겨도 엘프니까 우리보다 더 나이는 많다고! 쫄보는 저리가셔!”
병사들이 티격태격하며 그녀의 처분을 놓고 싸웠다. 소녀는 하염없이 돌려달라는 말만 반복해서 하고 있었다.
“그만.”
병사들의 웅성거림이 뚝 멈췄다. 그들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돌아보니 검은 로브차림에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남자가 보였다.
“네놈은 뭔데 우리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민간인은 가던 길 가셔.”
그때 이브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뒤에 섰다. 그녀는 정복 차림 그대로였다.
“와, 왕실 간부?”
“이브님…!”
그녀를 알아본 병사들이 황급히 경례 자세를 취했다. 이브가 한숨을 쉬었다.
“저 말고 이분께나 예를 취하세요.”
========== 작품 후기 ==========
요즘 선작상황이 영 저조해서... ;ㅅ;
분위기 전환삼아 표지를 베아트리체 SD버전으로 바꿔보았습니다!(졸귀!)
물론 공식 플랫폼 연재 표지는 아니에요. 지금도 제작중이긴 합니다만 퀄리티가 좋더라구요! 소설 제목도 슬슬 바꿔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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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콤MK / �P; 1코 드신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랑엘베르 / 엄청나죠. 이번편도 코멘 감사합니다!
Leessa / 이것이야 말로 비선실세...!
234xcvcv / 수정했습니다 ^^ 오타 지적 감사해요
Xedrions / 감사감사!
아프게했어 / 사실은 주입식입니다. 적에게 뿌려서 키메라로 만드는 것이라면... 어비스 답긴 하지만 너무 사기가 아닐까요? ㅎㅎ;
알테니아 / 그녀는 좋은 B급 영웅이었습니다.
Speedwagon / 연금술사...?!
프리워커 / 은근 하워드 좋아시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ㅋㅋㅋ
Mr윤 / 네엥~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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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炎無 / 잠시만요, 자아 해방은 뭐죠?
@빛과하늘 / 빼애애액! 대체 저를 어떻게 보시는 겁니까! 물론 조금 끌리긴 했지만!
@니알라토텝 / 과학력으로 강제 폭주 ㄷㄷㄷ 사실 강제 폭주 스킬은 게노세르크에서 사용할 수 있어요. 어비스의 혁명의 바람처럼요
...(-1)... / 깔끔한 서열정리! 백제 이야기는 또 본편에서 조만간 언급될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