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115화 (115/296)

<-- 키메라 -->

로드가 후드를 걷어 얼굴을 드러내자, 병사들은 마치 저승사자라도 본 것처럼 아연실색했다. 곳곳에서 헛숨 삼키는 소리들이 들렸다.

“폐, 폐하!”

병사들은 없는 군기까지 끌어올려 몸을 쭉 펴며 경례했다.

“이 아이는 내가 맡겠다.”

“예, 옛! 폐하! 얼마든지요!”

“물러가.”

병사들이 도망치듯 자리를 뜬 뒤에 로드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알브헤임의 쌍둥이 엘프 자매중 동생인 린이었다. ‘스파이의 눈’ 덕분에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 당신이……!”

폐하라는 말을 들은 린이 두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괜찮아?”

로드가 다가가서 일으켜주려 했지만 그녀 쪽에서 먼저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왔다. 그리고는 로드의 발 앞에서 이마를 쿵! 쿵! 바닥에 찧기 시작했다.

“왜, 왜 그러는…?”

“돌려줘! 돌려줘! 제발 부탁이니까……!”

그녀가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르네 언니를, 돌려줘어어!”

그리고는 ‘으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로드는 조금 놀랐다. 린은 엘프들 중에서도 극단적인 과격파, 뼛속까지 인간을 배척하고 천대하는 성향의 인물이라고 들었다. 기나긴 세월동안 형성된 이 성향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닐 것임에도, 린은 지금 인간의 밭 밑에서 엎드려 빌고 있었다.

‘……하지만.’

로드가 이브 쪽을 건너보았다. 이브도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뭐든지 할게!”

린이 좋지 않은 낌새를 눈치 챘는지 더욱 절박하게 이마를 박으며 말했다.

”린이 뭐든지 다 할 테니까! 훌쩍! 그러니까 르네 언니만큼은 제발! 흐흑!”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로드가 설명하려 했지만 그 목소리는 통곡 같은 울음소리에 파묻혀버렸다. 로드는 골치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말했다.

“…따라와.”

*

로드가 린을 데리고 온 곳은 다시 하버트의 연구소였다. 갑작스러운 재방문에 하버트 대신 근처에 있던 연구원이 그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끄악!”

“끄으으윽!”

“키륵! 키륵!”

지하 시설 곳곳에서 사람인지 괴물인지 모를 끔찍한 괴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이런 곳에 언니가…….”

뒤따르는 린의 낯빛은 갈수록 어두워져갔다.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던 로드가 긴장을 풀어주려고 입을 열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어? 플로라랑 같이 위그드라실로 돌아가던 길 아니었나?”

“…….”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눈을 뜨니까 르네 언니가 없어서,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응.”

“플로라 언니한테 구하러 가자고 했는데, 플로라 언니는 그만 르네 언니를 잊어버리라고 해서…… 그래서… 도망쳤어.”

“…탈영이냐.”

로드가 당혹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그렇게 무리에서 빠져나와 언더하임까지 와서 ‘언니를 돌려줘!’하며 난동을 피우다 병사들에게 붙잡혔을 것이다. 언니 때문에 탈영까지 하다니, 대단한 자매애였다.

‘……그리고 플로라도 참 성격이 한결 같다니까.’

플로라는 아직 르네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니 포로 교환 옵션도 생각해 볼만 했다. 그런데 동생 앞에서 냉정하게 언니를 포기하란 소리를 내뱉었다. 그녀는 르네를 구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자기는 선광과는 다르다는 거겠지. 내게 약점 잡히는 게 그렇게도 싫었나? 흐흐.’

자업자득이었다. 만약 플로라의 곁에 린이라도 남아있었더라면, 그렇게 허무하게 암살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해두지만, 플로라는 죽었어.”

“…….”

린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마 궁금한 게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내뱉은 말은 의외였다.

“…괜찮아.”

“응?”

그녀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초연한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린은 그냥…… 르네 언니만 있으면 돼. 르네 언니가 린의 전부야.”

‘……음.’

“이쪽입니다.”

연구원이 방 앞에서 멈춰서며 허리를 숙였다.

“준비 됐어?”

로드의 물음에 린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방안에 홀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푸른 액체관, 르네는 그 안에 있었다. 액체는 목 아래까지 들어차 있었고, 가슴 쪽에는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르, 르네 언니이이!”

린이 눈물을 흩뿌리며 달려들었다.

“언니! 언니! 내 말 들려? 르네 언니이!”

린이 액체관을 두들기며 목 놓아 울었다.

“깨지겠다. 조심해.”

시간이 흘러 린의 대성통곡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이브는 자초지종을 설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전투 중에 르네는 검은 마력을 일으키며 폭주했다.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유니벨, 베아트리체를 상대로 맞서 싸우다 결국 큰 부상을 입었다.

여러모로 치료를 해보았으나 상처가 심한지 현 시대의 의학과 치료마법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그래서 마지막 수단으로 하버트의 연구소에 데려왔다. 마력을 액체화한 ‘마력수’를 통해 신체 자연 재생능력을 키워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조차 그녀의 상태를 호전시키지 못했다.

“……그럼 르네 언니는 어떻게 되는 거야?”

린이 눈물 콧물을 줄줄 쏟아내며 물었다.

“르네 언니 죽는 거야?”

“…….”

그녀의 얼굴 표정이 너무나 비참해서, 로드와 이브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알브헤임의 엘프 꼬맹이가 여기 있다는 게 사실이었네.”

새로운 목소리에 세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빨간 머리카락의 소녀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유니벨! 여긴 어떻게…….”

“너어……!”

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언니를……!”

파앗! 린이 말릴 새도 없이 유니벨에게 달려들었다.

“네가 언니를 죽였어어!”

짜악!

달려들던 린이 유니벨의 손바닥에 얻어맞아 나가 떨어졌다.

“어리광 좀 작작 부려, 꼬맹아.”

유니벨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너희 자매가 우리 쪽 사람들을 죽인 건 생각 못해? 애초에 전쟁터에 왔다면 죽이는 만큼 죽을 각오도 했어야지. 그리고, 거기서 폭주한 네 언니를 막지 못했으면 죽는 건 나나 리체였어. 망할 꼬맹아.”

“…….”

린은 얻어맞은 뺨을 부여잡으며 원망어린 눈으로 유니벨을 노려보았다. 유니벨 또한 그녀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잠깐. 잠깐.”

다시금 새로운 목소리가 주위를 환기시켰다. 이번엔 하버트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귀여운 엘프 아가씨.”

“…….”

주저앉은 린이 눈동자만 움직여 하버트를 올려다보았다.

“이 시설의 총책임자로서, 그녀를 살리지 못한 것에 책임을 통감하는 바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언니 분께서는 이틀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 아아….”

린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휘저었다.

“…하버트.”

이브가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하버트는 손을 들어 막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사람이 마냥 죽으란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아직 최후의 수단이 남아있습니다!”

“……최후의, 수단?”

린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하버트와 눈을 맞추었다.

“그것은 바로! 언니분을 키메라로 만드는 겁니다!”

“키메, 뭐?”

“…….”

린을 제외한 모두가 탐탁지 않은 눈으로 하버트를 보았다.

하버트가 그 눈빛을 감지했는지 재빨리 덧붙였다.

“제가 개인적인 이유로 이런 권유를 하는 것 같습니까? 모든 것은 그녀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실험체를 구하기 위함이겠지. 라고 로드는 생각했다.

“잘 들으세요, 엘프 아가씨! 이틀 후면 그녀는 죽고, 남은 방도는 키메라화 밖에 없습니다. 그녀를 살리기 위한 다른 대안이 없단 말입니다!”

린이 여전히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키메라가 뭐야? 언니는 어떻게 되는 건데?”

“전보다 더욱 강해지실 겁니다.”

하버트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그것뿐?”

“나머진 사소한 문제일 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소한 게 뭔데?”

“별거 아니에요. 몬스터화가 진행되면서 이성이 좀 퇴화하고, 외형이 좀 끔찍하게 바뀌고,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소한 점이 무슨 대수입니까? 강하고 효율적이면 그만이죠!”

그 말을 들은 로드가 절래 절래 고개를 저었다. 그게 뭐가 대수냐고 묻는 시점에서 인격적으로 구제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저기.”

곰곰이 고민하던 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몬스터가 되면, 더 이상 엘프가 아니게 되는 거야?”

“뭐 그렇죠.”

“……그런 건 싫어.”

린이 정신나간 사람처럼 빠르게 중얼거렸다.

“몬스터는 싫어. 인간처럼 싫어. 냄새나. 더러워. 미천해. 수준 낮아. 르네 언니가 그런 저급한 것이 되어버릴 바엔 차라리…….”

“좋지 않아요! 그런 사고방식은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하버트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 채고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몬스터면 뭐 어떻습니까?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리고 꼭 몬스터라고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산맥에 사는 ‘레드 놀’들은 음식물을 소화시키고 그것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장내 세균과 음식물 찌꺼기를 결합 발효시켜 새로운 영양소를 일으킵니다. 그렇게 변을 본 것을 다시 본인이 재 섭취하는 과정에서 효과적인 영양 상태를 유지할 수 있죠! 보세요! 이 얼마나 훌륭하고 효율적인 생명체 입니까?”

세 사람이 다시 한심하다는 눈으로 하버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본인 것이 아니라, 다른 동족이 싼 변을 섭취하면 고른 영양소 분배도 가능하…….”

“그냥 조용히 해주세요. 하버트.”

이브가 차갑게 말했다.

“이, 이런 건 어떻습니까! 홉고블린은 이마에 눈이 하나 더 달려서 주위를 쉽게 살펴볼 수 있…….”

“입 닥쳐요. 하버트.”

“…예.”

다행히도 린은 이번에도 하버트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은 듯, 자신의 고민에만 푹 빠져있었다. 그러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어 말했다.

“조건이 있어.”

“조건요?”

“…아앙?”

유니벨이 발끈한 표정으로 손목을 풀었다.

“요 기특한 년 좀 보소. 듣자 듣자하니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말인지 방구인지를 마구 지껄이네? 넌 포로야. 저 미치광이 과학자 말 대로 하자는 건 아니지만, 네가 감히 조건을 제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오호호! 일단 한 번 들어보도록 하죠. 과학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자들을 저는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버트가 기분이 좋아져서 말했다.

“르네 언니가 키메라가 되어야 살 수 있는 거라면…….”

그녀가 결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도….”

“응?”

“…린도 키메라가 될 거야.”

잠시 정적이 일었다. 그녀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 생긴 정적이었다. 반응은 한 발 늦게 튀어 나왔다.

“……에에엑?!”

“진심인가요?”

“미쳤어? 너?”

모두가 경악했지만 린은 또박 또박 말했다.

“…언니가 눈을 떴는데 저급한 키메라가 되어 있으면 슬플 테니까. 린이 같이 키메라가 되어 줄 거야.”

“……미친년.”

유니벨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오.”

하버트는 다른 사람들보다 반응이 늦었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그의 입가가 일순간 찢어질 듯 커졌다.

“…오오 ……오오오, ……오오오오오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이렇게 찬란할 수가아아아!”

그가 괴성을 지르며 다가와 린의 두 손을 덥석 쥐었다.

“정말 훌륭한 결심입니다! 그대의 희생, 아니 그대의 헌신은 위대한 과학 발전의 크나큰 밑거름이 되어 영원토록 기억될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그대가 한 줌 흙이되어 사라진다 해도! 당신의 이름은 학자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오르내리겠죠! 훌륭해요! 아주 훌륭합니다!”

“…그런 건 상관없어.”

린이 말했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 린은 그저 언니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을 뿐이야.”

“좋습니다, 좋아요! 자자, 이쪽으로……! 어서 이쪽으로!”

결심이 바뀌기 전에 하버트가 린의 등을 떠밀며 데려갔다.

“……괜찮을까요?”

이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흥. 이제 뭐 어떻게 되든 자기 잘못이지.”

유니벨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옆의 로드가 후후 웃었다.

“그렇게 무심하게 말하는 것 치곤 여기까지 바로 찾아왔네? 사실은 걱정 된 거 아냐?”

“…그, 그냥 잡혔다기에 놀리려고 온 거야! 놀리러!”

“그래, 그래.”

세 사람은 린이 나가는 모습을 잠시 남아서 지켜보았다. 엘프로서의 마지막 그녀의 모습이었다.

========== 작품 후기 ==========

프리워커 / 감사합니다. 저도 귀엽다고 생각해요! �...

알테니아 / 기승전비월! ㅋㅋㅋ

한계지점돌파 / 경찰 앞에서 소매치기 하는것과 같군요

Speedwagon / 베아 은발입니다! 작중에서 얼마나 언급했는데 ;ㅅ; 적발은 유니벨이에요.

llSongOfBladell / 예지력이 상승하셨습니다.

Mr윤 / 과연?!!

그랑엘베르 / 기본적으로 신관들은 다른 플레이어는 섬기지 않습니다. 만약 어떻게든 꼬신다고 해도, 지휘관 창을 쓸 수 있는 신관은 한 명 뿐이에요.

로리콤MK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영원히 고통받는 로드 ㅋㅋㅋㅋ

SW스윈 / �� 감사합니다! 임시 표지지만 마음에 들어요.

니알라토텝 / 로드 : (뻘쭘)

@빛과하늘 / 그렇게 하면 얼마나 절 매도하시려고 ㅠㅠ

@로아리아 / 2차성징은 하고 있죠...! 요즘은 초딩들도 하는 것을...

@...(-1)... / 정확히는 확률 50%가 아니라 적합도 50%에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김현수에게 맡기는 게 어떤가 싶습니다

@火炎無 / 판사님! 저는 로리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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