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123화 (123/296)

<-- 문화의 나라 -->

“모두 앞으로 나와라.”

로드의 말에 장로가 퍼뜩 모습을 드러냈다.

“…죄, 죄송합니다! 아무 일도 아니오니 시작을…….”

“과인은 모두 앞으로 나오라 했거늘. 아직 나오지 않은 자는 누구인가?”

장로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자 로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했다.

“과인의 말이 말 같지 않은 모양이구나. 성이 좀 칙칙했었는데 환경에 변화를 줘야겠다. 부관.”

“예! 폐하!”

도열해 있던 무장 중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감옥에 있는 병사 100명을 효수하고, 그 머리를 복도에 깔아 두거라.”

그 말에 장로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자,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늙은것들의 목숨으로 참아 주시기를! 아직 창창한 젊은이들입니다!”

“…그대들은 아직 어비스라는 나라의 소문을 듣지 못한 듯 하군.”

어비스라는 말이 나오자 장로들의 안색이 대번 굳어지는 게 보였다. 처음 만난 티아가 그랬던 것처럼, 대륙 전역에서 어비스의 이미지는 최악이었다. 로드는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지만, 이럴 때 이미지를 써먹어보지 않으면 언제 써먹겠는가.

“뭐 하고 있는가? 부관.”

“…잠시만요!”

결국은 벽 뒤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찰랑이는 핑크빛 머리카락에, 그보다 조금 더 진한 체리색 눈동자가 돋보이는 미모의 여인이었다. 나이는 10대 후반 정도로 보였으며, 평범한 디자인의 단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성큼 성큼 다가온 그녀는 다른 장로들처럼 바닥에 엎드리며 말했다.

“제가 이 영지의 대표예요. 목숨을 거두실거면 불쌍한 장로님들 대신 제 목숨을 거두어주세요.”

“일어나라.”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로드가 다시 말했다.

“과인에게 청을 하기 전에 정체를 밝히는 게 먼저 아닌가?”

“제 이름은 로즈안느. 전 베틀린 국왕의 딸입니다.”

‘……오호.’

과연 장로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고 한 이유가 있었다. 설마 숙청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왕가의 피가 남아있을 줄이야.

“그대가 장로들을 대신하겠다는 건가.”

“…네.”

“우습군.”

로드가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기대며 말했다.

“멸망한 나라의 공주의 목숨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더냐?”

로드가 팔을 세워 신호를 보내자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손대지 말아요!”

그녀가 버럭 소리쳤다. 순간적인 박력에 병사들이 멈칫했다. 로드도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폐하, 마지막으로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라.”

“숙청을 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미 폐하께 대항하는 수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왜 죄 없는 사람들까지 죽이려고 하시는지요?”

로드가 세삼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너희들을 중심으로 민중들이 결집해 반기를 드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쯤은 우리 병사들의 태도를 봤다면 잘 아실 텐데요?”

그때 로드의 머릿속에서 스스로 자신을 묶어 대령한 순박한 병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장면을 떠올리니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힐 뻔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꾸며낸 태도일 수도 있지.”

“그렇다면 저희가 폐하께 결백과 충성을 입증한다면 숙청의 이유가 없어지겠군요.”

“그것이 확실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목숨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증명할 텐가?”

“…….”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로브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이봐.”

로드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과인을 너무 얕보는 것이 아닌가? 과인은 결백과 충성을 증명하라고 했다.”

“…….”

그녀는 모욕이라도 들은 것처럼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럼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그대들의 과제를 왜 과인에게 떠넘기려 하는가?”

두 사람의 줄다리기 같은 신경전이 계속 되었다.

‘그런데…….’

로드는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표정을 제대로 읽어낸 것이 맞다면, 그녀는 고민하고 있었다. 뭔가를 하고 싶긴 한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만.’

로드의 오른쪽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한번 도와줘 볼까.’

로드의 고유능력인 ‘감정 증폭’의 힘이 발동되었다. 동시에 로즈안느가 어깨를 가늘게 떠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적중했다.

“…어쩔 수 없네요.”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 톤이, 딱딱한 목소리에서 생기발랄한 하이 톤으로 바뀌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장로들이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로드 또한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거 괜히 위험한 봉인을 풀어버린 거 아냐?’

그녀가 로브를 한 손으로 붙잡고는 한 방에 팍, 하고 잡아당겨 던졌다. 몸에 딱 달라붙어 굴곡이 강조되며 배꼽이 드러나는 상의와 짧은 스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외쳤다.

“제 노래로! 결백을 입증하겠습니다!”

‘……네?’

로드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그녀가 팔을 뒤쪽으로 척 뻗었다.

“류트!”

와장창창! 어디선가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뜸 기타와 비슷한 작은 현악기가 손으로 쏙 들어왔다. 주위에 푸른 응어리 같은 것들이 맺혀있는 모습을 보니 마법 아이템 같았다.

“갑니다아!”

지잉!

그리고는 류트를 켜며 연주를 시작했다.

풍부한 멜로디가 배경처럼 고요하게 흐르다가, 이어서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가 그 위에 더해졌다.

그녀는 노래했다.

심지어는 곁들이는 율동까지 있었다. 로드는 지금 상황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노래하는 공주님이라니.’

장로들은 ‘망했다.’ 하는 표정으로 이마를 바닥에 박고 있었다. 로드가 귀 기울여 들어보니 노랫말도 그냥 평범한 사랑이야기였다. 가끔 어시스트로 로드 쪽을 가리키거나 가사 중간에 ‘어비스’를 섞거나 하긴 했지만… 역시 결백과는 관계없었다. 그냥 본인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부른 게 틀림없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단체로 미친 게 틀림없어!’

로드는 그녀의 연주를 중단하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서 계속 저 음악을 듣고 싶다는 욕구가 크게 요동쳤다. 1분쯤 지나자 로드는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자, 잘하잖아?’

류트 연주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노래도 마찬가지, 그냥 잘 부른다, 혹은 귀엽게 부른다는 정도이지 대단한 기교가 있지는 않았다. 티아의 노랫소리를 들었을 땐 정말이지 입이 쩍 벌어졌었는데 그보다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드는 그녀의 노래와 춤에 푹 빠져들고 있었다.

‘뭔가 있군.’

로드는 이능의 효과를 눈치 채고는 지휘관 창을 열어 그녀의 스테이터스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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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로즈안느 페터 베틀린

소속 : 베틀린 시티

직위 : 없음

종족 : 인간

무력등급 : (C+)

통솔등급 : (B)*

지략등급 : (F)

정치등급 : (E)

B급 통솔형 클래스 입니다.

고유능력 : 선율의 아이

어릴 때부터 선천적으로 마력 친밀도가 높았던 그녀는 연주에 마력을 실어 날리는 기술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완전히 새로운 이능을 개안했습니다. 그녀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소리, 음색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며, 로즈안느에게 강력한 호감을 품게 됩니다. 그녀의 연주를 들은 아군은 사기가 상승하며, 버프 효과가 담긴 경우에는 그 효과가 증폭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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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허억!’

로드는 표정 관리를 하려 부단히 애를 써야했다. 이런 곳에서 무려 B급, 그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통솔형 영웅을 보게 되다니! 갑자기 류트를 연주하는 그녀의 뒤에서 꽃밭이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또 다시 로드의 지병인 인재 집착증이 터져 버린 것이다. 로드는 당장 어비스로 납치해가고 싶다는 강한 소유욕을 간신히 억눌렀다.

‘윽, 정신 차리자.’

로드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으며 노래를 감상했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며 하는 율동은 몹시 여성적인 어필을 하고 있었다. 다리의 각도, 팔의 움직임, 부끄럽고 수줍어하면서도 당당하게 노래를 부르며 멜로디에 딱딱 맞아 떨어지는 춤사위, 그것은 역시…….

‘…아이돌이냐.’

핑크빛 발랄한 외모도 그렇고, 복장도 그렇고, 고유능력의 컨셉도 그렇고, 절로 아이돌이 떠올랐다. 로드가 슬쩍 시선을 돌리니 병사들은 아주 눈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문화수준이 낮은 어비스 출신들에게 그녀의 저 춤사위는 실로 컬쳐쇼크일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강력한 군중 영향력을 가진 인재가 등장해 버렸다. 로드는 계획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계획으로.

처억!

마지막으로 로즈안느가 손가락을 하늘로 뻗는 것으로 연주가 종료되었다. 정적이 성 안을 휘감았다.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허리 숙여 사방 곳곳으로 인사했다. 옆에 병사들한테도 관중 대접하듯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떠셨나요?”

그녀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로드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좋다, 로즈안느. 네 잠재력을 한번 믿어 보겠다.

로드는 얼굴에 철판을 깐 다음, 박수를 굵고 강하게 짝.짝.짝. 세 번 쳤다.

“…실로 훌륭한 연주였다.”

“……!”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장로들이 놀라자빠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 나라에 조금 관심이 생기는군. 다른 음악가들의 음악도 듣고 싶어졌다.”

“저, 정말요?”

감격한 그녀가 눈물까지 글썽였다.

“부관.”

“예, 폐하.”

“나라에 가장 우수한 음악가들을 뽑아 이곳으로 들여라. 그들의 연주를 듣고 난 후에…….”

로드가 로즈안느를 보며 빙긋 웃었다.

“숙청에 대해 결정하겠다.”

이때 그녀가 지은 표정은 근사한 크리스마스 트리와도 같았다.

*

로드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베틀린 바드들과 음유시인들의 무대를 보고 있어야만 했다.

공연을 하루 종일 관람하는 게 조금은 지겹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수준이 높아서 깜짝 놀랐다.

베틀린의 음악가들은 숙청을 피하는 것 이전에, 그동안 문화 통제 정책으로 쌓인 게 많았는지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고, 노래 불렀다. 특히 마지막에 이름 모를 극단이 선보인 오페라는 가히 인상적이었다. 극의 제목은 판도라. 아마 ‘로미오와 줄리엣’의 에덴 버전인 듯 했다.

“……제인이 불쌍해요.”

베아트리체가 로드의 품에 안겨 훌쩍거렸다. 나의 베아를 감동시키다니! 로드는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큰 상을 내렸다. 극단원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서로 얼싸안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어지간히 인정이 고팠던 모양이었다.

모든 차례가 끝나고 날이 어두워지자 로드는 다시 로즈안느와 장로들을 불러들였다.

“그대들이 보여준 예술은 실로 훌륭했다. 과인은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노라.”

부복해 있는 그들을 향해 로드가 입을 열었다.

“오로지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 잘 보았다. 숙청은 철회하겠다. 감옥에 있는 모든 병사들을 해방하고 이 영지를 얽매고 있던 모든 통제를 풀겠다.”

그들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여 일주일간 축제를 열 것이다. 창고를 개방하여 술과 고기를 내어줄 터이니 마음껏 먹고 마시며 그대들의 장기를 발휘하도록 하라.”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들이 어린아이들처럼 방방 뛰며 영주성을 나섰다.

이제야 오늘 일과가 다 끝났다. 로드는 지친 얼굴로 베아트리체의 몸에 기대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폐, 폐하,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부관이 다가와 설명을 요구했다.

“정말로 그들의 음악이 감명 깊어서 이러시는 건 아닐 테고…….”

“흐흐.”

로드가 씩 웃었다.

“지켜보라고, 어떻게 되는지.”

다음날 날이 밝으며 영지 내에 소문이 떠들썩하게 퍼졌다. 새로운 영주가 숙청을 철회하고 병사들을 모두 풀어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소문은 한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바로 로즈안느였다.

‘공주 로즈안느가 어비스의 왕 앞에서 목숨을 걸고 노래했으며, 잔혹한 왕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크게 감명시켰다. 그녀가 베틀린의 모든 백성들을 구원한 것이다!’

영지 전역, 그리고 베틀린 시티를 넘어 전 베틀린의 영토 전역에서 그녀의 이름이 쉴 새 없이 오르내렸다.

========== 작품 후기 ==========

황금 연휴인데 왜이렇게 바쁠까요! 크흡 ;ㅅ; 여러분은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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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윤 / 이번화도 감사합니다!

벌레/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라 반박할수가 없군.

그랑엘베르 / 비월 NTR이라니... ㅠㅠ

Xedrions / 갸아아아악!

니알라토텝 / 성문 부순것에 대해 부연설명을 드리자면 플랫랜치 외성 성문은 위에서 아래로 닫히는 거대한 쇳덩어리가 아니라 중소규모의 목재위주의 문이라 강한 타격으로 부술수 있었답니다.

알테니아 / 스토리 파괴까지...! 대체 이분의 비월 사랑은 ㅠㅠ

Speedwagon / 유니벨 : 풋 ㅋ

SW스윈 / 베틀린은 게노세르크에게 멸망당했고 그냥 영지만 남아있습니다. 나라로서의 기능은 하지 못해요.

아프게했어 / 골라먹는(?) 재미라. 후후후후후후후

지리산의늑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말렉 극 안티분 ㅋㅋㅋ

@로아리아 / 쿠폰 정말 감사합니다! 키메라는 나중 편에 언급될듯 해용!

@...(-1)... / 말렉 렉 걸린듯

@로리콤MK / 물론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닙니다!

@빛과하늘 / ㄹㄹ는 아니고 여러 연령대가 섞인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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