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나라 -->
이어서 로드가 약속한 축제가 베틀린 시티에서 열렸다. 로드는 생색내듯 축제를 연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곳에 있는 술이며 고기는 원래 전부 이 영지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로즈안느의 감동스러운 스토리에 환호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곳곳에서 성대한 연주와 무대가 펼쳐졌다. 예술가들은 기다렸다는 듯 밖으로 나와 그동안 억압되었던 예술혼을 불살랐고, 축제의 분위기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흐음, 그렇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쨍! 로드와 벤은 영지성 테라스에서 와인 잔을 부딪치며 거리 축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멸국의 공주, 로즈안느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그녀가 베틀린 시티를 구원한 것처럼 만든다. 그리고 억압되어 있은 예술인들에게 다시 자유를 되돌려 준다.”
“그렇지.”
“…소신은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공주와 이야기할 때, ‘너희들을 중심으로 민중들이 결집해 반기를 드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신 건 다름 아닌 폐하였으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이해가 돼?”
“예.”
벤이 와인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어차피 뒷수습을 해야 하는 쪽은 게노세르크니까요.”
“정답이야.”
로드가 사악하게 웃었다.
“우리는 말렉과 정면으로 맞붙을 생각이 없으니, 그들이 내려오면 이 베틀린 시티를 도로 넘겨줘야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다음이야. 게노세르크는 여태껏 해왔던 대로 문화 통제 정책을 펼칠테지만…….”
“전과는 달리 영지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겠군요.”
“맞아. 그들이 완전히 체념했다면 모를까, 다시 예술과 자유의 맛을 알아버렸으니 앞으로도 계속 갈구하게 될 거야.”
로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들은 자유롭던 베틀린시절을 그리워 할 거고, 이번엔 ‘로즈안느’라는 구심점도 있다. 그들이 혁명군으로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말렉의 입장에선 정말 귀찮은 적이 탄생하는 거야.”
“그렇겠군요.”
혁명군의 힘의 원천은 ‘지배계급에 대한 분노’, 지금은 무기하나 제대로 못 다루는 순한 양들이지만 제대로 된 신념이 생겼을 때 그들의 파급력은 엄청날 것이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발트호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른 속도로, 사람들이 혁명의 사상에 감화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좋아, 좋아.”
로드는 이 벤이라는 부하가 퍽 마음에 들었다.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모략가 스타일이라 하나를 말해도 열을 알아듣고 척척 일처리를 해내는 모습이 좋았다. 로드가 살짝 운을 때 보았다.
“혁명단장도 좋지만, 내 측근으로 일 해보는 건 어때?”
“사양하고 싶습니다. 저는 혁명을 위해 존재하는 몸이니까요.”
이제는 마틴보다 더 강한 권력자가 된 로드의 앞이었지만, 벤은 똑 부러지게 거절했다.
그가 안경을 벗어서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품에서 붉은 코팅이 되어 있는 새로운 안경을 꺼냈다. 그가 안경을 쓰는 순간, 눈빛이 예리한 칼날처럼 번뜩였다.
“폐하께서도 저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응?”
“혁명군의 최종 목표는 절대적인 평등입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로드가 씨익 미소 지었다.
“…그 말은 왕실도 예외는 아니라는 거군?”
벤 또한 침묵했지만, 그것이 긍정의 침묵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저 일 잘하는 놈 정도로 여겼었는데, 상당히 재미있는 녀석이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왜 내 밑에서 일하는 거지?”
“최악을 제거하기 위해 차악과 손잡는다. 혁명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돈.”
그가 붉은 코팅이 된 안경을 벗었다.
“무료 자금 조달을 위해서죠.”
“하하하하하!”
정말 골 때리는 녀석이었다. 왕실을 자금 조달처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니!
“그렇다면 당분간은 우린 계속 친구겠네?”
“예. 아직까진 강대한 최악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벤이 부드럽게 이야기했지만 대화 내용은 무시무시했다. 무려 로드를 미래의 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당장 그를 붙잡아 처형해도 이상하지 않은 발언이었지만, 벤은 태연했다. 그의 차갑도록 무심한 듯한 표정은 당장 목젖에 검을 들이밀어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소신은 형제들과 합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벤이 로드에게 인사한 후 떠나갔다. 로드는 킥킥거리며 와인을 홀짝 거렸다.
“……주인님.”
언제 왔는지 베아트리체가 로드의 뒤에서 나타났다.
“응, 베아야.”
“…저 사람, 싫어요.”
로드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베아트리체가 남을 ‘싫다.’라고 말한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위험한 사람이에요. 역시 지금 없애는 게…….”
“아냐, 아냐.”
와인 잔을 내려놓은 로드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난 저 녀석이 꽤 마음에 드는걸.”
“…네?”
“정말 위험한 쪽은 강요받아 충성하는 척 하는 자들이야. 하지만 저렇게 속마음을 터놓고 본색을 드러내는 쪽은 어떤 의미에서 더 신뢰할 수 있지. 이해관계가 명확하고, 계산이 서거든. 저 녀석도 마냥 바보라서 이빨을 드러낸 게 아니야.”
자신과 비슷한 타입이라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만약 후계자를 키워야 한다면 저런 녀석쯤 되지 않일까? 로드는 즐거워졌다. 나중에 그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군.”
로드가 사라져가는 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며칠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다. 여전히 베틀린 시티에서는 밤낮 없는 성대한 축제가 계속 되고 있었다.
“…정말이지!”
유니벨이 이끄는 오벨리스크 팀 병력이 베틀린 시티로 들어왔다. 병사들 통솔은 피닉스에게 맡겨둔 그녀는 로드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수소문해서 그가 이 근처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곳곳에 술과 먹을 것들이 가득했고, 화려한 장식들이 길과 건물에 붙어 있었다. 영지민들은 한 손에는 술병을 든 채 신나는 연주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야!”
그러던 중 유니벨이 로드를 발견했다. 로드는 몇몇 부관들과 함께 분수대에 걸터앉아 가볍게 술 한 잔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도 유니벨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먼 길 수고했어, 유니벨.”
“아주 살판나셨네, 살판나셨어. 응?”
그녀가 성큼 성큼 다가와 그의 옆자리에 쿵! 하고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는 주위 부관들을 찌릿 노려보았다.
“자, 장군!”
“와, 왔어? 꼬맹이.”
부관들이 슬금슬금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아, 뭐해. 새끼들아.”
그녀가 눈을 치켜떴다.
“왕실 사람들끼리 할 말 있으니까, 얼른 꺼져!”
“히, 히익!”
“네, 넷!”
부관들이 헐레벌떡 자리를 떴다.
“너무한 걸, 내 술자리 친구들을 �i아 내버리다니…….”
“너무한 건 네 쪽이야! 바보야!”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누구는 공성하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누구는 한가하게 술판이나 벌이고 앉아있냐?”
“할 일은 다 하고 쉬는 거야. 우리 쪽 공성은 하루도 안 되서 끝났거든. 그리고 지금도 엄연히 일 하는 중이지.”
“웃기고 자빠졌네! 술 처마시는 게 무슨 일이라고!”
로드가 미소 지으며 술잔으로 주위를 가리켰다. 베틀린 시티의 영지민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유니벨과 눈을 마주치자 슬금슬금 시선을 피하긴 했지만, 가끔 확인하듯 로드쪽을 돌아보곤 했다.
“어비스의 잔혹한 폭군으로 알려진 내가 당신들이 만든 이 축제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 그런 이미지를 저들에게 보여주는 거지.”
“……흥, 외국에서 인기 관리해봐야 무슨 소용이라고.”
유니벨은 그렇게 말하며 적당히 잔을 하나 집어서 슥 내밀었다.
“응?”
“나도 줘, 술.”
“넌 미성…….”
“또 그 빌어먹을 미성년자니까 안 된다고 하면 진짜 머리에 술통 엎을 줄 알아.”
“아, 넵.”
로드가 재빨리 술을 따랐다. 그녀는 단숨에 잔을 비우고는 ‘캬.’ 하고 감탄했다.
“여기 술 맛 좋네?”
“놀기도 좋은 곳 같더라. 에덴의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면 대박 날 것 같은데. 아무튼, 네 쪽은 어떻게 됐어? 보고하러 온 거 아냐?”
유니벨이 ‘결국은 일 이야기냐.’ 하면서 못마땅한 듯 술잔을 내려놓았다.
“네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폐하. 저희는 공성 사흘 정도에 오벨리스크를 점령했구요, 남은 시간 동안은 혁명군들을 활동시켰어요. 그 오빠들이 말하기를 진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나라 사람들을 완전히 설득시키려면 시간이 좀 더 많이 필요할 것 같다고 하네요.”
“…그렇군. 수고했어.”
“그런데 어차피 게노세르크가 내려오면 도로 반납해야 하는 영토잖아? 지킬 생각도 없으면서 왜 병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영지를 점령한 건데?”
술이 들어가서일까, 곁에 앉아서 쫑알쫑알 이야기하는 이 빨간 머리 소녀가 갑자기 퍽 귀엽게 느껴졌다. 로드가 무심코 그녀의 정수리 위에 손바닥을 툭 올리며 말했다.
“게노세르크의 기반을 뿌리에서부터 약화시키기 위함이지.
“…또 어려운 소리한다.”
웬일로 그녀는 터치를 했는데도 잠자코 있었다. 로드가 이어서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말렉은 무에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지만, 내정에는 약점이 많아. 녀석이 만든 구멍 중에 하나를 꼽자면, 전 베틀린과 루미너스 두 점령지 사람들의 불만이 크다는 거야.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가면서 줘야 하는데 그냥 일방적으로 정책을 밀어붙인 경우지.”
“흐응…….”
유니벨이 스스로 술을 따라서 홀짝거렸다.
“그래서 점령지의 가장 큰 도시를 우리가 차지해서 수인들을 �i아내고, 영지민들에게 잠시나마 잊혀졌던 ‘자유’를 선물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가 돌아간 후 다시 게노세르크가 강하게 통제하게 되면, 그 사람들은 어떨까?”
“당연히 열 받겠지.”
“맞아. 분노는 계속 쌓여갈 거야. 말렉이 무서워서 참고 있긴 하겠지만, 그들에게 빈틈이 만들어지는 순간, 쾅! 터지는 시한폭탄이 되는 거지.”
유니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발트호른을 점령했고, 그쪽 왕실 관계자들을 모두 잡아둔 거구나? 말렉이 돌아왔을 때, 제대로 대처 못하고 내정이 엉망이 되도록.”
로드가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유니벨도 이제는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군!”
“그럼 예전엔 안 돌아갔다는 거야?!”
두 사람이 아옹다옹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뒤쪽에서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여기 계셨군요? 폐하.”
“아, 로즈안느.”
“실례가 안 된다면, 저도 합석해도 될까요?”
“물론이지.”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슬림한 로브차림이었다. 물론 로드는 알고 있었다. 저 로브 아래에는 축제용 아이돌 복장을 입고 있을 것이었다.
“이 여잔 또 누구야?”
유니벨이 왠지 싸한 표정으로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아, 인사해. 베틀린의 공주인 로즈안느야. 이쪽은 유니벨. 어비스에서 재정관을 맡고 있는 왕실 식구지.”
“반가워요, 유니벨 님. 로즈안느라고 해요.”
유니벨은 고개를 한 번 까닥거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폐하도 차암, 전 더 이상 공주가 아니라니까요?”
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은 그녀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다들 공주라고 부르던 걸, 뭐. 그런 이미지에 퍽 잘 어울리기도 하고.”
“헤헤, 정말요?”
그녀가 부끄러운 듯 뺨을 감쌌다. 맞은편 유니벨이 영 아니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요, 폐하.”
“응?”
“처음 만났을 때, 숙청이라느니, 제 목을 베겠다니 한 거 전부 거짓말이었죠?”
로드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 작품 후기 ==========
갓히스 / 핑챙이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
Mr윤 / 아이돌 프린세스!
알테니아 / 알테님을 위해 비월을 대체할 새로운 여캐를 추가했습니다. 저격 완료!
학교만12년째 / 아재팬 로드...
Xedrions / 졸지에 20대 초반에 아재가 된 로드..
니알라토텝 / 로리와는 거리가 좀 있죠! 로즈안느는 다 컸죠.
그랑엘베르 / 무시무시한 취향을 장착하고 계시군요. ㅎㄷㄷㄷ
EOEW / 어떤 게임인지 모르겠네요 ;ㅅ;
Speedwagon / B급이라 장군자리는 꿰찰수 있을듯.
로리콤MK / 데스메탈 공주님이라니! 멋지군요
--
@火炎無 / 뭔가 제 호칭이 엄청 추가됐군요.. 귀축 예비생이라��ㅋㅋ
@...(-1)... / 기승전 비월! ㅜㅜ
@로아리아 / 조금 후에 나올듯 합니다~
@빛과하늘 / 전 여캐 키메라 화 각인가;;
@쿠죠죠타로 / 네, 맞습니다. 그 분은 플레이어되고 바로 딸을 얻은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