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나라 -->
“헤헷, 저 보고 싶었죠? 그쵸? 그쵸?”
치엘로가 로드의 팔뚝을 툭툭 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만 좀 때려. 반격한다?”
“정말요오? 치엘로 때릴 거예요?”
애교가 흠뻑 섞인 목소리에 로드가 당황한 듯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애, 애가 갑자기 왜 이래?’
아무리 남자들이 오는 애교는 마다하지는 않는다만은, 로드는 그녀의 본래 모습을 알고 있어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보다 정도가 더 심한 것 같았다.
그리고 한편.
‘……이, 이럴 수가!’
치엘로의 경호로 따라온 민트는 이번에도 엄청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던가. 딱 그녀의 상태가 그러했다. 여태껏 본 최고의 가식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본인이 알던 켈타인 성의 폭군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네 뒤에 있는 녀석은?”
우연히 민트의 기겁한 표정을 본 로드가 뒤를 가리키며 물었다. 뒤돌아본 치엘로가 민트를 날카롭게 쏘아봐준 후, 다시 웃는 얼굴로 고개를 되돌렸다.
“그냥 쫄병이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아니, 그래도…….”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와요?”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너무해, 너무해에에! 말렉 님의 대시도 차버리고 로드 오빠를 택했는데! 저한테 어쩜 이럴 수 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게노세르크에 붙는 거였어!”
‘…난 도대체 누구랑 대화하고 있는 걸까?’
대화가 더 산으로 가버리기 전에 로드가 재빨리 화재를 돌렸다.
“이번 워프게이트는 몇 명이나 탈 수 있어?”
“넉넉하게 10명 정도요.”
“좋아.”
이제 곧 전면전을 앞둔 상황이었고 시간은 금이었다. 로드는 한발 빠르게 언더하임으로 복귀해 다음 계획을 수립할 생각이었다. 보급 문제로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은 이브와, 이번 전쟁에서 가장 고생한 유니벨은 배려하는 차원에서 같이 데려가기로 했다. 나머지 일곱명은 부상자들로 머릿수를 채웠다.
왕실 식구들만 모두 편한 방법으로 돌아가면 모양새가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병사들을 통솔할 사람이 없으니 티아가 자진해서 총사령관으로 남았다. 남은 가신들도 병사들과 함께 돌아오기로 했다.
그리고 로드의 호출을 받은 유니벨은 날 듯한 걸음걸이로 오고 있었다. 워프게이트로 먼저 언더하임에 도착하게 해준다니! 게다가 같이 가는 가신 중에서는 자신과 이브밖에 없었다. 이번 원정 동안 느끼고 있던 로드에 대한 서운함이 조금은 사그라졌다.
‘…어?’
그런데 로드에게 도착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다시금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웬 마녀차림의 여자애와 로드가 살갑게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무척 친해보였고, 여자 쪽에서 로드의 가슴을 팍팍 치는 등 스킨십도 서슴지 않았다.
“……야, 팬더.”
유니벨이 살기를 흘리며 성큼 성큼 다가왔다. 대체 저 녀석은 왜 이렇게 주위에 여자가 많단 말인가.
“저 여자는 또 뭐야?”
유니벨을 발견한 치엘로 또한 표정이 굳어졌다.
“……로드 오빠? 저 아이도 오빠의 영웅인가요?”
“맞아.”
“하아, 정말이지…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로리콤.”
고개를 절래 절래 젓는 치엘로의 눈빛에는 경멸이 섞여 있었다.
“……아, 아니라니깐!”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야! 저 여자 누구냐니까?”
로드는 골치 아파지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려 두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이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기술은 가히 장인의 경지까지 발전해 있었다. 그녀들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와아, 어린 나이에 벌써 재정관이라니! 대단해요. 유니벨 언니!”
‘……이 녀석, 양심이 없는 건가?’
이번엔 로드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치엘로를 보았다.
“……야.”
유니벨이 픽 하고 웃음을 흘리더니 치엘로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너 조심해라.”
“네에?”
“…네 년에겐 내숭의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나.”
유니벨의 진홍빛 눈동자가 으스스한 이채를 발했다.
“괜히 저 바보한테 이상한 수작부리지 말란 소리야.”
로드는 속으로 감탄했다. 과연, 치엘로의 본색을 꿰뚫어 본건가. 맑디맑은 로즈안느에게는 약하지만 이런 타입을 퇴치하는 건 유니벨의 특기였다. 그러나 치엘로는 여전히 해맑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죠? 치엘로는 잘 모르겠는데에.”
“……아씨! 징그러우니까 그딴 말투 하지 말라고!”
유니벨이 언더하임 뒷골목 출신들만이 구사할 수 있다는 끔찍한 언어적 모욕을 구사해 버릇을 고쳐주려는 순간, 이브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죄송합니다, 폐하!”
그리고는 유니벨의 머리를 붙잡고 머리를 숙이게 했다. 자신도 같이 머리를 숙였다.
“아직 어린 아이라 뭘 잘 몰라서…… 부디 너그럽게 봐주시길.”
“아야아! 이브, 아파!”
치엘로가 선하게 웃는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저보다 언니인걸요?”
‘……이 녀석, 정말로 양심을 안드로메다에 놓고 온 건가.’
로드가 한숨을 쉬었다. 본체는 징글징글한 스물두살입니다. 속지마세요, 여러분.
아무튼, 호위역인 민트가 워프게이트를 가동시켰고, 유니벨과 부상자들이 먼저 워프게이트로 넘어갔다. 이제 남아있는 사람은 이브와 로드, 치엘로였다.
“먼저가, 이브.”
로드가 말했다.
“…폐하는요?”
“치엘로와 할 이야기가 있어.”
이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워프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로드는 그 모습을 확인한 다음 시선을 돌렸다.
“어머, 제게 할 말이 있다니. 뭔데요?”
“……시치미 때지마. 아란은 어떻게 됐지?”
그녀의 미소가 서서히 옅어져갔다.
“…알고 싶으신가요?”
“그래.”
말없이 뒷짐을 지고 몇 걸음 걸어가던 그녀가 빙글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로드 오빠의 전언은, 게노세르크의 병력이 물러나지 않고 총공세로 공성을 감행할시, 큰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퇴각전을 수행할 것. 맞죠?”
“…그랬었지.”
“아란님은 이렇게 대답했어요. ‘플랫랜치를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뼈를 묻겠습니다.’ 라고.”
“……하아.”
로드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역시 그랬나.
“제가 도망치자고 옆에서 보채봤지만, 말을 안 듣더라구요.”
“……그럼 아란은 어떻게 된 거야?”
“어비스에서도 다른 소식 없어요?”
“…응.”
“그렇다면, 말렉에게 붙잡혔을지도.”
로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치엘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잘못이 아니니까, 괜한 짓은 하지 말아요. 아셨죠?”
“알아.”
로드는 그 한마디를 던져 놓고는 워프게이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
로드가 워프게이트를 타고 언더하임에 도착하니, 이브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어요? 유니벨과 부상병들은 먼저 보냈어요.”
“하하, 왜 기다렸어? 너도 먼저 들어가지.”
로드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이브는 로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무슨 일 있으셨죠?”
“먼저 들어가.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저도 옆에서 지켜보겠어요.”
이브가 말했다.
“저는 폐하의 신관이니까요.”
그녀의 진지한 얼굴을 본 로드는 설득을 포기하고 지휘관 창을 열었다. 그의 떨리는 손가락이 허공에 여러 번 맞닿았다. 로드는 마지막으로 긴장한 듯한 표정을 없애고는, 손가락을 뻗었다.
‘…간다.’
- ‘로드 폴렌티아’님이 ‘말렉’님께 1:1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곧이어 수락했다는 알림과 함께, 지휘관 창 옆에 새롭게 나타난 화면에 호인 말렉의 살벌한 얼굴이 나타났다.
“여어, 이게 누구신가!”
목소리 볼륨이 얼마나 큰지 로드는 절로 인상이 찌푸렸다.
“……말렉.”
“네놈이 내게 먼저 연락할 줄은 몰랐다. 상황이 뭔가 재밌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크흐흐흐! 그래, 내 수도는 잘 있나?”
로드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에게 어떤 정보도 주고 싶지 않았다.
“…본론을 말하겠어.”
로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포로교환을 제안한다.”
“뭐라고? 크하하하하하!”
말렉이 의자 팔걸이를 탕탕 치며 큰소리로 웃어댔다. 로드는 그가 웃건 말건 이어서 말했다.
“네 신관과, 우리 쪽 아란의 1:1 교환이다.”
“…호오.”
로드는 발트호른 점령이후 말렉의 왕궁에서 일하던 문관들을 모두 붙잡아 언더하임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 그 목적은 당연히 게노세르크의 내정 붕괴였다.
군주인 말렉은 전쟁에만 집중했으며, 내정 전반을 B급 정치형 영웅인 그의 신관에게 맡기고 있었다. 알란드의 비앙카처럼, 실로 게노세르크의 핵심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신관과 아란의 1:1교환이다. 아란 또한 C급 통솔형 영웅으로서 어비스의 장군이자 아로게쓰측과 로드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긴 했지만 두 매물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그럼에도 로드는 손해를 감수하고도 아란을 구하기로 했다.
‘치엘로가 알았다면 욕 한바가지 먹었겠지.’
하지만 로드는 책임지고 싶었다. 아란이 얼마나 플랫랜치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면서도, 그와 플랫랜치에 미끼 역할을 종용했다. 선광처럼 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힘이 닿는 데까지는 자신과 어비스를 위해 싸워준 부하를 구하고 싶었다.
“…흠.”
말렉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고민이 길어질수록 로드의 의문은 커져갔다.
‘……뭘 고민하는 거냐? 말렉. 생각해볼 여지도 없을 텐데.’
고민 끝에 말렉이 입을 열었다.
“성에 안차는군.”
“…뭐?”
“네가 붙잡은 녀석들 중에서 엔시아, 아루루라는 녀석들도 있을 거다. 둘 다 C급 정치형 영웅인데, 걔들도 붙여.”
말렉은 무려 1:3 포로 교환을 제안해왔다. C급 한명을 주고, B급 한명과 C급 둘을 요구한 것이다.
‘……날강도.’
로드가 입을 열었다.
“제정신이 아닌 소리란 건 알고 있겠지? 제대로 생각하고 내뱉는 건가?”
“크흐흐! 물론이다. 거절해도 난 전혀 상관없어.”
마틴이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 그를 보는 로드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상관 없을 리가!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B급 정치형 영웅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단순히 배짱을 부려보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로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감추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지.”
“크, …크큭, 크하하하하하하하하!”
말렉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배를 잡고 박장대소를 해댔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그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정말 그 녀석을 소중히 여기는구만? 로드.”
“…….”
“이봐! 밖에 누구 있나?”
말렉이 화면 밖의 누군가를 불렀다.
“예! 산군.”
“포로중에 아란이라는 놈, 있지?”
“네, 플랫랜치에서 붙잡은 적 지휘관 아닙니까?”
“목을 베어서 내 앞에 가져와라.”
“……!”
로드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역시나 말렉은 처음부터 신관을 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로드를 농락할 생각뿐이었던 것이다. 수인이 명령을 듣고 밖으로 나갔다.
“아아, 걸작이야! 로드! 그 표정! 바로 그 표정이야! 하하하하하!”
“…….”
“잘 들어, 물러터진 놈.”
말렉이 얼굴을 화면 가까이 들이밀었다.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여긴 전장이야. 세상만사 네 마음대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렉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기면 살고, 패하면 죽는다. 전장은 그뿐인 곳이야. 네놈들의 빌어먹을 게임 놀이터가 아니란 말이다!”
“…넌 중요한 부하를 살릴 수 있었어.”
말렉은 기도 안 찬다는 듯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내 알바 아냐. 싸움에서 패배해 붙잡힌 개 따위, 죽어버리는 게 낫지.”
“……미친놈.”
로드가 싸늘하게 말했다. 전장에 대해 잘난 듯 말했지만 말렉이야 말로 어딘가 삐뚤어졌다.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여기는 전쟁광이자 쾌락주의자. 그것이 말렉의 정체였다.
“크하하하하! 즐겁구만! 즐거워! 어떤가? 로드. 5분후면 네 부하의 머리를 볼 수 있을 텐데 마지막 작별인사라도 하는 것은…….”
로드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대화창을 닫아 버렸다.
“이브!”
로드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소리쳤다.
“…네, 폐하.”
“게노세르크의 신관은 언더하임에 돌아오는 대로 처형한다!”
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는 여전히 화가 안 풀리는 듯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허공에 악 소리를 질러보기도 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니 대륙어가 아닌, 지구의 욕설이 마구 튀어나왔다.
“……하.”
용암처럼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속에 들어앉은 느낌이었다. 로드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며 비틀거리자 이브가 다급히 다가왔다.
“폐하! 괜찮으세요?”
“……”
로드가 얼굴에서 손바닥을 때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통스러운 표정이 가라앉았다. 알고 있다. 전장에서는 죽이는 만큼 이쪽도 누군가는 죽는다. 각오는 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고, 자신의 가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엇을 탓하겠는가.
그때 귓가로, 이시스의 목소리가 아른거리는 듯 했다.
‘원래 주신전은 조율자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인간을 뽑는 의식이기도 해. 수많은 시련을 겪게 될 거고, 그릇이 작다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버텨내기 벅찰지도 모르지. 어때? 넌 그 중압감을 견뎌낼 각오가 되어 있어?’
그 때의 그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로드는 이제야 실감했다.
‘더럽게 무겁네요, 여신님.’
로드는 씁쓸하게 웃으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브.”
“…네.”
로드가 몸을 바로 세웠다. 자책에 빠져있거나, 복수심을 불태우는 것 이전에, 머리를 차갑게 비우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번 전면전, 반드시 이기자.”
“……네!”
========== 작품 후기 ==========
Mr윤 / 오늘도 감사합니다 ^^
그랑엘베르 / 로즈안느는 로리와는 거리가 멀어요!
벌레 / 만능 키메라 시술;;
Speedwagon / ...! 그렇군!
프리워커 / 다음편에 잠시 나오고, 또 얼마안가 본격적으로 활약할듯 해요 ^^;
니알라토텝 / 뭔지 몰라서 검색해봤더니... 오, 맙소사...
MoriyaSuwako / 이분 뭘 좀 아시는 분
알테니아 / 먼 산을 봅니다. 단풍이 예쁘군요.
Xedrions / 검색해보니 헉, 러브라이브 안봤습니다;; 럽폭도로 몰아가시려 하다니!
아프게했어 / ...! 다 로드꺼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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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세상에! 이번 코멘트는 치엘로 중심인가 했더니 결말이 비월을 구해오는 거라��ㅋㅋㅋㅋㅋ
@火炎無 / 구글에 갓겜 검색하면 나온다는 그 갓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