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나라 -->
로드는 이브와 함께 하버트의 연구소에 방문했다. 하버트는 요즈음 왕궁에 얼굴 한번 비추지 않은 채 연구소에 틀어박혀 키메라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이곳은 몇 번을 와도 적응이 안 되네요.”
이브가 중얼거렸다. 로드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 특유의 꿉꿉한 냄새, 그리고 약품 냄새 같은 것이 섞여서 났다.
“그런데 하버트 소장은 바쁘다고 마중도 안 오는 걸까요? 여기서 길을 잃었다가 실험체가 되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
“그러게. 몇 번 와봐서 길이 익숙한 게 다행이네.”
두 사람이 기억을 더듬어가며 걸어가고 있는 그때, 검은 마력 덩어리가 로드의 앞으로 슉 날아왔다.
“헉!”
다짜고짜 들이닥친 공격에 로드는 반사적으로 바짝 엎드렸다. 그의 머리를 넘어간 마력 덩어리가 바닥에 부딪쳐 폭발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멍한 표정으로 뒤를 바라보았다.
“아, 오셨는지요? 폐하!”
하버트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어이쿠! 괜찮으십니까? 아직 녀석이 완벽히 통제가 안돼서요. 그러니까 진작 제 말대로 신체개조를 하면 걱정이 없잖습니까!”
“……방귀뀐 놈이 성낸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군.”
로드가 옷을 탁탁 털며 일어났다.
“…그런데 녀석이라니?”
“아! 두 분께서는 전장에 있으셔서 처음 보시겠군요! 소개합니다!”
하버트가 두 팔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우리 어비스의 비장의 신무기! 키메라 입니다!”
지하기지의 자욱한 어둠 속에서 맹수의 눈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것은 천천히 어두운 조명 쪽으로 다가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키메라인가.’
사족보행으로 엉금엉금 걸어오는 그것은 틀림없는 인간 여성이었다. 하지만 외형이 조금 달랐다. 피부는 창백해서 살짝 푸른빛을 띠었고, 신체 곳곳에 몬스터의 비늘 같은 것이 덮여 있었다. 손톱은 갈고리처럼 날카로웠고, 입에는 송곳니가 보였다. 등 뒤로는 작은 날개 같은 것이 붙어 있었는데 사용하지는 못하는 듯, 등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라 한다면, 머리 옆에 나있는 큼지막한 외뿔이었다. 삐뚤빼뚤 구부러진 모양이었다.
“폐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하버트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인간 여성은 무려 70%의 안정도 반응을 보였습니다! 실로 경이로운 수치에요! 검은 마력을 받아들여도 신체가 붕괴되지 않다니!”
“그것 보세요. 전설이 맞죠?”
“아아아! 70%라니! 과학은 위대하다아아아!”
자기 자신에게 몰두한 하버트는 이브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그녀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하버트! 저 녀석 왜 저래?”
로드가 키메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키메라는 이상한 괴성을 내지르며 입에서 검은 무언가를 꿀렁꿀렁 토해내고 있었다.
“아, 이런. 한발 쏘고도 방출량이 남아있네요. 건강한 녀석!”
하버트가 뿌듯한 표정으로 키메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게 건강한거라고?”
“네, 키메라는 계속해서 ‘검은 마력’을 몸에서 생성해 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마력체계와는 완전히 다르죠. 이 검은 마력을 수시로 방출해주지 않으면 신체가 버티지 못하고 붕괴합니다.”
“…으음.”
“자, 저길 향해 날리려무나.”
하버트가 손가락을 뻗자, 그걸 알아들었는지 키메라가 입을 벌렸다. 키유우우웅! 독특한 발포음과 함께 날아간 검은구가 저 멀리 지하 천장에 부딪쳤다. 기지 전체가 뒤흔들리는 울림이 발바닥을 타고 다리로 느껴졌다.
“…이, 이래도 되는 거야?”
“지반이 내려앉을지도 모르지만 당분간은 어쩔 수 없죠.”
“당분간은 같은 말로 때울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로드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대충 쏘아 보낸 것 같아도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검은 마력을 방출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개발 중입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힘을 사용한 키메라는 그제야 기분이 좋아진 듯 하버트에게 몸을 비비적거리며 아양을 떨었다.
“그래, 그래, 착하지. 두 분도 와서 만져 보시겠습니까?”
로드가 침을 꿀꺽 삼키며 키메라에게 다가갔다. 키메라가 ‘크릉!’ 소리를 내며 경계했지만, 하버트가 괜찮다는 듯 달래자 다시 얌전해졌다. 로드가 키메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키메라가 되면 원래 이렇게 지능이 떨어지는 건가?”
“검은 마력에 뇌가 잠식당해서 그런 듯 합니다. 차차 연구를 통해 나아지겠죠.”
“……흐음, 아! 그런데 린과 르네 자매는 어떻게 됐어?”
“직접 가서 보시지요!”
하버트는 저번에 같이 갔던 액체관이 쭉 진열된 방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린과 르네 자매는 마지막 지점에서 나란히 관에 누워 있었다.
린은 아까 마주친 키메라와 비슷한 외형이었다. 뿔이 달려 있고, 신체 일부분이 악마처럼 변화한 형태였다. 반면 르네는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린 것 외에는 엘프의 모습 그대로였다. 거의 변한 점이 없었다. 하버트가 설명했다.
“동생은 린 씨 쪽은 평범한 여성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높은 안정율입니다. 하지만 더 경이로운 것은 바로 언니 쪽인 르네 씨!”
“안정율이 얼마나 나왔는데?”
“99%입니다.”
“……!”
로드와 이브가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감히 말씀드리지요! 그녀는 가히 키메라가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사실상 키메라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네, 그녀가 전투 중에 폭주했었을 때 ‘검은 마력’을 내뿜었다고 했었죠. 그녀는 키메라가 되기 전부터 악마의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하버트가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이런 위대한 실험체가 언더하임에 제발로 굴러들어와 주다니! 실로 과학을 발전시키라는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 모두 외칩시다! 과학은 위대하다아아아!”
두 사람은 가볍게 무시했다.
“그런데 안정율이 99%나 되면서 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거죠?”
이브의 물음에 하버트의 표정이 급격히 시무룩하게 바뀌었다.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뭐?”
“시술은 실로 완벽했습니다! 검은 마력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신체도 완벽했어요! 그런데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액체관을 박차고 일어나 방방 날뛰어도 모자랄 건강 상태인데 말이지요.”
“……흐음.”
“아아, 슬프도다! 그녀가 깨어난다면 사상 최강의 키메라가 될 것인데!”
그러면서 안타까움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 하버트였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감정선이라고 로드는 생각했다.
“폐하!”
갑자기 하버트의 시선이 로드쪽으로 홱 돌아갔다. 그리고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달려들었다.
“폐하라면 이번에도 뭔가 번뜩이는 해결책을 주시겠죠?”
“……아니, 전혀 감이 안 와.”
로드가 그를 떼어내며 말했다.
“애초에 개발자인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크흡흡! 그럴 수가!”
키메라 부대는 곧 펼쳐질 게노세르크와의 전면전 까지는 준비가 다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린, 르네 자매 쪽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키메라가 된다한들 얼마나 강력할 것인지는 또 다른 의문이었다. 그녀들의 강함은 엘프였을 때의 강함. 키메라가 되어 싸우는 것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여러 의문과 고민을 품은 채, 로드는 연구소를 나왔다.
*
먼저 도착한 로드와 이브, 유니벨은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로드는 하버트의 연구소에 종종 방문하여 키메라의 상태와 그들의 전술 활용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였고, 더불어 이번 전쟁에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는 새로운 발명품들도 살펴 보았다.
특히 로드가 쓸만하다고 생각한 것은, 단 하루 만에 성체가 되는 넝쿨 식물이었는데 그 대가로 수명은 단 하루였다. 나중에 원구원에게 뒷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것은 연구소에서 개발하던 신 작물의 변종인데, 식물형 몬스터의 일종이라는 것이었다. 애초에 하버트가 몬스터를 식량으로 삼을 발상을 했다는 것에 로드는 다시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로드가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도중 게노세르크에 잠복해있던 스파이가 새로운 정보를 보내왔다. 게노세르크가 발트호른을 수복했다는 내용이었다.
말렉은 어비스군이 머물렀던 베틀린 시티와 오벨리스크에도 병력을 보내어 치안을 강화시켰고, 새로운 수인 영주를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말렉은 좀처럼 혼란스러운 정국을 유연하게 수습하지 못했다. 신관을 비롯한 수도의 정치형 영웅들이 이탈한 공백이 컸던 것이다. 로드는 자업자득이라 생각했다.
‘오판의 대가를 톡톡히 맛보라고, 말렉.’
말렉은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왕실에 등용하였으나, 갑자기 주요한 위치에 올라선 그들이 이 거대한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아질 기미 없이 마비되어가는 국정에 답답함을 느낀 말렉은 자신이 직접 내정을 주도하기로 했다.
말렉은 새로운 지침을 세웠는데, 바로 발트호른의 ‘인간 출입 통제령’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어비스 측의 혁명단 활동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발트호른에 살고 있던 모든 인간들은 강제로 영지 밖으로 쫓겨나야 했다.
이 명령의 이유가 어떻던, 일반 백성들이 보기에는 그저 수인과의 ‘차별 대우’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발트호른 뿐만 아니라 다른 거점영지에도 수인을 제외한 인간들의 검열이 크게 강화되어 부당대우라는 불만과 지적들이 속속 고개를 들었다.
이처럼 점령지의 여론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들은 어비스 점령 시절에 잠시나마 자유를 맛보게 되었으며, 그동안 얼마나 불합리한 생활을 해왔는지 알아버렸다. 말렉이 다시 자유를 빼앗고, 거기에 전보다 더 강한 압박을 가해오자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그들을 달래고 진정시키는 쿠션역할을 해왔던 왕실 문관들도 이제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투형 군주인 말렉이 취할 수 있는 수단은 하나뿐이었다. 불만을 외부로 돌리는 것. 즉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전쟁준비를 서두르는 것이었다.
말렉은 어비스군이 게노세르크에 왔을 때 펼친 만행을 과장되게 퍼뜨리고, 그들을 심판하러 갈 것이라며 전 영토에 전시상황을 선언했다.
또한 말렉은 명령에 불만을 가지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을 본보기로 처형한 후, 징집을 개시하고 극단적인 병사 훈련을 시키거나 노역으로 동원하는 등 국민들이 불만을 품을 시간 자체를 없애버렸다. 그리고는 전쟁 준비를 척척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사실은 곪은 상처를 소독하지 않고 봉합한 것이나 다름없는 처리였고.
결국에는 일이 터졌다.
“나, 베틀린의 공주 로즈안느는 ‘베틀린 공국’의 건립을 선언하노라!”
다름아닌 로즈안느를 중심으로 한 베틀린의 돌발 독립 선언이 벌어졌다. 이 뉴스에 대륙이 발칵 뒤집어졌다. 당사국인 게노세르크 진영에서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소리였다. 난데없이 독립에 반란이라니?
말렉은 웃기지도 않는 소리라며 그들의 공국 인정 요구를 일축하고, 휘하 영웅 타나토스에게 4천 병력을 주어 베틀린 시티를 공격하게 했다.
로드는 고작 1500명으로 간단하게 점령한 성이었지만 베틀린 시티는 더 이상 만만하지 않았다. 사실 병사들 모두 〈혁명의 바람〉으로 인한 ‘혁명군’상태였으며,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적과 맞서 싸웠다. 나흘간의 시가전 끝에 타나토스는 압도적인 전력 차임에도 불구하고 절반의 병력을 잃는 희생을 치르며 베틀린 시티를 점령했다.
로즈안느파는 이 패배에 포기하지 않고 다른 거점영지와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국민들의 혁명을 호소했다. 로즈안느가 작곡한 노래 '자유의 아침'은 마을아이들의 입을 타고 영지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타나토스가 남은 병력들을 이끌고 잔당 청소를 위해 움직였지만, 로즈안느의 혁명군들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결국 말렉은 타나토스를 불러들였다. 전면전을 앞둔 상황에서 송사리를 상대로 시간을 더 끌어봐야 의미가 없으며, 발트호른만 굳게 지킨 채 어비스를 잡으면 상황은 알아서 풀릴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물론 이런 간언은 할 인물은 게노세르크 안에는 더 이상 없었고 타국의 왕인 콜린의 생각이었다.
타나토스가 물러나고 로즈안느는 다시금 베틀린 시티를 점령했다. 그녀와 측근들은 그 어떤 나라도 해내지 못한 성과, 게노세르크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고 선언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렀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마침내 말렉이 재출전을 선언했다. 3천 병력 이상을 발트호른에 남겨두고, 9천 병력을 이끌고 플랫랜치로 올라왔다.
말렉이 움직이면서 오펙투스와 백제 역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 맞서 로드도 병력을 움직였고, 치엘로와 올리버에게도 연락해 마찬가지로 병력을 이끌고 집결하도록 했다. 드디어 진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는 물러나지 못해.’
전면전의 때가 다가왔다. 워프게이트 전략으로 전력의 밸런스는 어느 정도 맞추었다. 당연히 ‘패배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동맹 전쟁이 끝내 여기까지 왔다.
‘이 때가 아니면 게노세르크는 꺾을 찬스는 영영 없을거야. 반드시 이긴다.’
6개국이 한 자리에서 맞붙는, 에덴 역사상 유례없는 전쟁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다음화부터 바로 3:3 전쟁씬에 들어갈듯 한데요. 방대한 전쟁씬 준비를 위해 하루 이틀정도 휴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ㅠㅠ 더 좋은 퀄리티를 위함이니 금방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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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시키이로하스 / 히익; 말렉 안티분
푸른물결2 / 결국엔... ㅠㅠ
아프게했어 / 맞는 말씀입니다!
벌레 / 그렇게 어비스는 성형수술의 메카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알테니아 / ㅋㅋㅋㅋㅋㅋ... 너무 먼산을 봤나 봅니다 하�K;
니알라토텝 / 신관의 목숨이 걸려도 눈 꼼짝 안하시는 분;
그랑엘베르 / 여포라! 확실히 이미지가 비슷하군요! 그래도 여포는 나름 자기 밑의 인재는 아꼈지 않나요?
Speedwagon / 여캐 죽이면 폭동 일으킬거잖아요...
학교만12년째 / 지금 있는 전력을 끌어모은거죠. 내정은 노답상황
프리워커 / ㅋㅋㅋㅋ 피는 피로 갚는법...
@책읽는고래 / 빠른 고인 취급 ㄷㄷ
@이렐리가없어 / 아뇨, 로리아니신 분들도 많습니다! 빽!
@로리콤MK / 그러게요.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측근인데
@SW스윈 / 로드도 정에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여버렸네요.
@...(-1)... / 말렉의 최후가 거시기말살킥이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