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협동전 -->
어비스 본진 뒤편의 숲에서도 전투가 한창이었다.
울타리를 장벽삼아 버티던 경비병들이 늑대인간들의 습격에 맥없이 쓰러져 갔다.
“…큭!”
“뭐가 이렇게 빨라?”
어비스군 병사들은 적의 신묘한 용병술에 휘말리고 있었다. 한쪽에서 낭인병들이 모습을 드러내 시선을 빼앗으면, 여지없이 반대쪽에서 기척을 숨기고 다가온 낭인들에게 당했다. 정면에서 늑대의 울음소리에 시선을 끌린 사이 나무 위에서 내려온 적에게 덮쳐지기도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첫 번째 울타리가 뚫렸으며, 두 번째 울타리 또한 낭인병들에게 돌파당할 위기였다.
“으으, 젠장!”
어비스군 병사 하나가 창을 꼬나 쥐고 낭인병에게 달려들었다. 그 낭인병은 방금 막 쓰러트린 상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까앙!
힘껏 내지른 창이 쇳소리와 함께 튕겨나갔다. 두 사람의 정면에 끼어든 또 하나의 낭인병이 발톱을 휘둘러 막아낸 것이다. 그는 공격을 튕겨내자마자 바짝 몸을 낮추었고, 그 즉시 후미의 낭인병이 몸을 던져 병사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장군! 2차 울타리가 뚫렸습니다!”
“젠장! 3차! 3차로…… 크아악!”
군졸, 무장 할 것 없이 낭인병들의 척척 맞아떨어지는 협공에 가을 낙엽처럼 속절없이 쓰러져갔다.
낭인병들은 병사 개인으로서의 전력은 그리 대단하진 않지만, 같은 낭인병들과 독립군으로 움직일 때 진정한 진가를 발휘하는 특화병종이었다. 그들은 동료의 기척을 먼 곳에서도 느낄 수 있었으며 손짓 발짓 만으로도 수많은 정보를 공유하는 전쟁의 프로들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특화병종의 효과로 서로 같은 시야를 공유했다. 이것이 낭인병들의 완벽한 협동 플레이가 나올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낭인병들을 이끄는 리더는 검은 털의 늑대인간, 타나토스였다. 그가 병사의 몸에 박아 넣은 발톱을 뽑아내며 앞을 바라보았다.
“저 앞에 보이는 것이 마지막 울타리렷다.”
타나토스가 손가락을 몇 번 구부리다 펼치는 것으로 신호를 보냈다. 주위에 있는 낭인병들이 그 모습을 보았고, 그 장면은 멀리 떨어진 낭인병들에게로까지 전달되었다.
낭인병들은 수풀에 몸을 숨기고 천천히 다음 울타리로 전진했다. 이제 세 번째 울타리만 넘으면 바로 어비스의 본진이었다.
‘마지막 울타리는 누가 지키고 있나?’
타나토스가 은밀한 동작으로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정면을 응시했다. 휘이익! 고개를 내밀자마자 화살이 머리 쪽으로 날아왔다.
“아, 그래. 네놈들이었군.”
타나토스가 화살을 쳐내며 말했다. 세 번째 울타리를 지키는 자들은 어비스의 ‘수인연합회’였다. 정면에는 클랜장인 팬더 수인 스노노가, 그 주위에는 사슴, 토끼, 고릴라 등 다양한 수인들이 무기를 쥔 채 버티고 있었다.
“…인간 측에 붙은 정신 나간 수인 무리의 소문은 들은 적이 있다만, 직접 봐도 이해가 안 되는 꼴이구나. 어째서 수인이 인간들과 함께 있지?”
“스노노! 친구를 지킨다!”
스노노가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친구라고? 헛소리 집어치워라, 꼬마. 인간은 적이다!”
타나토스가 으르렁거렸다.
“인간이 수인들에게 어떤 횡포를 저지르는지 모르는가? 놈들이 우리를 붙잡아 어떻게 거래하는지를? 어떤 용도로 쓰는지를? 진실은 너희 대륙 수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말에 스노노가 악몽이라도 떠오른 듯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마틴 아저씨, 무섭다. 마틴 아저씨, 우리 친구들 납치한다.”
“하하하! 그것 보아라! 그게 인간들의 본성이다. 피부색, 말투, 심지어 다른 지역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선을 긋지. 차이를 전혀 인정하지 못하는 놈들이야. 인간들과 수인은 절대 공생할 수 없다!”
“……응? 하지만 그 말은 이상하다.”
스노노가 말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 설마 인간들 중에서도 좋은 자들이 있다. 모든 인간들이 그런 건 아니다. 같은 뻔한 헛소릴 지껄이려는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
스노노가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인간인데?”
“……뭐?”
깊은 정적이 일었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한마디에 타나토스는 완전히 말문이 막혀버렸다.
“스노노도 인간! 친구들도 인간! 우리 모두 하나야!”
“크큭, 크하하하하! 이 정신 나간 팬더놈아! 인간 놈들에게 세뇌라도 당한 것이냐? 수인이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겠나!”
“까만 늑대 친구야 말로 이상하다.”
스노노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다. 다른 건 생김새뿐이다. 생각하고, 말하고, 잠자고, 그리고 모두 꿀 케이크 좋아한다. 왜 편 가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인간 놈들에게 완전히 물들어 버렸군. 말이 통하지 않는구나.”
타나토스가 이빨을 드러내며 몸을 낮추었다.
“같은 동족이라 자비를 베풀어주려 했건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좋아하는 인간 놈들과 함께 지옥에 떨어져라!”
그가 스노노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울타리에서 화살들이 날아왔지만 네 발로 뛰는 타나토스는 가뿐하게 경로를 바꾸어 피해냈다.
스노노의 좌우에 있던 수인연합회의 늑대인간 두 사람이 창을 들고 나섰다.
“하! 네놈들이 정녕 늑대냐!”
타나토스가 다가오는 창을 발톱을 휘둘러 박살내며 나머지 한 낭인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인간의 무기! 인간의 갑옷! 인간의 무술로 무엇을 한단 말이냐! 우리의 발톱, 우리의 송곳니로 싸워라!”
나머지 하나 남은 낭인도 가뿐히 베어 넘긴 타나토스가 부하들에게 돌격명령을 내렸다. 대기하고 있던 낭인병들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달려왔다.
“깨갱!”
땅 아래에서 솟아오른 밧줄이 한 낭인병의 뒷다리를 붙잡고 나무위로 끌어 올렸다. 땅이 움푹 파지는 구덩이도 있었다. 곳곳에서 깨갱거리는 소리가 쏟아졌다.
“……함정? 이 비열한!”
타나토스만이 최전방에서 화살들을 피해 다니며 연합회 병사들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그가 일순간 병사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스노노에게 달려들었다.
“그만 죽어라!”
스노노는 물러서지 않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 수인 유술, 벽력장.
스노노가 얼음장을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지면을 타고 다가와 손바닥을 내밀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에 타나토스는 공격에서 두 팔을 앞세우는 수비자세로 변환했다.
터엉!
손바닥에 부딪친 그의 몸이 멀찍이 날아가 나무에 부딪쳤다. 콰직! 큼지막한 나무 한 그루가 통째로 쓰러졌다.
“……크으윽, 감히!”
“스노노! 친구들을 지킨다!”
스노노가 결연한 얼굴로 전투 자세를 취했다.
*
“자기, 오늘 밤에 뭐해?”
“어디 출신이야?”
마녀들이 던지는 추파를 받으면서 켈타인 본진을 뛰어다니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어비스의 전령이었다.
‘이러다 늦겠는데…….’
얼른 켈타인의 왕을 찾아 임무를 완수해야 하건만, 야영지의 마녀들이 끊임없이 말을 거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관심도 마냥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마녀들은 이런 식으로 남자들을 유혹해 데려다가 흑마법 실험체로 쓴다는 소문을 종종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어, 실례합니다.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죠?”
결국 켈타인 본진에서 길을 잃은 전령은 마녀와 이야기를 섞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자신에게 관심이 적어보이는 어린 마녀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저기 위에.”
그녀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전령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달려 나갔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 있었다. 날이 밝으며 새벽안개는 모두 걷힌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이 부근만 가득했다. 전령은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우우우우…….”
안개 속을 해매는 도중 난데없이 이상한 동물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왠지 분위기가 으스스했다. 전령은 침을 꼴깍 삼키며 주위를 살폈다. 안개 속에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우우우…….”
순간, 안개를 뚫고 큼지막한 눈동자가 다가와 전령을 바라보았다. 전령은 너무 놀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것은 몸길이가 5미터를 넘는, 거대한 괴물 하마였다. 하마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히, 히익!”
“잠깐, 잠깐, 그만둬. 호빵아.”
어디선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하마가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얌전해졌다. 하마의 등 위에 보랏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올라타 있었다.
“후훗, 누구신가요?”
그녀가 물었다. 거대한 하마와 소녀, 평범한 조합은 아니었다.
‘……이 사람이 치엘로!’
전령이 벌떡 일어나서 경례를 취했다.
“어, 어비스의 전령입니다. 폐하! 중앙에서 보고 드립니다! 어비스 중앙군이 폭주한 수인들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진의 후방에는 낭인병들로 추정되는 무리가 습격해왔습니다.”
“……흐응.”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로드 오빠의 전언은요?”
“로드 오빠……? 아! 폐, 폐하께서 따로 말씀하신 내용은 없습니다. 저는 그저 상황 전달 차원에서…….”
“그런 거라면 앞으로는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우리는 우리들의 눈으로 상황을 보고 있으니까요.”
“아! 그, 그렇습니까?”
“그래도 마침 잘됐네요.”
그녀가 ‘웃차’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따로 지원군 요청은 없었댔죠?”
“예.”
“그럼 아직 버틸만하다는 거니까, 지원군 대신 우리가 해야 할 건…….”
그녀가 우아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전령은 흑마법이라도 쓰려는 걸까 생각하며 잔뜩 긴장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로드 오빠에게 전해주세요. 본진에 기마대를 준비하고 있으라고.”
“그, 그 말씀은?”
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반격이에요.”
*
“폐하! 폭주한 수인들이 아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폐하! 좌익측에 지원 요청이…….”
“폐하! 루딘 장군이 전사했습니다! 후임 지휘관을…….”
게노세르크 동맹군의 총사령관인 콜린은 몸이 열 개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카드를 소모해 적진을 흔들어댄 건 우리 팀인데, 왜 내가 더 바빠져야 하는 거지?’
지침을 들으러 쪼르르 몰려든 부관들을 모두 보내고, 콜린은 피로 가득한 표정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리곤 잠시 한숨 돌리며 상황을 분석해 보았다.
‘……생각해보면 말렉의 작전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었다.’
맹수 수인들을 폭주시켜 전방에 시선을 집중시킨 다음, 후방에는 숲에서도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는 낭인병들을 보내 흔들기를 시도한다. 발상 자체는 훌륭했으나 어비스 측의 대처가 너무 좋았다. 특히 병량을 싣는 소들을 돌격시킨 전략은 깜짝 놀랄 만큼 파격적이었다.
‘순수한 병법의 성향을 띠는 전략이다. 게이머인 로드의 머릿속에서 나온 건 아니겠지.’
아마도 중앙을 지휘하는 어비스 측 여군사의 책략일 것이다. 경계해야 할 대상이 하나 더 늘어버렸다.
콜린은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자신의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부관, 파티스펠의 준비는?”
“70% 정도 완료됐다는 보고입니다.”
“좋아.”
조금만 더 버티면 다시 전황을 뒤집을 수 있다.
그렇게 콜린이 전방에 전할 새로운 지침을 전령에게 설명하고 있는 중이었다.
‘…뭐지?’
콜린이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땅에서 미약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병사들도 미세한 진동을 느꼈는지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흔들림은 우익 오펙투스군 쪽 방향… 아니, 그보다 더 위쪽. 저긴 산인데…….’
콜린의 눈이 부릅떠졌다. 나무 사이로 무언가가 보인 것이다. 가파른 산언덕을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무리들.
“모, 몬스터다!”
“적이다! 무기를 들어라!”
전령이 허겁지겁 다가와 보고했다.
“폐하! 다수의 몬스터들이 우리군 우익을 향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콜린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모, 몬스터라고?’
오랫동안 아로게쓰 사람들을 괴롭혀온 생태계의 파괴자이자 산의 새로운 지배자.
그들은 다름 아닌 ‘마운틴 고블린’들이었다.
========== 작품 후기 ==========
독자님들의 여러 조언을 받아 소설 제목을 '주신전 - 문명게임'으로 변경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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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시키이로하스 / 말렉 안티가 많군요ㅋㅋ
알테니아 / 허허... 자세한 것은 나중 편을 봐주세요~!
지리산의늑대 / 캘로그에서 호랑이 전골로 요리가 진화했군요
로리콤MK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찰진 드립 ㅋㅋㅋㅋ
Speedwagon / 역시 티아!
llSongOfBladell / 지적 감사합니다. 낭인병의 등장에 놀라는 연출에 집작하다가 살짝 틀어졌네요.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spadel / ㅁㅊ놈 보정이라니 ㅋㅋㅋㅋ
니알라토텝 / 무려 신이 개입하는 겁니까; ㅎㄷㄷ
아프게했어 / 그렇게 수인들은 포식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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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륀하르트 / 주요 나라들은 정리 준비중입니다. 본편에 치여서 속도가 더디지만 ㅠㅠ 완성되면 올려드릴게요!
@Polrais / 네! 그 후속작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