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139화 (139/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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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말렉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 스스로도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눈앞의 소녀에게 자신이 밀리고 있었다.

베아트리체의 몸이 유령처럼 잔상을 남기며 돌진해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그녀에게 말렉은 마력이 실린 주먹을 내질렀으나, 그녀는 몸을 연체동물처럼 유연하게 구부려 피해냈다.

‘……!’

촤아아악!

말렉의 다음 주먹보다 그녀가 다가와 검을 휘두르는 것이 더 빨랐다. 음침한 잿빛 검격이 말렉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빼 아슬아슬하게 치명상은 피했지만, 가슴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말렉은 이에 밀리지 않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주먹을 잽처럼 빠르게 날렸다.

후우웅! 그의 주먹이 베아트리체의 몸을 그대로 통과하여 지나갔다.

회심의 반격을 유체화로 가뿐히 넘겨 통과한 베아트리체가 빙글 몸을 돌렸다. 유체화가 풀리자마자 휘둘러진 검격이 등에도 검상을 만들어 냈다. 말렉은 혀를 찼다.

‘움직임이 좋아졌다. 아니, 그보다는 움직임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있군. 그리고…….’

말렉이 자신의 가슴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베아트리체의 검에서 나는 것과 똑같은 잿빛 연기가 희뿌옇게 올라오고 있었다.

‘상처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

호인의 재생력이 통하지 않는다. 더 이상 무적이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말렉은 살짝 소름이 끼쳤다. 지금껏 생각해 본 적도 없던 ‘패배’의 가능성이 수면 위로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 좋아! 좋아! 좋아!”

흥분한 말렉이 괴성을 내지르며 돌진했다. 그리고 그가 돌진하는 것과 같은 거리를 베아트리체가 물러나며 검을 일자로 내리그었다.

- 귀곡성(鬼哭聲).

‘아아아아아아!’ 그녀의 검신에 붙어있던 끔찍한 비명소리의 힘이 뭉쳐져, 잿빛 검기의 형태로 방출되었다. 말렉은 대경실색하며 몸을 던지듯 피해냈다. 콰아아아앙! 지면이 짓뭉개지며 땅이 갈라진 자리에 말렉의 상처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말렉이 몸을 일으키는 동안 베아트리체는 다시 검지를 입술 위로 가져다댔다. 이번에도 알 수 없는 주문을 빠르게 중얼거린 그녀가 손가락을 검신에 대고 훑었다.

“끼야아아아아악!”

방금 전과는 목소리가 달랐다. 이번엔 찢어질 듯한 여자의 울부짖음이었다. 베아트리체가 검을 들어 올려 전투 자세를 취했다.

“크하하하! 재미있게 해주는구나!”

회복이 되지 않는 무상성의 공격. 말렉은 그녀를 ‘까다로운 적’으로 인정했다. 본능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말렉은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편이었다. 굳이 정보가 없는 미지의 힘과 맞붙을 이유는 없었기에, 근접전을 포기하고 정권자세를 취했다.

타앗!

베아트리체 쪽에서 먼저 비명을 지르는 검을 이끌고 달려들었고, 말렉은 허공에 주먹을 질렀다. 정면으로 뻗어나간 충격파와 그것을 유체화로 통과한 그녀. 이 전개는 전과 동일했다.

‘유령화 소모.’

‘발경 소모.’

서로의 가장 까다로운 기술을 소모시킨다는 두 사람의 노림수도 동일했다. 물리계로 돌아온 베아트리체는 땅을 박차고 달렸고, 말렉은 주먹을 쥐어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이 힘을 쓰는 방법은 정권만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곤 힘껏 땅을 내리쳤다.

쿠구구구구구! 마법사들의 마법인 어스퀘이크(Earthquake)처럼, 그녀가 딛고 있는 지반이 통째로 갈라지고 뒤집어졌다. 날카로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예상치 못한 범위 공격이었으나 베아트리체의 대응은 더 기가 막혔다. 그녀는 끝이 튀어나온 끄트머리 부분만 밟고 좌우로 휙휙 도약하며 나아갔다. 불쑥 불쑥 솟아올라 시야를 가리는 돌기둥 때문에 말렉은 한 순간 그녀의 위치를 놓쳤다.

스릉!

눈앞의 돌에 실금이 그이더니 깨끗한 단면을 보이며 갈라졌다. 그 검격은 말렉의 몸까지 닿아있었다. 상처가 벌어지며 빨간 선혈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상처에는 잿빛 연기가 일렁거렸다.

‘큭!’

베아트리체가 지면을 박차고 도약해왔다. 말렉이 바로 반격하려는 찰나, 머리가 핑! 돌며 주위가 흐릿하게 변했다. 균형 감각이 사라졌는지 발을 헛디뎠다. 똑바로 서 있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비명소리였다.

‘끼야아아아아악!’

베아트리체가 이능을 사용할 때 잠시 들렸던 그 여자의 괴음이, 검에 베이는 순간 귀 앞에 대고 외치는 듯 생생해졌다. 말렉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날렸으나 타겟인 베아트리체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주먹이 뻗어나갔다. 베아트리체의 검격이 그의 가슴을 베고 지나가며 X자 상처를 완성시켰다.

“빌어먹을!”

이번에는 감각에 혼란을 주는 저주에 걸린 것 같았다. 말렉은 ‘혼란계 효과’라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눈을 감았다. 다른 감각은 차단하고, 오로지 마력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후우우웅!

말렉은 주먹을 뻗으며 동시에 눈을 떴다.

“……!”

방향은 맞았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공중에서 뒷돌기를 한 아치형의 자세로 주먹의 바로 위를 감싸듯 빠져나가고 있었다. 기묘한 회피기에 말렉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타악. 착지한 베아트리체가 검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기운을 갈무리했다. 검을 치켜세운 그녀가 이어지는 동작으로 크게 휘둘렀다.

- 귀곡성(鬼哭聲).

“끼야아아아아악!”

검신에서 빠져나간 잿빛 검기가 말렉의 앞으로 쇄도했다. 주먹을 내지르고 있는 이런 자제로는 피할 수 없었다. 완벽한 피니쉬였다.

쐐애액!

말렉은 자신의 패배를 결정짓는 일격을 눈앞에 둔 순간, 아찔함을 느꼈다.

그리고 전율했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

갑자기 광소를 터뜨린 말렉이 끔찍한 저주 덩어리를 향해 스스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파학!

무려 맨손으로 검기를 붙잡고 좌우로 떨쳐내어 찢어 버렸다. 액체처럼 흐물해진 저주가 말렉의 몸에 그대로 끼얹어졌지만 그는 신경을 두지 않고 동작이 굳어있는 베아트리체에게 돌진했다.

쿵!

그가 베아트리체의 몸을 깔아뭉개고 두 무릎으로 그녀의 양 팔을 눌렀다. 그녀를 제압하자마자 말렉은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극한의 고통이 몰려들며 그가 고통스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저주 덩어리에 통째로 노출되어 버리자, 그의 정신은 붕괴 직전까지 와 있었다. 세계 전체가 회전하는 공 마냥 빙빙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은 수백, 수천 번을 회전하고 있었다.

“끄윽! 끅! 끄으으!”

이대로는 미쳐버릴 것이다. 그는 남아있는 모든 집중력을 발휘하여 지휘관 창을 열었다. 허공에 헛손질하거나 실패하여, 몇 번이고 지휘관 창을 끄고 켜는 것을 반복했다.

- Yes. 선택된 지역에 〈강제 폭주〉스킬이 사용됩니다.

결국 사용에 성공했지만 오늘 하루만 쓴 ‘강제 폭주’스킬 사용만 세 번이었다. 어마어마한 비용과 리스크가 있는 기술이었지만 지금의 말렉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스킬이 발동되며, 여자의 비명소리가 정신을 긁어대는 와중에도 분노가 가슴속에서부터 끓어올랐다.

‘분노해라. 분노해라.’

그는 모든 신경을 분노에만 집중시켰다. 제압한 베아트리체의 얼굴 위로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내게 이런 고통을 안긴 적에게 분노해라.’

분노는 조금씩, 서서히 다른 감정을 장작으로 삼으며 활활 타올랐다. 그렇게 그 자세로 십 분이 지난 후에야, 말렉은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

베아트리체는 덤덤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정신이 망가진다면 그녀의 승리, 되돌아온다면 그의 승리일 것이다. 그때 초점이 풀려있던 말렉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크흐, 큭, 크하하하하하하!”

그의 입꼬리가 잔혹하게 올라갔다. 그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고 분노는 말렉 본인이 통제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내가 이겼구나! 꼬마!”

잠시 짜릿한 승리에 심취해 여운을 즐기던 그가 정신을 차리고 베아트리체를 내려다보았다.

“크흐흐, 이제 네 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응?”

베아트리체는 체념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말렉이 사악한 미소를 띠었다.

“아, 그래!”

말렉이 그녀의 두 팔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이렇게 보니 소녀와 거인 같은 덩치 차였다. 그녀가 저항하려 했지만 말렉의 자비없는 주먹이 복부에 꽂혔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린 베아트리체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어서 죽여.”

“크흐흐!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야수화로 시뻘게진 말렉의 눈이 확대되듯 떠졌다.

“죽이든 살리든 패자의 최후는 승자가 결정한다.”

말렉이 걸음을 옮긴 곳은 유니벨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곳이었다. 베아트리체의 눈이 부릅떠졌다.

“……당신!”

“크하하하하! 그래, 그래. 이제 좀 재미있는 표정을 보이는구나.”

말렉의 다른 손에는 베아트리체가 썼던 검이 들려 있었다. 그녀가 파르르 떨며 애원조로 말했다.

“……제발 그만둬. …나 하나로 충분하잖아요.”

말렉은 피식 웃더니 덜렁거리는 그녀의 몸을 자신의 얼굴 앞으로 향하게 했다.

“잘 들어, 꼬마야. 애석하지만 지금 널 죽일 생각이 없다. 넌 이세계에서 나를 가장 고전케 한 상대야. 자칫 내가 졌을 수도 있었지. 이런 재미있는 장난감을 간단히 죽이면 쓰나? 널 살려주는 대신…….”

말렉의 입가에 히죽거리는 미소가 걸렸다.

“네 친구를 네가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죽일 거다.”

“……!”

“어떤 최후를 상상하든, 그보다 더 한 최악의 죽음을 보여주마. 너는 살겠지만 친구를 구해내지 못했던 무력감, 그리고 나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겠지. 그래, 바로 그 표정처럼 말이야!”

말렉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시 내게 도전해라. 농축된 분노를 내게 힘껏 맞부딪쳐 보아라! 그리고 다시 좌절하는 거지! 크흐흐, 크하하하하!”

말렉이 행복에 겨운 얼굴로 몸을 떨었다.

“……제발! 리체는 안 돼!”

“좋아, 좋아.”

말렉이 검을 들어올렸다.

“일단 네 입에 친구의 팔부터 물린 다음 생각해보자꾸나.”

“그마아아아안!”

베아트리체의 내제되어 있던 밴시의 힘이 폭발했다. 저주가 비명의 형태로 분출한 것이다.

“커헉…!”

뇌를 직접 뒤흔드는 강렬한 충격에 말렉이 베아트리체를 놓쳤다. 바닥에 떨어진 그녀가 재빨리 반격하려는 찰나, 말렉의 펀치가 먼저 그녀의 안면을 강타했다. 땅이 갈라지며 베아트리체의 몸이 지면에 박혔다. 말렉이 숨을 헐떡이며 입가를 훔쳤다.

“놀랐잖아. 이제 정신계열 공격은 지긋지긋하다고.”

그가 베아트리체를 다시 들어올렸다. 뺨을 몇 번 때려보았지만 깨어나지 않았다.

“이런, 너무 강했나?”

말렉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지금은 전쟁 중이니 마냥 그녀가 깨어날 때가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수 없이 처참하게 으깨진 친구의 시체위에서 눈을 뜨는 연출로 바꾸기로 했다.

말렉이 검을 쥐고 상체를 일으키려는 순간.

우우우우우웅!

하늘이 열렸다.

“……또 뭐야?”

말렉의 시선이 무언가에 이끌리듯 위로 올라갔다.

처음엔 무감정하던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전율로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두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 시각 로드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로드는 떨리는 주먹을 꾹 쥐었다. 여러모로 긴가민가했지만, 결국 하버트가 해낸 듯 했다.

이걸로 마지막 조커 카드까지 수중에 들어왔다.

“하아아, 드디어 왔구나.”

하늘에서 악마가 내려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로리콤MK / 1등 축하! 아무래도 평범한 힘은 아니죠

난누군가 / 옙, 감사합니다!

Mr윤 / 일단은 B+!

백사열 / 다음편 여기요!

Luaian / 넵? 무슨 말씀을?

Leessa / 저도 동감이네요; 순효과를 기대하는 정도였는데 대박이 날줄은...

Speedwagon / 성인버전...?!

시크병장 / 그럼 저도 죽을 위기에 처해서...

바람색 / 감사합니다 ^^ 앞으로도 즐감해주세용!

니알라토텝 / A급이면 말렉과 동급... 지금은 B+로 만족해 주시길 헉;

火炎無 / 내일만 하면 예비군 끝입니다! 엉엉

로아리아 / ?! 몹시 바람직한 전개로군요.

빛과하늘 / 그것은 이 다음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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