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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전 문명게임-148화 (148/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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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전쟁이 쉬웠어요

<차라리 전쟁이 쉬웠어요.>

날이 밝자 세 나라의 군대는 각각 흩어져 본래의 영토로 복귀했다. 단 하루 동안의 전쟁이었지만 병사들은 역대 전쟁을 통틀어 최고로 힘들었다며 입을 모았다.

그렇게 플랫랜치를 점령하러 간 키리안과 전사 연맹을 제외한 모든 어비스군이 언더하임에 복귀했다.

병사들은 하루 만에 끝난 전쟁에 만세를 부르며 휴식을 위해 집으로 달려갔지만, 가신들은 그러지 못했다. 전쟁보다 더 끔찍하고 힘든 내정이라는 새로운 전쟁이 남아 있었다.

“……죽여줘….”

로드가 산처럼 쌓인 서류의 책상에 엎드리며 중얼거렸다.

“…이브.”

“네, 폐하.”

그녀는 지친기색도 없이 기계처럼 서류를 척척 검토하며 로드의 말에 대답하고 있었다. 내정의 프로다운 내공이 엿보였다.

“대륙을 통일하고 황제가 되어봤자, 다 쓸모없는 일이 아닐까? 그냥 지금보다 일이 스무 배로 늘어날 뿐인 거잖아. 으아아아…….”

“…정신 차리세요. 폐하.”

로드는 자신이 처리해야 할 방대한 양의 서류를 보았다. 할 일이 징그럽게도 많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최우선으로 맞닥뜨린 과제부터 수행하기로 했다.

“이브, 애니를 좀 불러줄래?”

벌컥!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옷장 문이 열리며 사람이 스프링처럼 튀어나왔다. 그는 허공에서 요란하게 공중제비를 두 바퀴 돈 다음, 한쪽 무릎을 꿇으며 착지해 팔을 척 뻗었다.

“소신, 애니록스! 등장입니다!”

“…….”

“…….”

로드와 이브가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가출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아침 잘못 먹었니?”

“아닙니다. 전 무척 정상! 100% 정상이에요!”

“갑자기 왜 안하던 짓을…… 그보다 언제 거기 들어가 있었던 거야?”

그 물음에 애니록스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아까 인사하면서 들어왔는데… 두 분 모두 업무 중이라 눈치 못 채셨습니다.”

“……아하.”

“아무튼! 저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더 이상 남들에게 공기 취급당하지 않을 겁니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부터 제 존재감을 적극적으로 어필할 겁니다!”

‘……그러니까 관심종자가 되겠다는 거구만.’

로드가 한숨을 쉬었다.

“일이나 하자. 알브헤임 쪽의 방비는 어때?”

애니록스가 주섬주섬 서류를 꺼내들며 입을 열었다.

“그들끼리 새로운 지도자를 뽑았구요, 수도 위그드라실에 극단적인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고 합니다. 인간들에게 세계수를 내줄 수는 없다는 신념하에 똘똘 뭉쳐 있어요.”

“……흐음.”

로드가 골치 아프다는 듯 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플레이어가 없는 토착세력으로 전락했다지만 그들에게 시간을 너무 많이 줘버린 듯 했다.

‘플로라가 죽고 엘프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확 밀어버리는 편이 가장 좋았겠지만, 상황 상 어쩔 수가 없었으니…….’

생각에 잠겨있던 로드가 다시 물었다.

“그럼 발트호른 쪽은 어때?”

“그곳도 그곳 나름대로 문제가 생겼습니다만…….”

“뭐가?”

“직접 보시는 게 빠르겠군요.”

라고 말하며, 애니록스가 메모리얼 수정구를 꺼내 로드의 책상에 놓았다. 정보부원이 녹화해둔 영상이라고 했다.

영상이 실행되자 로드의 입가가 딱 벌어졌다. 난리도 아니었다. 수인들끼리 죽고 죽이는 학살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게노세르크의 멸망 보너스가 내게 넘어오면서, 수인들을 통제하던 권능 효과가 사라졌으니까 이런 혼란이 벌어진거군.’

애니록스가 부연 설명을 했다.

“혁명단이 수인들을 상대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주목한 분쟁이 바로 ‘초식 수인과 육식 수인과의 갈등’이었습니다. 혁명단은 초식 수인들의 편에 서서 말렉을 위시한 육식 수인들과 맞섰죠. 반란은 진압됐지만, 말렉이 죽은 이후 두 세력의 분쟁이 다시 심화된 겁니다. 현재 발트호른은 혼란의 무법지대가 됐고, 힘없는 수인 주민들은 서둘러 영지를 벗어나는 중이라 합니다.”

로드가 끙 소리를 냈다. 게노세르크는 앞으로 그가 쭉 통치해야 할 핵심 영토였다. 더 심각해지기 전에 시급히 상황을 진정시켜야했다.

“발트호른의 방비는 어때?”

“위협적인 수준은 아닙니다. 성문을 돌파하는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마 그 이후가 문제겠지만요.”

“……그렇군.”

어비스가 게노세르크의 영토를 획득해 지휘관 창의 권능 효과가 적용되면 상황이 더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로드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누굴 보내야 하지?’

전투를 위해 보낼 무장은 많다. 하지만 로드가 고민하는 것은 게노세르크의 영토를 관리할 인물이었다. 혼란에 빠진 무법지대를 안정화시키려면 어마어마한 노력과 관리가 필요하다. 평소처럼 대충 클랜장 중 한명을 보내거나 하는 식으로는 사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로드는 이마를 짚으며 발트호른에 보낼 적임자를 고민했다. 이마를 짚은 자세에서, 머리를 쥐어뜯는 자세로 바뀌더니, 급기야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그런 혼란을 진정시킬 적임자라고 해봐야 어비스에 한 사람밖에 더 있겠는가?

어비스 최고의 내정관이자 이미 발트호른에서도 실적을 낸 적이 있는 검증된 인물.

책상에 엎드려 있던 로드는 힐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침 딱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제가 갈게요, 폐하.”

“…이브!”

그녀의 인자한 미소를 보는 순간 로드는 울컥한 마음에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넌 안 되겠어.”

로드가 고통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없으면 난 말썽만 일으키고 다니는 사고뭉치일 뿐이라고!”

“하지만 게노세르크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큭.”

로드가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정치형 영웅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각자 뚜렷한 장점이 있는 통솔, 무력, 지략형과는 달리 정치형 영웅의 활약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맡은 자리에서 꾸준하게 나라를 떠받드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문관이 없으면 전쟁으로 성과를 낸다 한들 통치를 못하니 무슨 소용이겠는가. 로드는 다시금 고질병인 인재 집착증이 도지는 것을 느꼈다.

“호호, 영원한 이별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사태가 나아지면 다시 언더하임으로 돌아올게요.”

“…그래, 그래야지.”

이제 진정이 된 로드가 멍한 표정으로 자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이브 혼자서 게노세르크 전체를 통치하는 건 벅찰 거야. 그리고 그녀의 대체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 이브는 계속 발트호른에 눌러 앉힐 수밖에 없어. 생각해 보자. 생각! 달리 정치형 영웅이 누가 있지?’

*

어비스 지하 수용소.

테라광산과 연결된 텅 빈 지하 공간을 개조하여 만든 이 수용소는 어비스 사람들 사이에서 지옥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수용되어 생활하고 있는 독특한 외국인 신참들이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어비스군의 발트호른 침공 당시 붙잡혀 언더하임으로 끌려온 다섯 명의 왕실 관리들이었다. 게노세르크의 신관은 언더하임에 넘어온 직후 처형되었고, 남겨진 그들은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발트호른에서 권세를 누리며 남 못지않게 지내던 왕실 관리들이었지만, 한 순간에 허름한 죄수복 차림의 신세로 전락했다. 그들이 느끼기에, 이곳의 생활은 참담하다 못해 끔찍했다. 평생 살아오면서 느꼈던 것 보다 더 한 굴욕과 수모를 여기서 겪고 있었다.

일과가 시작되면 새벽에 기상해 아침 조례를 한다. 간수들은 사소한 잘못도 용서하지 않았다. 이불을 갠 각도, 옷의 주름, 걸음걸이, 손톱 발톱의 길이까지 평소에는 신경 쓰지 못했던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규율에 의거한 처벌대상이 되었다.

매 일과마다 있는 고강도의 육체 노역은 온 몸이 부서질 만큼 힘들었으며, 학습을 빙자한 교화 교육 또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교화가 끝나면 언제나 테스트를 봐야했는데, 그 테스트에서 떨어지면 당연히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짝이 쓸모없는 빽빽한 교도소 규율을 토씨하나, 일개 접속사 하나 틀리는 것 없이 완벽하게 달달 외워야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시키니까 하는 것뿐이었다.

단체 감방 안의 죄수들 간에도 서열이 존재했다. 기본적으로는 들어온 순서대로 서열이 정해졌는데, 이는 수인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화였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막내’가 되었으며 온갖 허드렛일과 심부름에 시달려야만 했다. 게다가 감방 안의 수용원들끼리 연대책임제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수인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해야 했다.

처벌의 경우, 체벌이나 고문은 의외로 적었다. 처벌은 사람마다 가하는 종류가 달랐는데, 개인 심리 상담을 통해 그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맞춤형 스타일로 진행되었다. 입에서 진물이 나올 때까지 달리게 하기도 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 독방에 불을 끄고 집어넣기도 했으며, 부담스러운 동료가 대신 벌을 받게 하고 그 모습을 강제로 지켜보게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게노세르크 왕실 출신의 그들도 이 생활에 예외는 없었다. 단 1분도 편하게 쉴 수 없는 철저한 통제와 노역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던가, 하루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던 수용소 생활이 점점 익숙해져갔다.

그래도 마냥 힘든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밥만큼은 무척 잘 나오는 편이었으며, 성과에 따라 다양한 보상도 지급되었다. 저번엔 옆 감옥이 이번 달 최고의 모범상을 받게 되어, 그들이 원하는 바깥 음식을 포식하는 모습을 부럽게 지켜봐야 했다.

가끔 특별한 날에는 특식이라며 ‘쥐고기 스테이크’라는 것이 지급되기도 했는데 수인들은 가히 인생 최고의 맛이라 자부했다.

그렇게 그들이 수용소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는 사이, 갑자기 악마 같은 간부가 그들을 호출해 수용소 밖으로 데리고나갔다.

모두들 불안했다. 신관이 처형당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게노세르크가 전쟁에 패배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리 차례인가?’하는 공포가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다시 저 지옥 같은 수용소로 되돌아갈 바에는 처형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오!”

“햇빛이다!”

“밖이다!”

수인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곳 생활을 통해 변한 것 중 하나가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감동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유를 빼앗기고 나니 주위의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밖으로 나간 그들을 맞이한 것은 정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이었다. 그녀도 수인인 듯 머리에 곰의 귀가 달려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러분. 어비스의 신관이자 왕실 총무인 이브라고 합니다.”

그녀가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수인들은 움찔했다. 그들은 수용소에서 최고 막내였고,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기 때문에 인사를 받거나 존대를 듣거나 하는 것이 갑자기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귀하신 분들께서 수용소에 들어가시다니,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녀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자, 폐하께서 기다리시니 저를 따라 오시죠.”

“……차, 착오였다고?”

수인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 우릴 그런 끔찍한 곳에 집어넣다니!”

“이런 걸 착오라는 말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소?”

“아무리 잡혀온 입장이라곤 하나 우리 또한 한 나라의 왕실 일원이란 말입니다!”

그들이 빽빽 소리를 지르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이브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오!”

그 모습을 본 수용소 간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직 앳된 얼굴에, 몸집도 작은 것이 유약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죄송합니다, 신관님! 아직 이 사람들이 신입이라 뭘 모르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허리를 꾸벅 꾸벅 숙여가며 사과하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5분! 5분이면 됩니다.”

“…네?”

“시, 신관님! 이리로!”

또 다른 간수가 달려와 연신 굽실거리며 이브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그녀의 모습이 골목 밖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간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봐…요. 착오였다고 하는 말 못 들었나 ……요.”

“마, 맞아…요!”

수인들이 소심하게 항의했다.

그때 간수가 ‘하.’ 하고 비웃음을 흘렸다. 아까 이브에게 보이던 그 유약한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눈빛에는 서늘한 살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차렷.”

그 말에 수인들이 반사적으로 척! 하고 팔과 다리를 모았다.

“이것들이 잠시 밖에 나왔다고 정신이 나갔나?”

간수의 입가가 괴물처럼 찢어졌다.

“머리박아,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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