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150화 (150/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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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전쟁이 쉬웠어요

오랜 고민 끝에, 케이론의 입이 열렸다.

“…폐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어느 왕실에서 일하느냐를 따지기 전에, 백성들을 위해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

케이론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다시금 저희에게 백성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이 케이론, 힘닿는 데까지 분골쇄신하겠습니다.”

‘예쓰!’

로드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른 수인들도 수용소 행을 피하게 돼서 즐거운지 방긋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분골쇄신하여 의무를 받들겠습니다!”

로드는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게노세르크를 떠받들던 문관들을 거의 온전히 흡수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었다.

“백성들을 위한 여러분의 뜻, 잘 알겠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만찬이 계속되었다. 수인들은 지옥 같은 수용소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돌아가는 게 확정되었으며, 눈앞에는 훌륭한 진수성찬과 풍미 깊은 와인이 있으니 더할 나위없는 인생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수인들도 이제 마음을 터놓고 로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과격한 말렉과 비교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인들의 마음도 더욱 결심이 서게 되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즈음에 로드가 말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여러분의 결단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로드가 신호를 보내자 메이드들이 사각 케이스를 들고 와 수인들의 앞에 하나씩 놓았다. 그녀들은 테이블에 놓으며 일부로 살짝 속이 드러나도록 연출 했다.

“폐, 폐하! 이것은?”

수인들이 케이스 안에 든 것을 보고 경악성을 내질렀다. 황금이었다.

“우리 어비스에 소속되셨으니 제가 처음 드리는 계약금,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되겠네요.”

“……!”

수인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정타를 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폐하. 이런 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 케이론만이 선물을 밀면서 사양을 표했다. 나머지 수인들의 표정이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항의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듯 했다.

“하하, 다른 의미가 있는 선물이 아닙니다.”

로드가 손을 내저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정 받기 부담스러우시다면 수인 백성들을 위한 자금으로 써주십시오.”

“그, 그렇소. 케이론!”

“우리 중 누가 이것을 사리사욕을 위해 쓰겠소? 폐하께서 수인들을 위해 내려주신 자금이오! 받지 않는 것은 폐하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결례라고 생각되오!”

다른 수인들 또한 다급한 어조로 지원사격을 가했다. 로드는 고개를 돌리며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하겠습니다.”

결국 케이론의 승낙까지 받아내자, 모두가 속으로 안도했다.

“발트호른에 갈 가신단과 군대가 준비되는 대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언더하임에서 편히 쉬시기를.”

로드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들이 목소리가 한 층 더 커진 것을 느끼며 로드는 미소 지었다.

‘역시 돈이지.’

로드와 수인들은 오늘 바로 처음 본 사이였다.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충성심을 심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돈’이었다. 돈으로 충성심을 사는 것은 속물적인 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당연한 이치라고 로드는 생각했다.

회사원이 회사에 충성하는 이유는, 회사가 그와 그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돈을 지급하기 때문이다.

구성원이 큰 성과를 냈을 때, 상관이 ‘자네가 큰 공을 세워주었네!’ 라는 말 따위로 끝내버린다고 생각해보자. 어느 사원이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하겠는가? 짠돌이라며 뒤에서 욕을 듣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회사에서는 성과금이라는 보상을 지급하고, 구성원은 자신의 통장에 들어온 금액을 보며 더욱 충성과 헌신을 다짐한다.

그렇다. 돈은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신뢰와 격려의 표현 방식이었다.

‘돈도 마음대로 뿌려보고 이제야 왕 노릇 하는 맛이 나네.’

로드는 한 건 해냈다는 생각에 기지개를 쭉 켜며 복도로 걸어 나갔다. 마틴의 꼭두각시 시절과는 위상이 달랐다. 이번 내정문제만 잘 해결되면 무려 16개의 거점영지를 관리하는, 대륙의 유력한 왕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 복도를 걷고 있던 로드의 걸음이 딱 멈췄다.

“…안녕? 팬더야.”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미소 짓고 있는 빨간 머리 소녀와 마주쳤다. 로드는 바로 알아차렸다. 저 미소는 그녀가 화났을 때 짓는 바로 그 상큼한 미소였다.

“유, 유니벨! 여긴 어떻게?”

“아, 별건 아니고…….”

그녀의 진홍빛 눈동자가 불타듯 이글거렸다.

“자금 유출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어서.”

“…….”

로드의 두 손이 자연스럽게 공손히 모아졌다.

*

며칠의 시간이 더 흘렀다. 발트호른으로 향할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로드와 케이론은 다시 만나 본격적으로 게노세르크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게노세르크의 가장 큰 문제는 언제나 초식과 육식 수인들의 대립이었지요.”

케이론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로드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발트호른에서 일어난 반란도 그 문제 때문이라 들었습니다.”

“예, 폐하. 말씀대로입니다. 수인은 동물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동물과 가장 가까운 종족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옵니다. 특히 육식 수인들 중에서는 그 야생의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지요. 같은 수인을 잡아먹기까지 하니까요.”

“……끄응.”

로드는 골치가 아팠다. 서로 잡아먹는 국민들이라니! 이들을 대체 어떻게 통치해야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케이론의 차분한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더군다나 전 군주 말렉의 정책은 화약통에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격이었습니다. 그는 약자가 강자에게 복종하고 잡아먹히는 ‘약육강식’을 당연한 문화로 생각했고 육식 수인들에게 유리한 정책들을 많이 만들어냈습니다. 두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이 점점 커지고 있던 찰나에, 말렉의 죽음으로 그 불만들이 일제히 터져버렸을 겁니다.”

“……음.”

애니록스가 보고한 것과 비슷한 이야기였다. 로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영지 안에서 문명을 이루고 사는 수인들과, 밖에서 야생동물처럼 살아가는 수인의 비율이 이제 반반정도 되는 걸로 압니다. 그렇다면, 난폭한 유식 수인들은 그냥 영지 밖으로 몰아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허허, 전에는 그게 불가능했었지요. 오히려 말렉 측에서 어떻게든 야생 수인들을 영지 안으로 데리고 오려고 했었으니까요.”

‘……강제 폭주를 위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였겠지.’

로드는 이제야 정답이 명확해진 느낌이 들었다. 로드가 말했다.

“역시 불화를 종식시킬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둘을 갈라놓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말렉이 통제 불가능한 수인들을 써먹기 위해 그들을 영지 안으로 데리고 와 문제가 됐으니, 로드는 육식 수인들을 다시 야생으로 추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추방 정책을 펼치면 영지에서 생활하던 육식 수인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옵니다. 폐하.”

케이론이 반박했다.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그들은 툭하면 선량한 수인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심지어는 잡아먹기까지 합니다. 그런 그들을 영지에 계속 데리고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애초에 살인자를 마을에 내버려두는 게 이상한 일입니다. 따르지 않는다면 힘으로라도 쫒아내야겠죠.”

로드는 강경하게 나왔다.

만약 게노세르크의 플레이어라면 그들을 구슬려야 할 입장이겠지만, 로드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저 멸망 보너스를 얻었을 뿐, 말렉처럼 폭주수인을 쓸 수 있거나 시간이 지나면 강한 육식 수인들을 컨트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로드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영지에서 영리 활동을 수행하고 세금을 내주는, 문명화 된 수인들이었다. 둘 다 끌어안기에는 무리가 있다면 더 도움이 되는 쪽을 택할 작정이었다.

“케이론, 간단한 논리입니다. 영지안의 문명에서 계속 살고 싶으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야생 동물처럼 포식을 하고 싶다면, 야생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응당 맞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케이론은 ‘흠.’ 하고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러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문제겠지만, 사태 수습이 1순위 목표라면 그것 또한 좋은 방법이 될 것이옵니다. 하지만 폐하. 폐하께서는 육식 수인 전체를 배제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들 중에서도 온순한 자들도 있고, 스스로 본능을 제어하기 위해 힘쓰는 자들도 있습니다. 맹수라고 모두 쫒아낸다면 그것은 새로운 차별을 야기하는 일일 겁니다.”

로드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업지구에서 전갈꼬치를 팔던 늑대인간 상인 아저씨가 잠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물론 저도 문명에 따르려고 노력하는 자들을 대책 없이 내쫓을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 쪽 클랜에 수인 연합회가 있는데, 그곳에 속힌 육식 수인들은 완전히 문명에 적응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도 함께 발트호른에 파견하여 본능을 억압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보도록 하죠.”

“허허허! 좋은 생각입니다.”

지침은 로드가 정할 수 있지만, 결국 이런 문제들은 현장에서 직접 실행하는 각 영지의 통치자들. 이브, 케이론, 스노노가 얼마나 잘 해주냐에 따라 달렸다.

“이제 좀 혼란이 바로잡히는 기분이네요. 달리 논의할 게 있나요? 케이론.”

“문제야 산더미처럼 있습니다. 폐하.”

케이론이 수북한 양피지를 펼치며 말했다.

“우선 폐하의 말씀대로 한다면, 야생으로 돌려보낼 육식 수인들에 대한 통제 방법을 찾아야 하겠군요. 그리고 식량과 주거지 문제까지. 이런, 오늘 밤을 새서 논의해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으하하…… 나라를 얻게 되도 문제라니까.’

로드가 속으로 울고 있는데 집무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폐하! 부르신 손님께서 도착했습니다.”

“…아, 그래.”

로드는 그렇게 대답하며 케이론의 눈치를 힐긋 보았다.

“허허허! 손님이 온 모양이군요. 그럼 이 늙은이는 안건을 정리하고 있겠습니다. 본 회의 때 다시 상의하도록 하지요.”

“그렇게 합시다.”

로드는 안도했다. 잠시 일을 뒤로 미룬 것뿐이지만 말이다.

케이론이 밖으로 나가고, 열린 집무실 문 바깥으로 또각. 또각. 하는 발소리가 울렸다.

‘드디어 만나게 되는구나.’

로드가 긴장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마침내 새로운 인물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비스에서는 흔한 검정 로브 차림에, 머리는 후드 대신 흑색 삿갓을 깊이 눌러쓴 여인이었다.

“소녀, 어비스의 왕을 뵙사옵니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지?”

“예.”

그녀가 삿갓을 벗어 찰랑거리는 흑발을 드러냈다. 곱고 단아한 외모에 동양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여인. 삿갓을 목 뒤로 넘기는 손길에 섬세한 기품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제 멸망한 백제의 영웅, 비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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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비월

소속 : 없음

직위 : 없음

종족 : 인간

무력등급 : (B)*

통솔등급 : (C+)

지략등급 : (C)

정치등급 : (F)

B급 무력형 클래스 입니다.

고유능력 : 검의 의지

비월은 여인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수많은 편견과 난관을 극복하고 백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전설적인 검객입니다. 무엇보다 그녀의 강점은 꺾이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력과, 그것을 검으로 발현해내는 힘 덕분이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정신계 저주로부터 면역성을 가지며, 위기의 순간 기적과 같은 힘을 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녀의 강인한 정신력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존재해야만, 진정으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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