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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전쟁이 쉬웠어요
‘……선광이 푹 빠질만하군.’
고개를 흔들며 머리카락을 찰랑이는 모습조차 한 폭의 화보 같았다. 더불어 스테이터스 상의 능력치조차 이리 훌륭하다니, 실로 미와 능력의 완벽한 조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거기 앉을래?”
“네.”
메이드가 들어와 로드와 비월에게 차를 내어주었다. 그녀는 공손하게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어색하다.’
로드도 차를 한 모금하며 그녀를 곁눈질로 살폈다. 그리고 그녀의 분위기가 살짝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목소리는 힘이 없이 쓸쓸했고, 눈빛은 우수에 잠겨있었다.
‘하긴, 힘든 일을 많이 겪었을 테니…… 멀쩡한 게 이상한 거겠지.’
막상 그녀와 마주하게 되니 로드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 지 고민이 되었다. 아무리 탐이 나는 인재라지만 저렇게 슬픔에 빠져있는 그녀에게 대뜸 ‘내 부하가 되라!’라고 말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언더하임은 지낼 만 해?”
로드는 근황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그녀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나긋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폐하께옵서 신경써주신 덕에 편안히 지내고 있사옵니다.”
“……다행이네.”
다시 침묵이 일었다.
조용한 방 안에서 서로 차를 홀짝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어떠한 대화도 오고가지 않았다.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버리니 로드 또한 농담이나 가벼운 화제를 내놓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로드는 고민 끝에 이렇게 물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비월은 손에 쥔 찻잔을 천천히 내려 무릎위에 올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응?”
“소녀는 어린나이부터 무인으로 키워졌사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검을 잡았고, 그것을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사라진 지금, 모든 것이 혼란스럽나이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창밖의 하늘을 내다보았다.
“수인들에게 붙잡혔을 때, 소녀는 이미 한 번 생을 포기했었사옵니다. 그러다가 폐하의 성은으로 그곳에서 빠져나왔을 때, 소녀는 분수에 맞지 않은 작은 희망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다시 나라를 위해 검을 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녀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허공에 흘려보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것 또한 여의치 않게 되었사옵니다. 이제 백제라는 나라는 대륙에서 사라졌사옵니다.”
“…….”
“이제 소녀는 어찌해야 하옵니까?”
그렇게 반문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지독한 그늘이 느껴졌다. 로드는 마른 침을 삼켰다.
‘삶의 목표를 잃었구나.’
공허한 듯 텅 비어버린 그녀. 단순히 새로운 목표를 제시해준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살아가는 이유는 스스로의 마음이 정하는 것. 타인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줄 수 없었다.
로드가 고심하고 있는 사이, 집무실 밖에서 똑똑. 하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로드가 기다렸다는 듯 퍼뜩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요.”
벌컥. 문이 열리며 여러 명의 발소리가 울렸다.
“월아!”
비월이 뒤를 돌아보는 것 보다, 집무실로 들이닥친 소녀가 먼저 그녀를 끌어안았다.
“으아앙! 월아! 어떻게 된 거야? 얼마나 걱정한줄 알아?”
비월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여, 연아?”
졸지에 안겨진 비월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소녀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비월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이렇게 홀쭉해졌어? 응? 다친곳은 없어?”
“……네가 이 먼 곳까지 어떻게?”
“비월 장군!”
싸울아비 제복을 입은 한 무장이 그녀에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비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루 장군!”
이번엔 수염이 지긋하게 난 중년 남자가 달려와 비월과 소녀의 몸을 동시에 끌어안았다.
“무사했구나! 월아!”
“…삼촌까지!”
“다행이다.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의 목소리는 물기에 흠뻑 젖어있었다.
“백제에서 넘어 온 난민 분들이야.”
어리둥절한 비월을 위해 로드가 설명했다. 선광을 베고 백제의 새로운 통치국이 된 켈타인 측에 반발해 떠돌아다니다가 비월이 있다는 소식에 언더하임까지 온 사람들이었다.
“밖을 봐.”
로드가 창밖을 가리켰다. 비월이 몸을 일으켜 창밖으로 걸어갔다.
“어?”
“오오!”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사람들이 창밖으로 얼굴을 내민 비월을 발견했다. 그들이 비월을 가리키며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비월 님이시다!”
“비월 장군님!”
“무사하셨군요!”
“와아아아아아아!”
삼천 명의 백제 난민들이 쩌렁 쩌렁한 목소리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네가 여기 있다는 걸 듣고 온 사람들이야. 백제는 사라졌지만, 사람은 아직도 있어.”
“…….”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퍼들스퀘어라는 영지가 있는데, 조금 시골이긴 해도 공기 맑고 물 좋은 곳이더라. 네가 원한다면 거기서 사람들과 함께 머물도록 해.”
비월뿐만 아니라 다른 난민들도 놀란 표정으로 로드를 보았다. 설마 보금자리로 영지 하나를 내어주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폐하.”
“남이 정해주는 목표 같은 건 의미가 없겠지. 이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네가 살아갈 의미를 찾아봐. 그러다보면 언젠가 다시 검을 쥘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소매로 눈가를 훔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는 로드를 돌아보았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그녀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녀의 눈동자에 조금은 빛이 돌아온 것이 느껴졌다. 로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을 흔들었다.
“외부인의 설교는 여기까지, 그만 가봐. 서로 할 이야기가 많을 텐데.”
“…예, 그럼…….”
비월과 난민들이 떠들썩하게 집무실을 나섰다.
“와! 와! 들었어? 여기 폐하 되게 멋있다!”
닫힌 집무실 사이로 비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을 훔쳐 들은 로드가 손으로 턱받침을 하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후후, 어쩔 수 없는 이놈의 인기란.’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 인상이 좀 재수 없는 것 같아.”
‘……그냥 다시 내쫒을까?’
로드가 부들부들 떨며 화를 삭이고 있는데 다시금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폐하. 이브예요.”
이브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로드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며 힘이 쭉 빠진 얼굴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지쳐 보이시네요?”
“아, 그냥 긴장이 좀 풀려서. 혹시나 비월이 여길 떠난다고 할까봐 얼마나 가슴 졸였는데.”
사실 비월이 떠나겠다고 하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았을지도 모르겠다. 로드가 약간 정신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헤헤, 이걸로 나도 B급 무력형 세 명이다. 아크라도 이정도의 영웅진은 없겠지? 헤헤.”
“왜 인재 문제만 나오면 이렇게 초라해지시는지…….”
이브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아직 비월 님은 우리에게 합류하겠다고 한 게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다만, 빚은 만들어 놨으니 언젠간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어.”
로드가 다시 힘을 내서 상체를 일으켰다.
“다음 스케줄은 뭐야?”
이브가 정복의 가슴 주머니에서 멋들어지게 수첩을 꺼내 팔랑거렸다. 로드는 속으로 감탄했다. 실로 이상적인 여비서의 모습이 아닌가.
“던전에 가셔야하는 일정이 남아있네요.”
“…흐흐. 올 것이 왔구나.”
로드가 침을 꿀꺽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볼까? 우리 마왕님을 보러,”
*
로드는 이브, 호위로는 베아트리체를 대동하여 간만에 테라광산에 방문했다.
“감회가 새롭군! 예전에도 이 멤버로 한 번 왔었는데, 기억나니? 베아야.”
로드가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베아트리체는 입안의 간식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식시간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곧 그녀가 힘을 써야할 때가 올지도 몰랐기에 미리 먹여두고 있었다.
“자, 다 왔네요. 타시죠.”
광산의 한 쪽에는 지하 갱도 승강기가 마련되어 있었다. 목재와 못으로 대강 만들어진 모습이 허름하고 위험천만해 보였지만 로드는 눈을 반짝였다.
“와, 승강기도 있단 말이야? 몰라보게 발전했구나!”
세 사람이 모두 올라타자 이브가 승강기 벽에 달린 종을 울렸다. 쿠쿵! 하는 충격음이 들리더니 승강기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오!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거지?”
“위아래에서 수인들이 잡아 당겨요.”
“……아.”
로드의 표정이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그럼 그렇지. 어비스인데.
“마법 아티펙트도 달려있긴 하지만 그 힘만으로는 부족하더라구요.”
“쩝, 오펙투스의 마법사들이 시급하다. 얼른 그쪽도 정복하러 가봐야 하는데.”
세 사람이 몸이 빠르게 지하 어둠속으로 집어삼켜졌다. 갱도 가장 깊숙한 곳에 도달하자, 승강기가 다시 쿠쿵!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작업복차림의 남자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자신을 모험가 연합의 클랜원이라고 소개했다. 모험가답게 격식 없이 유쾌한 성격이었다. 로드는 이런 스타일을 좋아했다.
“그래. 잘 부탁해.”
“예! 폐하. ……헉! 귀, 귀검 단장이다!”
그가 주머니에서 퍼뜩 수첩과 펜을 꺼내 내밀었다.
“시, 실례가 되지 않으면 사인을 부탁드립니다!”
어비스의 암살단장이면서도 깜찍한 외모의 베아트리체는 나라 내에서 아이돌과 같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녀는 익숙한 듯 수첩과 펜을 받더니 슥슥 펜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호, 베아의 사인이라…….’
호기심이 생긴 로드가 수첩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수첩에 나비와 꽃그림을 그려 넣고 있었다.
‘그, 그림 사인이라니! 귀여워어!’
로드도 한 장 부탁하고 싶었지만, 이브가 눈을 흘기며 ‘사적인 용무는 일이 끝나고 해주시길 바랍니다.’ 라고 못박아버리는 바람에 포기했다.
던전으로 향하는 시커먼 어둠 속 터널은, 벽에 붙은 미약한 불꽃이 주위를 살살 밝히고 있었다. 그 불빛으로 모자라서 모험가는 따로 랜턴을 하나 들었다.
“자네 뿐이야? 다른 모험가들은 안 보이는데.”
통로를 걸어가던 중 로드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예, 폐하. 최근에 마왕이 이 던전에 자리 잡고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어서…… 문제가 될 지도 모르니 던전 출입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흠.”
로드는 불안함을 느끼며 이브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가는 거, 제대로 이야기 된 거 맞지?”
“한번 찾아가겠다고는 했었죠.”
“……기약은 없었던 거냐.”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세 사람은 계속 길을 따라 걸었다. 새까만 어둠의 연속이었다가 어느 순간 희미하게 빛이 흘러나오는 지점이 있었다.
“오오! 저기야?”
“네, 저곳이 바로 지하던전입니다.”
던전은 동굴통로와 연결된 형태였는데, 일반 동굴과는 달리 천장과 바닥에서 마력의 색깔처럼 푸르스름한 빛이 미약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웠지만 가까운 주위는 랜턴 없이 눈으로 분간이 될 정도였다.
‘아름답다.’
던전 안으로 들어온 로드는 감탄을 흘리며 주위를 구경했다. 던전이라고 해서 어두침침한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동화 속에 나오는 달빛 비추는 요정들의 도시처럼 신비롭고 환상적인 느낌이었다.
“우어어어어어…….”
모두가 흠칫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던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상한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신경이 예민해지자 비로소 사방에서 미약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조심하십시오! 던전 몬스터들입니다!”
모험가가 주의를 주었다. 동화 속 세계 같다고 느낀 것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몬스터들이 등장하자 이제는 음침한 푸른빛을 띠는 끔찍한 지옥 한복판처럼 이미지가 바뀌어 보였다.
로드의 옷자락을 쥐고 있는 베아트리체의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베아트리체는 본인이 하프 밴시이면서도 귀신을 무서워했다. 로드가 긴장 풀라는 듯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져주었다.
“우어어어어어…….”
어둠을 뚫고 새까만 형상의 괴물 하나가 들이닥쳤다. 두 발로 걷고, 두 팔을 쓰는 인간 형태였지만, 검은 마력에 잠식되어 빛나는 두 눈을 제외한 모든 부위가 새까맸다. 그 괴물이 칼날 같은 팔을 휘둘렀다.
“큭!”
네 사람이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브! 이야기 됐다며!”
“……아직 우리가 왔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요?”
“곤란한데, 이 녀석들 잡으면 리리스가 화내는 거 아냐?”
“저도 몰라요!”
촤악! 괴물이 다시 팔을 휘둘렀다. 정말로 죽일 기세였다.
“물러서 이브.”
이대로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을 수는 없었다. 로드가 한 팔로는 이브의 앞을 가로 막으며 나머지 한 팔로는 포켓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아무리 손님이라지만 사람을 공격하는데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 작품 후기 ============================
니알라토텝 / 엉엉 ㅠㅠㅠ 멍청한 오타충은 죽습니다
하렌트 / 어떤 맛이요?
Mr윤 / 이번편도 감사합니다!
天空意行劍 / 미망인... 분류 까지는 아니지 않을까요? 아직 혼인한것도 아니니 ㅋㅋㅋ
바람색 / 양고기 ㅋㅋㅋㅋ ㅠㅠㅠㅠㅠ 기왕이면 양고기 만두로 부탁합니다.
Lizad / 비월의 재평가;
ROK1198 / 헉?!
잘되기를 / 즐거운 시간 되셨기를!
spadel / ......히익;
라제트니 / 비월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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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ㅈㅂㅇㅂ / 주위에 철컹각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 ㅠㅠ
@올매니아 / ;ㅅ; 선광을 이해해주시는 분이 나올줄이야! 비월만세!
@완글아 / 무서우신분... 저는 도망치겠습니다
@노오니 / 다음편에 나오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