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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C외전%3E 유니벨의 자각
“……문짝이 이게 감히 날 엿 먹여?”
유니벨에게 있어 썩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다. 게다가 저 짙은 화장발 뚱뚱보 아줌마가 패셔니스타라니 무척 의심스러웠다.
“오홍홍홍홍! 그러지 말고 들어봐용!”
유니벨이 뒤돌아 가게를 나가려하는 순간 스카 파치노가 어깨를 붙잡았다.
“내가 주업이 마피아긴 하지만 옷, 구두, 액세서리와 각종 미용품들까지 전부 가게를 열어 관리해용! 내가 직접 선별한 재료가 아니면 몸에 대지도 않죵! 이 정도는 되어야 패셔니스타 아닌가용? 오홍홍홍홍!”
“……음.”
유니벨이 혹하는 눈치이자 스카 파치노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자, 자, 들어와용. 이미 문짝이에게 이야기는 들었어용!”
“…빠르네.”
“그럼 어울리는 옷을 골라볼까요? 오홍홍홍홍!”
스카 파치노가 가게 진열장을 한 번 슥 살피더니 몇 벌의 옷을 쑥쑥 뽑았다.
“남자를 유혹해야 한다고 했죵? 그렇다면 역시 노출이 조금 있는 편이 좋을 거예용!”
“아, 응? 나 그런 옷 입어본 적 없는데?”
“오홍홍! 괜찮아용! 첫 시도가 부담스러울 뿐이지 한 번 입고 다니다 보면 계속 입게 되니까용! 먼저 치수를 재야하…….”
스카 파치노는 말을 멈추고 유니벨의 몸을 위 아래로 훑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특정 부위 한가운데에 머물렀다.
“글렀군용.”
스카 파치노가 혀를 차며 손에 들고 있던 옷들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야!”
유니벨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가슴을 가렸다.
“…뭐 좋아용. 글러먹은 몸매지만 그런 것마저 커버해주는 것이 옷이고 패셔니스타니까용.”
“누, 누, 누가 글러먹었다는 거야!”
“아무래도 섹시 컨셉은 포기하고, 하는 수 없이 귀여운 쪽으로 찾아봐야겠네용.”
“뭐가 하는 수 없다는 거냐고오!”
그 후 유니벨은 한 시간 가까이 피팅룸을 오고가며 착의와 탈의를 반복했다.
스카 파치노는 처음엔 본인의 특기인 섹시 콘셉트가 불가능해서 다소 시큰둥한 모습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니벨보다 더 열의를 가지고 옷을 골라주었다. 자신 소유의 다른 가게에도 달려가 구두와 각종 장신구들까지 가져왔다.
“오홍홍홍홍! 좋아용! 좋아!”
마침내 스카 파치노가 종료를 선언했다.
유니벨은 피팅룸에서 나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 세수하며 보았던 평소 모습과는 전혀 다른 여자애가 서 있었다. 양갈래로 묶었던 빨간 머리카락은 풀어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하고, 청순함의 상징인 하얀색 짧은 원피스와 같은 색상의 슬림한 구두를 신었다. 옷 위로 플라워 패턴의 얇은 자켓을 하나 더 걸쳐 화사한 느낌을 냈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어울리는 밝은 빨강색의 귀걸이와 목걸이도 둘렀다.
유니벨은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 여러 번 포즈를 바꿔가며 거울을 보았다.
‘……이렇게 보니 좀 괜찮은 것 같기도? 역시 나도 꾸미면 예쁘구나.’
“오홍홍홍홍홍! 역시 이 몸의 실력은 위대하다니까용!”
스카 파치노도 만족스럽게 웃으며 유니벨의 등을 탁 쳤다.
“자! 자신감도 업 했을 테니 이제부터는 실전이에용!”
“……응. 고, 고맙다.”
유니벨도 인정했다. 스카 파치노는 수첩을 들고 와 뭔가를 주르륵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럼 총 비용은…….”
“도, 돈 내야하는 거야?”
“당연하죵! 장사는 땅 파서 하는 줄 아나용? 한 나라의 재정관이면서 짠순이처럼 굴지 말아용!”
“……으으.”
그녀가 축 늘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
잠시 후 유니벨은 로드에게 보고할 서류를 품에 안고 왕궁 입구에 도착했다.
‘……이게 뭐라고 또 떨리는 거야?’
항상 날마다 출입하던 곳이었지만 오늘은 뭔가 새롭게 느껴졌다.
“누구냐!”
멍하니 딴 짓하고 있던 입구의 경비병이 유니벨을 발견하고는 외쳤다.
“더위 먹었냐? 나야.”
“…유, 유니벨 니임? 들어가시지요!”
경비병이 얼굴을 붉히며 비켜주었다.
“…왜 그래? 기분 나쁘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근무 중 이상무!”
유니벨이 입구를 통과해 정원을 거닐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모두 그녀를 힐끔거렸다. 경비들은 호들갑을 떨며 휘파람을 불었고 정원사들은 가위질을 멈추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도 했다.
이 반응은 왕궁 안으로 들어가자 본격화되었다.
“꺅! 너무 예뻐요!”
우르르 몰려온 메이드들이 유니벨을 둘러싸고 난리법석을 피웠다.
“머리 어디서 했어요?”
“원피스 예쁘다!”
“아, 비켜! 일하러 가야 돼!”
유니벨은 틱틱거리긴 했지만 간만에 이렇게 관심을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어비스에서 그녀는 성격 나쁜 꼬맹이 혹은 공포의 대상이었으니까. 달라진 남들의 반응에 조금 자신감이 붙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그 엘프 거유는 그냥 가슴만 좀 클 뿐이지. 그런 할머니보단 내가 더 어리고 낫지!’
유니벨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로드의 집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목적지에 가까워 갈수록 가슴이 쿵쾅 쿵쾅 요동쳤다.
‘왜, 왜 이래?!’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예쁘다고 해주었지만 로드에게는 이 모습이 먹힐지 의문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놀리고 애 취급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녀석이었다. 유니벨은 애써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걸음을 땠다. 평소처럼 요란한 발소리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주고오오옹!”
“하하하!”
그런데 집무실 안이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로드와 티아의 목소리였다.
‘……엘프 거유, 아직도 있었어?’
유니벨이 이를 갈았다. 저 아이 같은 목소리는 또 뭐란 말인가? 로드와 단둘이 있을 때만 저러는 건지 평소에 들어본 적 없는 음성이었다.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유니벨은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주고오오옹! 빨리, 빨리 이것 좀 빼다오!”
“후후후, 이제 그만 포기하고 제 말을 들으시죠!”
“너무하다. 주공! 나쁘다! 짓궂다!”
“순순히 항복하십시오, 티아. 또 그 모습으로 있다가 다른 사람이 불쑥 들어와서 보면 어쩌려구요?”
“부, 부끄러운 소리 하지 말거라! 성희롱이다!”
툭. 유니벨은 경악한 표정으로 서류판을 떨어뜨렸다. 지금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펼쳐지고 있단 말인가?
“…이게 왜 성희롱입니까? 계속 제 지시를 듣지 못하겠다면, 메이드들을 불러 티아의 이 부끄러운 모습을 만천하에 알리겠습니다.”
“으아아앙! 주고옹!”
유니벨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지극히 어른들끼리의 프라이버시이니라.’
다시 티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유니벨은 떨어진 서류를 주웠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한 다음 집무실 문을 발로 힘껏 박찼다.
콰앙!
“왕궁에서 무슨 짓거리야! 이 미친 새끼들아아아아아!”
우당탕탕탕! 문을 열자마자 요란한 충돌음이 들렸다. 로드의 다리가 책상위로 보였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짓거리냐고!”
유니벨이 살기를 흘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책상 너머를 보니 로드와 티아가 뒤엉켜 엎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침에 봤을 때와 같은 상황.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니벨이 상상했던 살색의 향연은 없었고, 두 사람 모두 정상적으로 옷을 입고 있었다.
“……으으, 노크는 좀 해줘. 유니벨.”
로드가 바닥에 찍힌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깜짝 놀랐잖는가? 재정관. 일부러 기척을 숨긴 것이라면 나쁜 취미다.”
티아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뭐! 뭐! 내가 왜 일부로 기척을 내야 하는 건데? 너희 뭐 숨기는 거 있지? 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두 사람이 동시에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반응에 유니벨은 확신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다.
“……티아.”
로드가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는 의미였지만 티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일 하고 있었던 것 뿐이다!”
유니벨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발뺌하지마! 그럼 아까 팬더한테… 그… 뭐… 빼, 빼달라고 한 건 뭔데?”
“아, 그거 말인가?”
티아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책상 위 두꺼운 서적 아래에 잉크펜이 깔려있었다. 유니벨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저걸 하나 못 빼서 팬더를 시켰다고? 그 말을 믿으라는 소리야? 제대로 안 불어?”
“저, 정말이다!”
티아가 잠시 숨을 고르며 냉정을 되찾고는 말했다.
“그런데 재정관이 무슨 권한으로 우릴 잠재적인 죄인 취급하면서 심문하는 것인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노라.”
“윽, 그, 그건……!”
티아가 냉정해지면 연륜에서나 지식에서나 말로는 이기기 어려운 상대였다. 말문이 막힌 유니벨이 이번엔 로드를 노려보았다. 당황하던 티아와는 달리 로드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마지못해 티아와 어울려준다는 느낌이었다. 그가 ‘웃차’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결재 받으러 온 거지? 아깐 왜 그냥 간 거야?”
로드가 유니벨이 쥔 서류를 펼쳐보았다.
“아, 퍼들스퀘어의 예산 건이구나. 이번에 비월과 백제난민들이 갔었지? 오오, 플랫랜치의 식량을 끌어 썼네? 잘했어! 게노세르크 동맹이 전진기지로 쓰면서 식량을 잔뜩 쌓아 뒀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되네.”
로드는 자신의 깃펜을 들어 서류에 서명을 했다.
“자, 유니벨. 고생 많았어!”
“…….”
그리고 서류를 그녀에게 넘겼다.
“응? 안 받아?”
로드가 서류를 팔랑거렸지만 그녀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이이, 이이이이이!”
그녀는 화를 못 이기고 등을 홱 돌려 집무실 밖으로 쿵쾅거리며 걸어갔다.
‘일! 일! 결국 또 일이야?’
그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서러웠다.
왜 나만 보면 일 이야기뿐이란 말인가! 이브와는 언제나 단짝처럼 붙어 다닌다. 티아와는 전략을 논한답시고 며칠 밤을 같이 새곤 한다. 서로 계약으로 맺어진 베아트리체와는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나는?’
재정문제로 논의하거나, 아침에 보고를 주고받는 정도의 포지션. 가끔 가다가 로드가 심심풀이로 애 취급하면서 놀려 먹히는 게 전부였다.
소외감을 느꼈다. 걷는 도중 자신의 원피스와 구두차림이 보였다. 더 화가 났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내가 왜 저런 바보 변태에게 잘 보이려고……!’
눈물이 찔끔 났다. 왜 여기서 울음이 나온단 말인가.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더 없는 바보였다.
“저기, 유니벨!”
집무실을 나가려는 순간, 로드가 외쳤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름을 불러주는 그의 목소리에 답답했던 가슴 한 켠이 잠시 편안해졌다. 유니벨은 뒤를 돌아보았다.
로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오늘 예쁘네. 무슨 날이야?”
“…….”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참지 못하는 흐느낌이 입으로 새어나오려는 것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며 그녀는 복도를 가로질러 달렸다.
한심했다. 분노가 눈 녹듯이 사그라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너무 싫었다. 왜 이러지? 대체 왜?
“오옷! 재정관 님!”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던 애니록스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곤 ‘오’ 하는 감탄성을 내질렀다. 울면서 뛰어오는 하얀 원피스차림의 빨간 머리 미소녀라. 남심을 뒤흔드는 장면이었지만 그는 곧 자신의 존재 의의를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야 말로 그녀에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말리라!
그가 복도를 막으며 두 팔과 다리를 벌렸다.
“재정관 니이임! 저 애니록스 입니다아아아!”
콰앙! 코뿔소처럼 돌진하는 유니벨에게 부딪친 애니록스가 가볍게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하아 …하아.”
왕궁 뒤뜰까지 뛰쳐나간 후에야 유니벨은 걸음을 멈췄다. 이제야 좀 진정이 되었다. 그녀가 ‘하아아.’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열받아! 내가…….”
그녀가 중얼거렸다.
“내가 왜 그딴 변태를 좋아하게 된 거야?”
그리곤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자각하고 말았다.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이 드는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