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영지 대통합
그리고 그날 늦은 밤. 약속했던 협상의 시간이 찾아왔다.
로드와 로즈안느는 여관의 한 방에 모였다.
“……베아야,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잠시만 비켜줄래?”
“괜찮아요. 자게 두세요.”
로즈안느가 침대 위에 곤히 잠들어 있는 베아트리체를 보며 말했다.
“많이 피곤한 것 같은데요.”
“…음.”
로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당사자가 문제없다면야.
“그런데 넌 동행인도 없이 혼자 온 거야?”
“네에! 다들 제 결정에 따른댔어요. 제가 대장이니까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치곤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로드가 지긋이 바라보자 그녀가 ‘……사실은.’ 하고 운을 땠다.
“사실은?”
“제 가신들은 이 협상에 회의적이에요.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죠.”
“음.”
어떻게 된 건지 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설득은 불가능하다는 가신들, 그리고 혼자서라도 협상을 강행한 로즈안느.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우선 협상 전에,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사과하마.”
로드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받아들이겠어요.”
그녀가 웃는 얼굴로 마주 고개 숙였다. 이제부터는 각 국민을 대표하는 이들 간의 대화, 사과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용병들이 한 이야기는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난봉꾼들이 생각 없이 내뱉은 악담일 뿐이야.”
“네, 알고 있어요.”
사실 로드도 그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어비스는 차별하는 문화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 승승장구를 하고 있는 탓일까, 나라의 위세를 빌려 남의 나라에서 민폐를 부리는 자들도 있었다. 통합이라는 게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로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번에 우리가 했던 약속 기억나?”
“호호호! 어떻게 잊겠어요? 그때의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어요.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이제는 입장이라는 게 생겨버렸어요.”
“…그렇군.”
이제 독립국가 ‘베틀린 공국’의 수장이 된 그녀는 많은 베틀린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어엿한 지도자였다. 예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더 이상의 사설은 무의하다는 생각에, 로드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이번에 우리가 게노세르크를 제압한 사실 알고 있지?”
“물론이에요. 더불어 오펙투스, 백제까지.”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 우린 서부 전체를 어비스의 이름으로 통합할 생각이야. 물론 베틀린도 예외는 아니지.”
로드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최악의 상황엔, 전쟁도 불사할 생각이다.”
“……네, 그렇겠죠.”
그녀가 시선을 피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신탁을 받은 왕과 신관이 있는, 든든한 왕실이 버텨주는 나라. 그런 나라들만이 제국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거겠죠. 부럽네요.”
그녀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조금 질투가 날 정도로.”
“…….”
로드는 놀랐다. 저렇게 슬픈 표정도 지을 수 있었던가? 언제나 파이팅이 넘치는 그녀의 맨 얼굴을 훔쳐본듯했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로드의 입장에서, 베틀린은 무조건 잡고 넘어가야 했다.
베틀린은 서부 끝자락에 바다를 끼고 있는 지리적 요충지이다. 적의 활용에 따라 치명적인 비수가 될 수도 있는 위치이기 때문에, 변수를 내버려 두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 문제는 로즈안느 개인의 신뢰와는 관계없이, 다가올 전쟁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취해야 하는 영토라는 게 이브와 티아를 비롯한 다른 가신들의 공통적이 생각이었다.
“……로즈안느.”
“네, 폐하.”
“너와는 별로 싸우고 싶지 않아.”
로드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한 왕실’이 다스리는 서부 전역의 완전한 ‘통합’이다. 혹시 협상할 여지가 있다면 뭐든지 말해줘.”
그녀는 가져다 놓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이야기를 꺼냈다.
“……누가 우리를 다스리게 되던, 우리 국민들의 조건은 단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예술의 자유.”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당연했다.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독립을 한 이유였으니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름’이에요.”
결국 걸리는 게 나왔다.
“…베틀린이라는 이름을 버릴 수는 없다는 말이구나.”
“네.”
그녀가 기도하듯 가슴위로 손을 모았다.
“게노세르크의 독재에 저항해 사람들을 들고 일어나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 알아요? 왕족인 저의 존재가 아니라, ‘베틀린’이라는 이름이었어요. 모든 국민들이 베틀린이라는 이름 아래에 뭉쳐 하나 됐고, 결국 수인들을 몰아낼 수 있었죠. 이제 베틀린이라는 이름은 우리들에겐 ‘자유의 상징’이 되어버렸답니다.”
‘……음.’
이야기를 들은 로드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저기, 두 번째 조건 말이야.”
“네.”
로드가 눈을 크게 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확실히 해줬으면 해. 이름을 남겨달라는 것은, 너희들만의 ‘왕실’을 유지하겠다는 뜻이야?”
그 물음에 로즈안느가 빙긋 웃었다.
“…베틀린은 문화의 나라예요. 문화는 나라의 장벽을 초월해 전 인류에게 내리는 아름다운 축복이죠.”
그녀의 목소리가 아름다운 선율처럼 흘러나왔다.
“대륙 정벌. 물론 아바마마가 살아계셨을 시절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다면 좋았겠죠. 하지만 게노세르크의 통치를 받게 되면서 저는 느꼈어요.”
“무엇을?”
“그것은 아름다운 이상이 아니라, 가혹한 시련과 광기로 가득 찬 피의길이라는 것을. 저는 그때 대륙 정벌이 우리의 사상과는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음.’
이것으로 대답은 들었다. 그들에게는 어디까지나 문화 활동이 1순위, 대륙의 패권을 놓고 다툴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베틀린’의 이름을 계속 쓰고 싶어 한다.
반란이나 통일성 등의 문제 때문에 정벌 이후 전 나라의 이름을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 어비스의 국민이 된 사람이 ‘나는 어비스인이 아니라 베틀린인이다.’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은 명백히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녀는 말했다. 베틀린은 그저 자유의 상징일 뿐이라고. 그래서 더더욱 포기할 수 없다고. 그 국민들 입장에선 베틀린의 이름을 쓰지 못하는 것을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으로 느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어렵군.’
머리가 아파지다보니 사고가 단순해졌다. 역시 가장 깔끔한 방법은 힘으로 눌러 정복해버리는 것.
하지만 로드는 저 ‘베틀린 공국’이 세워진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본다면 게노세르크를 흔들기 위해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부추겼고, 그로 인한 결과물이 이 나라였다. 이제 와서 게노세르크가 사라졌으니 필요 없다며 짓밟아 버리는 짓은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로드는 계속 고심했다. 베틀린의 국적은 포기하게 하면서도, 베틀린의 이름을 계속 써도 문제가 없는 방법을.
“로즈안느. 베틀린의 이름을 쓰는 것 말이야. 꼭 나라의 형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네? 무슨 말씀이시죠?”
“너희가 우리에게 속한다면, 베틀린시티를 포함한 베틀린의 모든 영토들을 하나로 묶어서 새로운 지역 개념을 만드는 거야.”
로즈안느가 눈동자를 크게 뜨며 로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베틀린 문화 특구.”
“…아.”
그 말을 들은 그녀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 특구의 범위 안에서 너희들에게 ‘베틀린’의 이름을 계속 사용하는 것을 허가할게. 그에 걸맞게 자치권과 예술의 자유도 당연히 보장하겠어. 다만 너흰 엄연히 어비스 소속이 되는 거고, 국민으로서 역할과 의무를 수행해야 하지. 대신 우리가 너희에게 제공하는 것은…….”
로드가 주먹을 꾹 쥐었다.
“자유를 지켜낼 힘.”
그리곤 그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너희들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야.”
베틀린은 힘이 약해 멸망당했고, 문화를 통제 당했다. 만약 어비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언젠가는 대륙 정벌을 노리는 또 다른 왕실에게 통치권이 넘어갈 것이다. 과연 그때도 협상의 여지가 있을 것인가? 자유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그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로드는 이야기를 마쳤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바, 반응이 없네.’
로드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퍼뜩 들었다.
“폐하!”
그리고는 와락 달려들어 가슴으로 로드의 안면을 강타했다.
“좋아요! 정말 멋져요! 문화 특구! 그렇게 해요!”
로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걸로 괜찮아? 하지만 네 다른 가신들은…….”
“괜찮아요! 모두들 이해해 주실 거예요! 싫어하시는 분들이 있으시면 제가 일일이 집 앞까지 찾아가 드러누워서라도 설득할거예요!”
‘……다시 원래의 파이팅 넘치는 성격으로 돌아왔군.’
로드에게서 떨어진 그녀가 기쁨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이러실 거면서 왜 그렇게 분위기 잡으신 거예요? 폐하랑 전쟁을 해야할까봐 얼마나 가슴 졸였는데!”
“아니, 뭐. 협상은 원래 이렇게 하는 거니까…….”
그녀가 참지 못하겠다는 뜻 벌떡 일어섰다.
“왜, 왜 그래? 또.”
“약속! 지켜주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로즈안느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 베틀린 공국의 ‘로즈안느 페터 베틀린’은 그대, 로드 폴렌티아의 검이 되기를 서약합니다.”
“…어, 어엉?”
로드가 당황하건 말건 그녀는 서약의 문구를 읊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저의 의지, 저의 몸, 저의 심장. 지금 이 순간부터 모두 온전히 그대의 것임을 맹세합니다.”
‘……난데없이 여기서 서약이냐.’
로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로드 폴렌티아는 지금 이 자리에서 로즈안느 페터 베틀린의 서약을 받아들이겠다. 나는 그녀와 그녀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적은 이제부터 나의 표적이고, 그녀의 소망은 이제부터 나의 꿈이다.”
그녀가 빛나는 눈으로 로드를 올려다보았다. 로드도 그녀의 시선을 마주보며 마무리했다.
“그대의 주군으로서, 숨이 다할 때 까지 그대를 이끌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
로드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일으켰다. 그녀는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폐하!”
“결단해줘서 고맙다.”
- 로즈안느 페터 베틀린(B)이 소속 가신이 되었습니다.
- 로즈안느 페터 베틀린의 휘하 인재들이 소속 가신이 되었습니다.
‘이걸로 베틀린도 손에 넣었다.’
로드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안도했다. 큰 산을 하나 넘은 기분이었다.
만약 대화가 심각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면 ‘베틀린의 이름’을 유지한다는 조건에서 협상은 종결되고 전쟁으로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베틀린 사람들은 예술의 자유를 지키는 것을 왕실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것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협상의 여지는 있었다.
“헤헤.”
로드를 따라 자리에 앉은 로즈안느는 큰 걱정이 사라져서 즐거운 지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폐하.”
“…응?”
“그냥 불러봤어요.”
“……?”
그녀는 부담스러운 눈길로 로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로드는 조금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저 눈빛은 마치 수면 아래의 먹이를 노리고 있는 독수리의 그것과 같았다.
“헤헤.”
그때 로즈안느가 무릎으로 기어와 로드의 몸에 밀착했다.
“……로, 로즈안느?”
“괜찮죠? 서약했잖아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제 몸은 이제 온전히 폐하의 것이 됐어요.”
그녀가 능글맞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폐하께서 오늘밤, 제 몸에 어떤 짓을 하시더라도 저로선 막을 도리가 없네요.”
“……쿨럭.”
로드는 기침을 했다. 한 건 기침인데, 이상하게 코에서 피가 흘렀다.
‘……얼굴은 순해보여도 은근히 대담하단 말이야.’
로드도 그녀를 마주 보았다. 핑크빛 머리카락의 아름답고 성숙한 미녀. 로드라도 마음이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점 정신 줄이 놓아지려는 그때, 뒤에서 허리를 강하게 붙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주인니임.”
“베, 베아야?”
베아트리체는 여전히 졸린 얼굴임에도 꾸물꾸물 로드의 몸으로 기어 올라와 똬리를 틀듯 품에 안착했다. 그리고는 로즈안느 쪽을 경계하듯 돌아보았다.
‘……헉!’
로드의 눈이 부릅떠졌다.
‘우리 베아가 지, 질투를?’
충동적인 신체적 욕망이 눈 녹듯이 사라지며 이 품안에서 꼬물거리는 생명체에 대한 강렬한 귀여움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크흡! 역시 아빠는 너 밖에 없단다!’
헬렐레한 표정으로 무장 해제된 로드를 보며 베아트리체는 마음속으로 따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쉽지 않네요. 전에 유니벨 씨도 그렇고…….’
로즈안느가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라지만, 왕비는 직접 쟁취해야 하는 것! 더욱 힘내겠어요!’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며 열의를 불태웠다.
============================ 작품 후기 ============================
wowow45 / 간디?! 유혈사태?;
HooOur / 간디작살!
Leessa / 음, 저도 이 지적을 받고 약간 수정했습니다! 의견 감사해요~!
왜이리들다재밌지 / 이번편도 재밌으셨으면 좋겠네요
잇시키이로하스 / 엑스트라 용병들 한화만에 퇴장 ㅋㅋㅋㅋ
그랑엘베르 / 묵직한 팩트가 로드의 마빡에 꽂히는군요
天空意行劍 / 음, 저도 비슷한 느낌이군요.
알테니아 / 이제 비월 분량이 줄어들면 어쩌시려고.... 흑
레몬라떼 / 물론이죠. 주위사람들이 괴물들일뿐 ㅠㅠ D급부터가 영웅으로 불리잖아요
남호들 / 핡! 감사합니다
--
@spadel / 이번 내정 파트동안은 그녀의 존재감은 공기일 예정인데요 ㅠㅠㅠ 휴가좀 줍시다
@ZzeRoN / 일러 의뢰라도 해야하나.. 허허
@니알라토텝 / 로드의 성입니다. 로드 폴렌티아
@...(-1)... / 대체 큰고모님은 정체가 뭐죠;;
@로리콤MK / ㅋㅋㅋㅋㅋㅋㅋㅋ 오랜만이네요! 아, 한가지 꿀팁을 드리자면 26일에 잭팟으로 무료로 풀리니까 그때 또 몰아보시길! 코멘두 부탁해요 ㅋㅋ
@火炎無 / 응?; 무슨 말씀이시죠?;;
@spat / 너무 츤의 강도가 셌나요? 으으으음.
@로아리아 / ...왜 부인할수가 없는걸까! 크윽!
@켄케루 / 네이버에는 쳐보니 안나오는군요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