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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의 나라
“엘프들이 항복한건지, 본녀가 항복한건지 모르겠더군.”
“……예?”
“…아무것도 아니다. 엘프들은 지금 큰 혼란에 빠져있다. 그토록 미천하다 여기던 인간들에게 세계수가 점령당했고, 앞으로는 인간들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라는 현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 이러한 혼란은 점차 불만과 분노로 바뀌고 있다.”
“하긴 그렇겠죠. 그들의 프라이드가 용납하지 못하는 상황일 테니까요.”
로드가 턱을 괴며 말했다.
“나도 밖에서 상대해 봤는데, 여기 엘프들은 정말 싸가지 없더라.”
유니벨이 투덜거렸다.
“전쟁에서 패한 포로들이면서 내 몸에 손대지 말라느니, 인간 주제에 명령하지 말라느니, 얼마나 사람 귀찮게 하던지…… 인간에 대한 혐오감뿐이었어.”
“장군의 말이 맞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심각한 자종족 중심주의적 사고에 빠져있는 것이니라.”
엘프들은 자기들 외의 종족들을 ‘타종족’이라고 규정하며 천하게 취급하는 것은 물론, 피부를 맞닿는 것조차 끔찍하게 여겼다. 이야기를 듣던 로드는 머리가 아파왔다. 자기들끼리 잡아먹는 국민들에 이어, 이번엔 자종족 중심주의에 빠진 자들을 통치해야 한다니…… 산 너머 산이었다.
‘플레이어인 플로라도 해결 못한 문제인데, 내가 제대로 해낼 수 있으려나.’
로드는 티아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했다.
“하루아침에 그들의 인식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니라.”
그녀가 바나나 모양의 과실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여담이지만 무척 섹시해 보였다.
“시간을 들여서 자연스럽게 인간에게 익숙해지도록 변화를 유도하거나, 강한 충격 요법을 가해서 의식을 완전히 뒤바꿔야겠지. 아직 자세한 방법은 본녀도 떠올리지 못했노라.”
“……음, 본보기로 우두머리 몇몇의 목을 칠까요?”
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영지라면 그 방법으로 경각심을 심어줄 수 있겠지. 하지만 알브헤임은 상황이 다르다. 주공은 노예를 원하는가? 아니면 통치할 국민을 원하는가?”
“어비스에 노예라는 계급은 없으니까요. 통치를 해야겠죠.”
“그렇다면 더더욱 아니 된다. 엘프들은 우리에게 항복한 지금도 타종족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하다. 그런 짓을 했다간 그들의 분노를 증폭시킬 뿐이고, 저들끼리 똘똘 뭉칠 계기를 제공할 뿐이니라.”
“으으, 머리아파!”
가만히 듣고 있던 유니벨이 버럭 짜증을 냈다.
“그냥 총책임자만 우리 쪽 사람으로 임명해놓고, 자기들끼리 해먹으라고 자율 통치권을 부여하는 방법도 있잖아?”
“그렇게 방치하면 십중팔구 반란이 일어날 것이니라.”
티아가 단정 지었다.
“힘으로 억눌린 지금은 움츠리고 있을지 몰라도, 엘프들은 호시탐탐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노릴 것이다. 전시에 우리 본토와 가까운 영지인 이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무척 곤란해진다. 우리가 확실히 그들을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하느니라.”
“티아의 말이 맞습니다.”
이런 좋은 포인트를 아크같은 여우형 플레이어들이 가만 내버려 둘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접촉하여 그들을 회유하려 들것이다. 조금의 빈틈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 계속 로드와 가신들은 엘프들을 관리할 방법에 대해 고심해 보았지만 비현실적인 이야기들만 몇 가지 튀어나올 뿐, 마땅한 방법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티아. 엘프들이 어느 정도로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건가요? 많이 심각한가요?”
티아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답했다.
“내일 아침 회의에 참석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니라.”
*
그리고 다음날 아침, 알브헤임 원로들과의 회의가 열렸다. 로드는 대외비로 방문한 것이라 로브를 뒤집어쓰고 참관인 신분으로 참석했다.
이곳은 실로 개판 오분 전이었다.
“우리 엘프들과 대화를 하고 싶다면 우선 인간들이 세계수에서 나가야만 하오!”
“뼛속부터 미천한 자들이라 어머니 나무께서 분노하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겁니까?”
“어찌 인간들이 이런 신성한 곳에 발을 디딜 수 있단 말이오! 우리는 그대들이 이곳을 나가기 전까진 어떤 대화도, 협상도 할 수 없소!”
엘프들을 대표하는 장로들은 하나같이 저런 태도들로 일관했다.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소용없었다. ‘어머니 나무를 더럽힐 바에 차라리 우리를 죽여라!’ 라는 게 그들의 각오였다. 티아의 말처럼 이런 분위기에서 무리하게 처형을 강행했다가는 영영 어비스가 다스리지 못하는 땅이 되어버릴 지도 몰랐다. 로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영주석에 앉은 티아 또한 그랬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도 아름다운 엘프들 중에서는 몹시 희귀한, 머리카락이 깨끗하게 비어있는 대머리의 장로가 나서서 말했다.
“우리를 다스릴 자라는 게 하필이면 페어리 퀸이라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옳소!”
“어비스 왕은 우리를 업신여기고 있는 게 틀림없어!”
“…….”
티아는 눈을 감고 꿋꿋이 모욕을 감내하였다.
“이보시오, 자칭 영주! 무슨 말이라도 해보시오!”
“어머니 나무를 배신하고 타국의 인간들을 끌어들이다니! 정녕 제정신이오?”
“배신자! 저주받을 학살자!”
뒤에서 듣고 있던 로드는 슬슬 열이 뻗히기 시작했다. 내가 욕먹는 건 참아도 내 가신이 욕먹는 건 무척 참기 힘들었다.
‘……아오, 통치고 뭐고 그냥 이것들을 다 노예로 만들어 버려?’
로드가 화를 삼키고 있는 그때.
“저주 받을 쪽은 그대들이니라.”
갑작스런 티아의 박력에 장로들이 멈칫했다.
“묻겠노라. 지금 우리가 그대들을 어머니 나무에서 쫓아낸다면 어떻겠나?”
엘프들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 있지!”
대머리 장로가 대뜸 삿대질을 했다.
“미천한 타종족 따위가 무슨 권리로 어머니 나무의 자식들인 우리를 이곳에서 쫓아내겠다는 것이냐?”
“옳소!”
“우린 목숨을 걸고서라도 끝까지 위그드라실을 사수할 것이오!”
장로들이 분노로 날뛰었다. 티아가 차디찬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도 그랬다.”
“……뭐?”
“우리는 모두 오랜 세월동안 어머니 나무에서 살아온 숲의 일족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대들이 우리를 내쫓으려 했고, 우리는 맞섰을 뿐이니라. 바로 지금의 그대들처럼.”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차분히 눈을 감았다.
“처음엔 대화를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대들은 그 조차도 받아들여주지 않았지. 추방 명령에 불복하면 죽음뿐이었기에, 우리는 무기를 들고 스스로와 동족을 지켜야만 했다. 그대들은 본녀를 학살자라고 칭했으나 본녀의 입장에선 그대들이야 말로 동족과 전우들의 학살자이니라.”
엘프들은 침묵했다. 그러나 대머리 장로는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그건 너희 타종족들이 어머니 나무를 썩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묻겠다.”
티아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우리 모두를 쫓아낸 이후, 온전히 엘프들만 이곳에 남아있던 지난 백년간, 어머니 나무는 회복되었는가?”
“……!”
드디어 이 발언이 도마 위로 올라왔다. 엘프들 누구나 쉬쉬하며 말하기 꺼려했던 사안. 그들은 세계수가 썩고 있는 것이 세계수에 살고 있는 불순한 타종족들 때문이라며 주장했으나, 정작 그들이 쫓겨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본녀가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썩어들었더군. 알고 있었나?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 한 것인가?”
깊은 침묵이 회의실에 가라앉았다. 엘프들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티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아침 다시 회의를 소집하겠노라.”
엘프들은 자기들끼리 수군대며 회의실을 나섰다. 티아가 돌아오는 모습이 보이자 로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수고했습니다, 티아.”
“……주공.”
그녀는 불과 몇 분 만에 초췌해진 얼굴이었다.
“저 자들의 작태를 보니 티아만 이런 곳에 내버려두고 가도 될지 걱정이네요. 왜 그들을 벌하지 않는 겁니까? 이제 티아에게는 힘이 있지 않습니까?”
로드의 물음에 그녀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위그드라실을 되찾은 것으로 본녀는 복수를 다했다.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은 싫노라.”
“……티아.”
“그리고.”
그녀가 방긋 웃어보였다.
“이곳은 본녀의 소유가 아니라 엄연히 주공이 왕으로서 다스릴 땅이지 않나. 본녀는 소임을 잠시 맡았을 뿐이다. 어찌 주공의 땅에 누가 되는 짓을 하겠는가.”
“티, 티아!”
로드는 감격에 목이 메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가슴에 돌진할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역시 티아를 위해서라도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습니다.”
“무슨 생각이라도 있는가?”
“네, 될지 안 될지는 해봐야 알겠지만…….”
로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적임자가 있습니다.”
*
며칠이 지나 베아트리체와 유니벨 및 어비스군 주력은 언더하임으로 복귀했고, 치안 유지를 위한 병력들과 임시 영주가 된 티아는 남겨졌다. 로드도 잠시 알브헤임에 남아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일반 시민 엘프들은 장로들처럼 대놓고 비방을 쏟아내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비협조적이었다. 인간과 페어리같은 타종족에게 복종할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창끝을 들이 밀어야 마지못해 움직여 주는 정도였고, 로드의 스파이들은 벌써부터 그들 중 몇몇이 반란을 생각하고 있다는 정보까지 입수했다.
그러던 중 티아는 위그드라실의 모든 엘프들을 중앙 강당에 불러 모으는 소집령을 내렸다. 엘프들이 워낙 말을 듣지 않으니 병사들은 집집마다 찾아가 그들을 끌어내야했다.
“우리가 왜 페어리 퀸의 명령을 따라야 하지?”
“미천한 것들…….”
엘프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병사들의 강압에 못 이겨 강당에 모였다.
“영주께서 입장하십니다!”
티아가 중앙 강단 위로 걸어 올라왔다. 그녀는 알브헤임의 통치자임을 상징하는 화관과 파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새까맣게 몰려든 인파를 내려다보았다.
엘프들은 티아를 보고 야유나 욕설을 퍼붓지 않았다. 대신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에도 강당은 소름끼칠 만큼 조용했다. 티아는 덤덤한 얼굴로 확성구슬을 켰다.
“알브헤임의 영주, 티아 그란디네다.”
그녀는 한 마디로 소개를 마쳤다.
“본녀가 그대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것은, 그대들에게 소개시켜줄 인물이 있어서이다.”
티아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무대 뒤 쪽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육중한 발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저 인간은?”
“…흉악하게도 생겼군.”
얼굴은 눈 뜨고 보기 힘든 흉터들로 가득했고 칼에 베였는지 한쪽 입술 끝이 기이하게 찢어져 있었다. 큰 몸집을 코트 안에 감추었으며 얼굴 외에는 장갑과 부츠 등으로 빈틈없이 피부를 가렸다. 머리는 털실로 두툼하게 짠 새까만 비니 모자를 썼다.
남자가 강단위로 올라오자 덩달아 회색 군복을 입은 자들이 강단 앞으로 착 나열했다. 남자는 티아로부터 확성구슬을 받아들고 입을 열었다.
“반갑다, 제군들.”
주위를 압도하는 묵직한 중저음이 울려 퍼졌다.
“본관은 케이지 인퀴지터라고 한다.”
============================ 작품 후기 ============================
xoskd / 열두시 연참!
잘되기를 / 감사합니다 ^^!
라이듄 / ...! 흠짓! 소름;
로리콤MK / 이..일상인가요?
물주아자씨 / 후후후... 그 부분은 독자님의 상상에 맡깁니다. 라는 답변밖에 드릴수가 없겠군요. 그리고 말렉의 돼지우리드립은 '넣었다!' 가 아니라 '넣어버릴거야!' 로 미래형입니다.
ppk12 / 핡핡!
아프게했어 / 이게 사실은 유니츤 달래기를 위한 큰그림이었나...
도레미파솔솔 / 오오옷! 고맙습니다! 감사히 잘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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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리아 / ㅠㅠㅠ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이미 텔레파시를 보냈었는데 못 받으셨군요. 워낙 혼선이 많아서
@니알라토텝 / 음, 하긴 그렇군요. 이제 전쟁씬은 얼마 남지 않기도 했고...
@건필하십쇼! / 반갑습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