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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의 나라
‘자, 실력 좀 보자고. 케이지.’
단상 뒤편에서 로드가 은밀하게 미소 지었다.
케이지는 ‘어비스 지하 수용소’의 소장으로서 시설 내에서 상당한 개혁을 이루어낸 인물이었다. 스테이터스 상으로도 이브와 같은 B급 정치형 영웅이다. 로드가 통신으로 사정사정해서 알브헤임까지 불러들인 것이다.
“뭐야? 저 인간은?”
“…케이지라고?”
“미천한 이름이로군.”
엘프들이 자기들끼리 웃으며 쑥덕거렸다. 케이지는 단상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조용히.”
위엄이 실린 묵직한 목소리에 엘프들은 흠칫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본관은 알브헤임의 통제관으로서 이 자리에 섰다. 이 순간부터 제군들은 본관의 통제에 철저히 복종해야 할 것이다. 저항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벌하겠다."
엘프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복종이라니? 그것도 타종족에게?
"1차는 불복시에는 경고다. 위그드라실에서 나와 한 달 동안 언더하임의 지하 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될 것이다.”
“……가,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케이지는 엘프들의 항의는 듣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수용소 생활이후 돌아와 또다시 통제에 따르지 않을 경우, 2차는 추방이다. 세계수와 엘프의 숲에서 영구히 추방하겠다.”
“뭐, 뭐라고?”
곳곳에서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엘프들은 위그드라실에서 쫓겨나는 것을 죽음보다 더 끔찍하게 여기고 있었다. 어머니 나무를 등지고 바깥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바깥에 나가더라도 노예상들에게 붙잡혀 비참한 삶을 이어나갈 것이 뻔했다. 사실상의 사형선고였다.
“감히 미천한 인간들이 무슨 권리로 추방을 말하느냐!”
“이곳은 우리의 땅이다! 나가야 하는 건 그쪽이다!”
“우우우우우!”
엘프들이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렇다면 묻겠다. 제군들은 무슨 이유로 이곳에 살았던 다른 종족들을 모두 쫓아냈는가?”
케이지의 물음에 엘프들이 폭포수와 같이 말들을 쏟아냈다.
“당연한 말을! 불순한 존재들이 어머니 나무를 썩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케이지는 단호한 한 마디로 엘프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세계수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제군들은 다른 종족들을 추방시켰다. 그러나 지난 100년간 세계수는 어땠지? 상태가 나아졌나? 아니다.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
이때 엘프 원로들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애써 숨기고 있던 티아의 발언을 이런 곳에서 터뜨리다니!
“제군들이 그들을 쫓아낸 당위성은 오로지 하나, 제군들이 그들보다 더 강했기 때문이다. 본관은 그 일에 대해 비난할 생각이 없다. 전쟁에서 승리했고, 승자는 패자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 힘이 곧 권력. 이는 역사적으로도 당연한 일이다.”
그가 말을 멈추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프들은 바로 반박하지는 못했지만 사납게 눈을 뜨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케이지는 가소롭다는 듯 픽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리도 똑같이 하겠다.”
“……!”
“제군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통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세계수에서 영구히 추방할 것이다. 제군들이 했던 짓을 그대로 되돌려줄 생각이다. 어떤가? 우리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나?”
“……큭!”
“크으으!”
“…미천한 인간 따위가!”
엘프들이 붉으락푸르락 분노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기억해라. 신분의 높고 낮음, 종족의 차이, 그런 것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제군들이 숲의 일족이든 뭐든, 우리에게 패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그대들의 생사여탈권은 우리가 쥐고 있다. 그대들에게 이 땅을 되돌려줄지, 혹은…….”
케이지의 입가가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여기서 전원을 죽여 버리고 이 땅을 차지할지, 모든 것은 우리 손에 달렸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의 병사들이 창과 화살 끝을 엘프들에게로 돌렸다. 엘프들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제, 제정신이냐?”
“통치자가 영지민을 학살한다니! 이 에덴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오!”
“…그래, 이제야 통치자로 인정해주군.”
케이지가 관중들 속에 있는 원로들을 보며 씩 웃었다. 원로들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본관이 그대들을 통제한다. 여기 있는 간수들은 본관의 대리자로서 본관과 동일하게 그대들을 통제할 권리를 가진다. 통제사항을 설명할 테니, 이 나라에서 추방당하기 싫다면 잘 듣도록.”
이 연설 이후, 케이지는 엘프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등극했다.
*
케이지의 통제는 단계적으로 적용되었다. 첫날에는 기상시간과 취침시간이 정해졌으며, ‘점호’를 통해 인원을 보고해야했다. 몇몇 엘프들은 분노하여 날뛰었다. ‘왜 내 마음대로 잠을 자지도 못하는가?’, ‘미천한 인간들이 무슨 권한으로 최소한의 자유까지 박탈하는가!’ 케이지는 그들을 단 한명도 남김없이 체포해 언더하임으로 압송시켰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로드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고작 기상과 취침시간을 지정했을 뿐인데 저항이 심하네요. 정말 엘프들이 제대로 통제에 따라줄까요?”
케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주십시오. 고작 이정도도 견디지 못하는 자들은 처음부터 우리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첫날은 가시를 쳐내는 게 목표입니다.”
“……흐음. 통제관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어떤 방법으로 엘프들을 통제할지 물어봐도 될까요?”
케이지는 간단히 대답했다.
“저들끼리 서로 견제하고 감시하도록 할 겁니다.”
둘째 날 부터는 위그드라실에 ‘조’의 개념이 세워졌다. 조는 가까운 곳에 사는 엘프들 중에서 무작위로 정해졌으며, 이중에서 다시 ‘조장’을 선출했다.
조장은 점호시간에 케이지의 간수들에게 인원을 보고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간수들은 각종 전달사항을 조장에게 이야기했다. 물론 수용소와 마찬가지로 조별 연대책임제가 적용되었다.
그리고 처벌 부분에서는 상벌점 제도가 새롭게 적용되었다. ‘위그드라실 표준 국민 성실성 평가제’라는 거창한 이름이었는데, 로드는 그냥 상벌점이라고 불렀다.
일정 수준 벌점이 쌓이면 즉시 언더하임 수용소 행이었으며, 조별 연대책임제에 의해 한 사람의 잘못으로 조에 속한 모든 조원들이 무더기로 벌점을 받을 수 있었다.
바로 이 제도가 엘프들을 통제하는 가장 강력한 구속구가 되었다.
처음에 인간들의 명령은 따를 수 없다며 배짱을 부리던 몇몇 엘프들은 주위에서 ‘용감하다.’며 치켜세워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입장이 바뀌었다. 같은 조원들이 슬슬 그들에게 눈치를 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점호에 참석하라며 핍박하기까지 했다. ‘나도 인간들은 싫지만, 내 가족과 동료는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것이 조원들의 논리였다. 어느새 케이지와 간수들에게 저항하는 자들은 ‘고집불통’, ‘막무가내’로 불리기 시작했다.
“싫다면 끌고라도 옵시다!”
“그 사람이 원로고 뭐고, 내 딸이 어머니 나무에서 쫓겨나게 생겼다고!”
동족들의 곱지 않은 시선, 그리고 쌓여가는 벌점으로 인해 가까워지는 언더하임 수용소에 대한 공포는 계속 배짱을 부리던 엘프들 마저 그 무거운 엉덩이를 떼도록 만들었다.
또한 케이지는 벌점과는 반대되는 개념인 ‘상점’을 만들었는데 상점이 어느 정도 쌓이면 처벌을 피할 수 있는 ‘면제권’을 제공했다. 이 면제권은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엘프들 사이에서는 이 면제권이 일종의 권력처럼 변모했다.
“제발 내게 면제권을 사용해주게! 응? 이대로는 꼼짝없이 인간들의 감옥에 가야해!”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네!”
“나 좀 살려주시오! 난 원로란 말이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도 연대책임제로 인한 벌점 폭탄은 피할 수 없었고, 벌점이 쌓여 언더하임 행이 확정된 자들은 낮이 밝기 전에 면제권을 가진 엘프들을 찾아다니며 애원했다. 그러나 보통 면제권은 자기 자신이나 가족들을 위해 아껴두고 싶어 했기에, 남을 위해 선뜻 사용해 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리고 다른 엘프들은 이렇게 밤마다 애원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도 ‘가지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엘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수단은 역시 ‘추방’이었다. 케이지는 수용소의 시스템을 거의 그대로 채용하고 있었지만 위그드라실은 수용소와는 조금 성격이 달랐다. 수용소는 특식이나 휴가같이 바깥의 생활을 접하게 해주거나, 바깥에 나가는 것이 최고의 포상이었다. 반면 위그드라실의 엘프들은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최악으로 여겼다. 케이지는 이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4일차에 들어서자, 케이지는 아침 점호 참석률 80%대를 기록했다. 첫날에 절반도 나오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약속드린 대로, 폭력이나 고문같은 행위를 사용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폐하.”
“…하하하.”
로드가 기가 찬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이 남자, 정말 물건이다.
“통제관, 이 다음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티아가 물었다.
“당연히 그들에게 ‘노동’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노역인가…… 과연 엘프들이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군. 혹시 짜둔 일정표가 있는가?”
“예.”
케이지가 양피지 하나를 내밀었다. 받아본 티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로드도 티아의 뒤로 돌아와 그것을 보았다.
‘……와우.’
6시 기상으로 시작해서, 쉬는 시간은 두 시간에 15분 씩. 점심시간 한 시간, 그 이후 다시 노역이 이어지다가 저녁에 야간 점호. 무척이나 빠듯한 시간표였다.
“통제관, 이는 너무 인간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시간표이니라.”
티아가 진단을 내렸다.
“엘프들이 이 일정을 바로 소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휴식시간을 더 늘려야 한다.”
엘프들은 수명이 긴 만큼 게으른 생활을 해왔다. 주로 세계수에 퍼질러 낮잠을 자는 것을 즐겼으며 그러다가 배고프면 열매를 따먹고, 심심하면 숲에서 사냥을 했다. 제대로 된 노동을 해본 적 없는 이들이 이런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지 티아는 의문을 가진 것이다.
“통제자들에게 노역을 시키는 이유는 단순히 노동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영주.”
케이지가 말했다.
“엘프든 인간이든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정해져 있습니다. 엘프들을 자유롭게 방치하면 그들은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사용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반란, 암살 같은 것들 말이지요.”
로드와 티아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노동은 순수하게 육체를 다루는 힘. 그들에게 달리 생각할 여지를 줄어들게 만들 겁니다.”
“그 점에는 본녀도 부분적으로 동의한다만, 이 일정은 너무 가혹하다. 수많은 엘프들이 과로로 죽어나갈 것이니라. 무엇이든 선을 넘으면 탈이 나기 마련, 이런 제도야 말로 그들의 불만을 증폭시켜 폭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어찌 이해하지 못하는가?”
두 사람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주공의 생각은 어떤가?”
그리곤 갑자기 두 사람의 시선이 로드 쪽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아프게했어 / 대 화가분이 여기 계셨군요.
웅성웅성 / ㅠㅠ 감사합니다! 사실은 휴재충이지만 흑
파채 / 으음, 서로의 의견이 다른것이니 이 의견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우선 엘프들은 아주 강력한 자종족 우월주위에 푹 빠져있고 프라이드가 너무 높습니다. 타종족인 인간들의 지배를 받게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요. 그들의 입장에선 노비였던 미천한 돌쇠가 어느날 갑자기 칼들고 이제부턴 내가 너희 주인이다! 하는 격이죠. 프라이드가 높은 양반들이 그 즉시 바로 양반체면이고 뭐고 다 버리고 엎드리고 이렇게 되는건 이상하다고 봐요. 아직은 혼란에 빠져있는거죠. 그리고 원로들이 좀 심하게 까불긴 했는데 이 대륙에서는 통치자가 영지민들을 학살한 전례가 별로 없습니다. 작중에서 나왔지만 대륙 완전 정복을 위해서는 통치자의 평판도 중요합니다.
T스톤 / 로드가 사정사정해서 데려왔죠 ㅋㅋㅋ
푸른물결2 / 맞습니다 제대로 보셨네요!
Mr윤 / 감사합니다아!
꿈속의활로 /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에 수백살 먹은 나이까지... 삼위일체지요
ㅁㅡㅁ레인 / 역시 타협을 할때 하더라도 일단은 최대한 뻐팅겨 보는게 사람의 속성 아닐까요?
레스카디아 / 히익....; 다 죽이면 그것대로 문제가 많아서..
물주아자씨 / ㅋㅋㅋㅋ 아크.. 죄송합니다. 그 설정에 푹 빠져버렸더니 독자님들 손발은 고려못했어요. 다음에 등장시킬 땐 좀 자제시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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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라토텝 / 너무 프라이드와 권의의식이 강해서 눈이 멀어버린듯해요
@알테니아 / 귀를... 흠흠흠!
@로리콤MK / 잠깐 등장시켰는데 의외로 기억해주시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ㅠㅠ
@火炎無 / 으아아아! 너무해 ㅠㅠ 정말 고생하시네요
@마리오넷 / 소장님 교육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