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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의 나라
“주공의 생각은 어떤가?”
티아가 물었다.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보고 있던 로드는 갑자기 시선이 집중되자 움찔했다.
“……본녀와 통제관이 싸우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는가? 주공. 이상한 미소를 짓고 있구나.”
로드가 무안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하하, 미안합니다. 갑자기 재미있는 생각이 나서요. 그럼 티아는 이 일정표를 어떻게 바꾸고 싶나요?”
“잠시만 기다려다오.”
티아는 그 자리에서 바로 깃펜을 꺼내 일정표를 슥슥 손보았다.
“자. 여기 있다.”
로드가 수정된 일정표를 받아들었다. 한 시간이었던 점심시간이 4시간으로 대폭 늘었고, 중간 중간 휴식시간도 길어졌다. 케이지도 로드로부터 일정표를 건네받아 보았다.
“…흠, 다른 건 몰라도 이 4시간의 휴식은 이해가 안 됩니다만.”
“원래 엘프는 하루에 세 번 잠을 잔다. 단순히 식사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중간 숙면시간이기도 하노라.”
케이지는 일정표를 책상에 올려두었다.
“의외군요. 영주께서 이렇게나 그들에게 신경을 써주다니… 엘프들을 증오하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이니라. 본녀는 지금 영지민들을 통치하는 영주의 신분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다시 잠깐의 토론을 거친 후, 결국 케이지는 티아의 의견을 수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알브헤임은 그의 관할이 아니었기 때문에 의견을 밀어붙일 이유가 없었다.
“그럼 티아의 일정대로 하는 걸로 결정된 거죠?”
로드의 물음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제관. 미안하지만 악역을 맡길 생각인데 괜찮겠습니까?”
“그야 물론입니다. 소신에게는 오히려 그 편이 편합니다.”
“고마워요. 그럼 일정 첫날은 통제관의 원래 계획대로 하겠습니다.”
“……?”
두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둘째 날부터 티아가 수정한 계획으로 하는 겁니다.”
두 사람이 설명을 요구하듯 빤히 바라보자 로드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난 원래 이런 쪽으로 밖에 머리가 안 굴러가서요. 하하…….”
*
7일차부터 본격적인 일과가 적용되었다.
엘프들은 수명이 긴 만큼 게으른 성향의 종족이었다. 노동이 필요한 작업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소유한 ‘루트 영지’에 있는 인간들에게 맡겼다. 하지만 이제는 인간들이 대신 해주었던 일들을 엘프들 스스로 도맡아서 하게 되었다. 농사, 채집, 목공, 공예, 수공업 등 한 가지 이상의 작업을 반드시 선택해야 했고 하루에 정해진 할당량을 채워야만 했다.
일과 첫날은 케이지가 처음에 계획했던 살인적인 일정이 적용되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만 자던 엘프들에게 이 일정은 상당한 고역이었다. 할당량을 채워야 휴식이 주어졌기 때문에 한눈 팔 새가 없었다. 집요한 간수들은 위그드라실 전역을 돌아다니며 엘프들을 들들 볶아댔다.
얼마 안 가 부작용이 나타났다. 고된 일정에 강하게 반발하는 엘프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마다 케이지와 간수들은 난동을 피우는 자들을 즉시 체포하여 언더하임으로 압송시켰다.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날이 저물며 처음으로 일과를 소화한 엘프들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아예 탈진한 자들도 몇몇 있었다. 노역에 저항하다가 벌점 폭탄을 받은 엘프들이 수두룩했고 그나마 인간들에게 협조적이었던 엘프들까지 우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지칠 대로 지친 엘프들이 야간 점호시간에 모였을 때, 티아가 나타났다.
“본녀는 통제관의 일과가 엘프들이 소화하기엔 너무 가혹하다고 판단했느니라. 영주의 자리에 오른 자로서 이러한 사태를 관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통제관에게 명하여 내일 새로운 일정을 적용할 터이니 그리 알라.”
케이지의 간수들이 돌아다니며 수정된 일정표를 나누어주었다. 엘프들은 이제야 안도했다. 적어도 오늘의 괴로운 일과보다는 훨씬 나아져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로 티아에 대한 인식도 조금은 바뀌었다. 학살자 페어리 퀸이라는 오명이 하루아침에 변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영주 노릇은 하려고 노력한다는 정도로 완화되었다. 이 사건으로 티아는 영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모습을, 케이지는 더욱 악질적인 악역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좋아, 좋아. 잘 된 것 같네.’
로드는 멀리서 엘프들의 반응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빛과 어둠. 선역과 악역. 조직 내에서 이 둘의 역할은 상반되지만 두 쪽 모두 조직을 지키는데 기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악역은 스스로 적이 되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규율을 세운다. 그리고 리더가 그런 악역을 자제시키면서 조직원들의 존경을 받는다.
티아와 케이지가 일정을 가지고 대립할 때 로드는 이러한 생각들을 떠올린 것이다.
‘그럼 이제 다음 단계로 가볼까.’
다음 날 부터 바뀐 일과가 적용되며 엘프들의 불만은 다소 줄어들었다. 특히 중간에 4시간의 휴식이 그들에게는 큰 배려로 작용했다.
일과가 안정화되고 엘프들의 통제도 원활해지자, 로드는 다시 티아와 케이지를 집무실로 불렀다.
“그동안 훌륭했습니다. 케이지. 기대이상의 성과였어요.”
“황송하옵니다. 폐하.”
“이제 엘프들이 통제에 따라주는 분위기이니,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도 접근하고자 합니다. 엘프들에게 타종족의 문화를 맛보게 하여, 그들의 혐오감을 낮추게 하고 싶습니다.”
언제까지고 케이지가 알브헤임에 붙어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엘프들이 왕실에 충성하고 인간에게 쭉 우호적일 수 있도록, 장기적인 조치를 취해야했다.
“채찍 다음에는 당근을 쓴다는 것이군요.”
케이지가 말했다.
“비슷합니다. 사실 지금의 엘프들은 강압에 못 이겨 통제에 따르고 있지만, 타종족을 혐오하는 성향은 여전합니다. 저는 이런 부분들을 고쳐주고 싶네요.”
케이지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확실히 우리가 고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목에 칼을 들이밀고 ‘너 우리랑 친해져!’라고 압박한다 한들, 시늉만 할 뿐이지 진정으로 친해지는 것은 아니다. 타종족에 대해 날이 잔뜩 서 있는 엘프들에게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은 역시 문화였다.
“그런 거라면 본녀에게 맡겨다오!”
티아가 허리에 손을 얹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본녀는 인간들의 사회에서 오랜 기간 동안 생활했느니라. 세계수에서 나온 이후 인간 세계에서 가장 좋았던 것들을 추려 보겠다.”
“좋아요. 믿고 맡기겠습니다, 티아.”
*
10일차부터는 일과에 ‘수업’이 적용되었다. 언더하임에서 파견 된 ‘더 인텔리전스’의 교사들이 수업을 맡았는데 대륙어를 비롯하여 가장 기본적인 수학, 역사, 음악 등의 과목들을 가르쳤다.
수업은 일과 중의 노역을 대체할 수 있어서 인간에 대한 적대감이 덜한 젊은 엘프들 사이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로드는 학습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들의 문화 위주여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까 염려했지만, 의외로 엘프들은 새로운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교육 다음에는 음악이었다. 언제나 관중에 목말라 있는 베틀린의 음유시인들 몇몇이 위그드라실로 넘어왔다.
“여기서 먹고 자면서 연주만 하면 월급까지 준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이곳이야 말로 실로 지상낙원이군요! 맡겨 주십시오!”
배고픈 예술가들은 새로운 일자리에 아주 만족하는 눈치였다.
음유시인들은 위그드라실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자유롭게 연주했다. 처음에 엘프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음악은 둘째 치고 ‘또 어머니 나무에 불순한 타종족들을 부르다니!’와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던 중.
엘프들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그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됐다는 것을 눈치 챘다.
“설마 그 미천한 인간 놈들의 노래를? 내가?”
문화는 종족과 국적의 경계를 허무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엘프들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낙담했지만 음유시인들은 이 독특한 관중들을 관찰하는 재미로 살고 있었다. 음유시인들은 며칠 만에 엘프들이 어떤 음악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파악을 완료했다. 그들이 연주를 시작할 때면, 엘프들은 신경 쓰지 않는 척 하면서도 주위를 기웃거리며 음악을 다 감상하고 돌아갔다. 음유시인들이 보기엔 무척 귀여운 행동들이었다.
“……이봐! 인간!”
음유시인이 어느 때와 같이 혼자서 만돌린을 연주하고 있는데 한 나이 많은 엘프가 불렀다.
“아, 옛! 어르신.”
“흠흠, 그거 좀 해봐. 그거.”
알브헤임에서의 역사적인 첫 신청곡이었다. 음유시인은 온 얼굴 근육을 이용해 방긋 웃는 영업용 미소를 만들어 내며 물었다.
“어떤 곡을 원하십니까?”
“흠흠. 그거 있잖아. 어제 아침에 했던 거. 좀 잔잔한 거.”
“아하, 뭔지 알겠네요.”
드디어 앞에서 들어주는 사람이 생겼다. 기분이 좋아진 음유시인은 더욱 열정을 다해 연주했다. 잔잔한 선율이 흐르자 아침 점호를 위해 가고있던 엘프들이 걸음을 멈추고 연주를 들었다.
마침내 한곡이 다 끝나고, 노년 엘프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쌩 가버렸다. 음유시인은 큭큭 웃었다. 그래도 초창기에 비해서는 큰 변화였다.
“흥, 인간들은 싫지만 인간들의 노래는 의외로 좋단 말이야.”
한 엘프의 중얼거림이었다.
음악에 이어서 이번엔 음식이었다. 어비스에서 파견된 요리사들은 엘프들의 식성에 맞추어 과일과 채소들이 주재료가 된 음식들을 만들어 제공했다. 수백 년 동안 세계수 열매만 따먹던 엘프들에게는 다양한 향신료와 재료들로 만들어진 음식은 여러모로 컬쳐쇼크였다. 노역으로 배고팠던 그들은 프라이드고 뭐고 인간이 만든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흥, 인간들은 싫지만 인간들의 음식은 또 맛있단 말이야.”
이번에도 한 엘프의 중얼거림이었다.
티아가 계획했던 문화 정책은 노역의 피로를 풀어주는 역할을 하며 자연스럽게 엘프들에게 자리 잡게 되었다.
위그드라실에서 폐쇄적인 생활을 하며, 자종족 우월주위에 푹 빠져있던 엘프들에게서 생각의 변화가 생겼다. 인간들은 미천하긴 하지만 이들이 만드는 물건이나 음식은 의외로 좋다. 라는 정도의 작은 인식 변화가 시작이었다.
여기서 케이지는 상점 제도를 고쳐서 지원사격을 가했다. 상점은 ‘면제권’말고는 큰 이점이 없었지만 상점으로 인간들의 다양한 물건이나 음식들을 무료로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이미 면제권을 가진 자들에게도 좀 더 동기를 부여했다.
그리고 가장 첫날에 언더하임 지하 수용소에 갔던 엘프들이 위그드라실로 돌아왔다. 케이지는 수용소에 간 ‘첫 기수’는 여러모로 억울한 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며 특별히 일주일만 지내게 하고 돌려보냈다. 케이지는 자비를 베풀어준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이유가 있었다.
“거긴 지옥이야.”
“하아아,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아. 그렇게 끔찍한 곳은 처음이었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말해줘도 이해하기나 하겠어?”
일주일 동안 수용소에 다녀온 엘프들이 모험담처럼 이야기보따리를 풀 때면 엘프들이 주위에 가득 몰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그런 곳에서 한 달이나 있을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끓겠다.’고.
일명 첫 기수들의 경험담으로 알브헤임 수용소의 악명은 널리 퍼졌고, 엘프들은 벌점을 피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과를 수행했다.
케이지의 통제 정책과 티아의 문화 정책. 언제 어디서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폐쇄적인 엘프들의 사회에 조금씩이나마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Mr윤 / 감사합니다!
LYKS / 오가작통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한명이 도망가면 처벌하는 법은 없지만 연대 책임제라 비슷한 느낌이네요
니알라토텝 / 게노세르크행 형벌 ㄷㄷㄷ
알테니아 / 귀햛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건 또 무슨 신조어죠? ㄷㄷ
해리엇트 / 북한보다 여기가 더 괜찮은듯?
파채 / 장문의 지적 정말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니까 원로들의 어중간한 태도라는 게 문제라는 것이군요. 개연성이 이상하다고 느끼실 수 있을것 같아요. 제가 의도한 것을 말씀드리자면 원로들은 처음엔 프라이드, 그리고 종족멸절의 전례가 없었고, 어비스의 왕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 내리기 위해 '반란을 위한 연기'가 아닌 강하게 밀어붙이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죽음을 각오하고요. 하지만 결국 그들의 주장엔 당위성이 없음이 티아와 케이지에게 논파당했죠. 처음 계획이 망가져 버리면서 질질 끌려다니게 된 겁니다. 그리고 노비의 칼이 목전에 다가와 있을때 처음엔 프라이드 높은 양반이라면 협상의 여지가 있을지 살필 것입니다. '어허, 그 칼 내려두거라!' 하면서요. 그러다가 정말 노비가 눈이 돌아가서 자신을 죽일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그제서야 상황파악하고 엎드리지 않을까요? 저는 현재의 상황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박성빈 / 와우; 하나의 스토리를 써주셨네요. 이 부분으로 파고들어 봐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엘프들이 노동을 해야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봐요. 그동안 인간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어 온 걸 본인들이 도맡아서 하게 된 것이니까요. 본작에서는 그 부분에 대한 설득이 없이 케이지가 강요한 느낌인데 이렇게 써도 좋을것 같습니다
Croness / 네? 자매단? 혼란하다 혼란한 병사들?
T스톤 / 케이지 센세 ㅋㅋㅋㅋㅋ
@마리오넷 / 묵묵히 일 잘하는 케이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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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炎無 / 허억... 화염무님이 고생하시면 제 목숨도 위험한 건가요...
@물주아자씨 / 네 ㅋㅋㅋ 서로 만나서 회의하는 씬도 써볼 생각입니다.
@...(-1)... / ... 이분이 엘프들을 맡았으면 잡초도 안나는 땅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다음생은북유럽에서 / 단기결전이니 그 말씀도 일리가 있다고 보네요. 그 방법이 깔끔하기도 하구요. 하지만 학살같이 강제적 처분은 리스크가 큽니다. 전례가 없는 사태이기 때문에 로드의 평판은 급감할테고 후반으로 갈수록 점령지의 국민들의 불안과 불만은 커지죠. 그리고 로드는 강압적인 방법을 아예 안쓰겠다는 것이 아니라, 두번째 선택지로 두었습니다. 일단 케이지를 불여들여 통치를 시도해보고, 만약 여의치 않았더라면 무슨 짓이든 저질렀겠죠. 로드도 '그냥 노예로 만들어 버릴까'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플랜 A와 B. 둘다 있는데 A에서 잘된 경우입니다.